한약으로 암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도 서양적인 방법으로 극복하지 못한 암 전이 과정을. 하지만 최근 한방으로 암 전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됐다고 한다. 어떤 원리인지 알아보자.
지난 1998년 5월, 뉴욕타임스와 CNN 등의 언론은 암을 퇴치할 수 있는 ‘기적의 항암제’가 개발됐다며 연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버드 의대의 주다 포크먼 박사가 암의 혈관생성을 억제하고 암 전이를 막는 물질인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을 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포크만 박사는 이 두 물질을 암에 걸린 쥐에게 주사해본 결과 큰 암 덩어리도 재발 가능성 없이 완전히 박멸되는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상실험 결과 별다른 효능이 입증되지 않아 지금은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미국의 앤더스 암센터에서 진행성 종양환자에 대한 1차 임상실험이 실시중인데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다.
지난 한세기 동안 암을 극복하기 위한 서양의학적 방법은 다양한 방면에서 시도돼 왔다. 하지만 현재까지 속시원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암이 쉽게 정복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암세포의 전이 특성 때문이다. 암은 최초 발생한 장소에서 무한 증식을 하다 어느 순간 체내의 다른 장기로 이동해 그곳에 또다른 근거지를 만든다. 실제로 대부분의 암환자가 사망하는 이유는 암의 전이 또는 재발에 의한 것이지, 최초 발생한 암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이 비밀은 신생혈관
최초에 발병한 암과는 달리 전이암은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을 뿐더러 이미 환자의 체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암환자는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에 대항할 능력이 없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적절한 치료를 받은 후 암환자의 생존을 보장하는 관건은 어떻게 하면 암의 전이를 억제·차단시킬 수 있는가로 요약된다.
암 세포는 어떻게 체내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그 비밀은 바로 혈관이다. 실제로 암 조직의 사진을 보면 주위에는 항상 정상조직에 비해 많은 혈관이 분포한다. 무한 증식하기 위해 스스로 혈관을 만드는 것이다. 이 혈관이 바로 신체의 다른 부위로 이동할 수 있는 암의 ‘침투로’다.
그러면 암 세포는 어떻게 혈관을 만들 수 있을까. 체내의 정상세포는 평상시에 모세혈관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태아가 성장할 때, 상처가 아물 때, 여성이 생리중이거나 그 직후 등 모세혈관이 자라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모세혈관을 만든다. 체내에서 혈관이 새로 만들어질 때는 세포 내의 혈관내피세포 증식 촉진인자와 억제인자가 알맞게 분비돼 그 균형을 유지한다. 필요한 만큼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암세포는 다르다. 암세포는 자신의 무한한 증식을 위해 숙주인 인간의 몸에 새 혈관을 만들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내보낸다. 따라서 암의 혈관생성 과정을 막는다면 암의 전이는 물론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
중의학에서 힌트 얻어
앤지옴(angiOM)은 암의 혈관생성 과정을 차단해 전이를 막는 한약제재다. 앤지(angi)는 ‘혈관’, 옴(OM)은 ‘한약’(오리엔탈 메디슨)이라는 뜻이다. 즉 앤지옴은 암의 혈관생성을 막는 한약이다.
한의학에서는 병에 대한 접근 방법이 서양의학과는 다르다. 서양의학은 암을 비롯한 모든 질환의 치료에서 질병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인체의 국소부위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한의학은 어느 특정 부분에 집착하지 않고 그 원인과 배경이 되는 몸 전체에 관심을 가진다. 병의 원인인 인체의 내적 환경을 개선시켜 증상이 저절로 소멸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암치료의 경우에 적용되는 한의학적 원리를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활혈화어(活血化瘀), 청열해독(淸熱解毒), 화담연견(化痰軟堅), 부정배본(扶正培本) 등이다. 쉬운 말로 풀어쓰면 활혈화어란 혈관이나 혈액의 병리적 상태를 개선시킨다는 뜻이고, 청열해독은 염증 등으로 인한 열과 독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화담연견은 병든 체액을 흡수·제거하거나 경직된 인체조직을 완화시킨다는 뜻이다. 또 부정배본은 면역기능 등 인체의 자생력을 배양시킨다는 말이다. 앤지옴의 경우는 활혈화어와 부정배본의 원리에 의해 개발된 약제다.
앤지옴의 힌트는 필자가 지난 1993년 중국정부의 초청으로 북경의 중국중의연구원 광안문병원 종양과에서 암 연구를 하던 시절 얻었다. 이 병원에서는 수술, 화학요법, 방사선요법을 모두 마친 암환자에게 재발 방지를 위해 울금(鬱金), 도인(挑仁) 등의 약재를 기본으로 한 복합처방제를 투여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한의사들은 이 약의 기본원리나 과학적 배경은 모른 채 전통과 경험에 의존해 효과가 입증됐다는 이유로 이 약을 투여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이 약이 왜 암의 재발 방지에 효과를 보이는지 과학적 검증을 시작했다.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이 약제의 암 전이 억제 메커니즘을 밝혔다. 여기에 약의 효능을 배가시키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도록 산자고, 의이인, 해마 등의 약재를 추가시켜 앤지옴을 개발했다. 앤지옴은 지난 3월 국내에 특허등록된 암 관련 국내 최초의 한약처방이다. 현재 미국 등에서도 특허를 출원중이다.
서양 연구 결과와 동일한 유효성분
앤지옴은 어떻게 암 전이를 막을 수 있을까. 암은 여러 복잡한 단계를 거쳐 다른 기관으로 전이한다. 일단 암세포는 일정 정도 성장하면 주변에 신생혈관을 만들어 이를 기존의 혈관에 연결시킨다. 암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암세포는 이 혈관을 타고 체내의 각 부위로 이동한다. 원하는 조직에 도착한 암세포는 혈관내피세포의 바깥막(ECM)을 뚫고 나가 그곳에서 다시 성장한다.
암 전이 과정을 억제하려는 세계적인 추세는 이 과정 중 어느 한단계를 차단하는 약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관심을 끄는 핫이슈는 암세포가 가지고 있는 ECM 분해효소의 억제재 개발분야다. 바깥막 분해효소를 MMP라 부르는데, 이 효소는 암이 혈관을 새로 만들거나 다른 장기로 이동해 그곳으로 침투할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MMP는 암이 자신의 혈관을 기존의 혈관에 연결시킬 때 혈관내피세포를 녹여 둘을 결합시키며, 다른 장기로 침투할 때도 혈관내피세포의 바깥막을 뚫어 ‘침투로’를 확보한다. 미국의 국립암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혈관신생 억제재 임상시험 프로젝트 15건 중 4건이 MMP의 저해와 관련된 것이다.
앤지옴 역시 MMP의 분비량을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다. 실험실에서 배양된 암세포에 앤지옴을 투여한 후 그 변화를 관찰한 결과 암세포의 성장이 멈췄으며, 암세포가 분비하는 MMP 분비량도 줄어들었다. 또한 사람의 육종세포, 뇌암세포, 유방암세포, 간암세포 등을 쥐에 이식한 후 실험한 결과, 이들 암세포에서도 MMP의 분비량이 감소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은 아직 하지 않고 있다. 앤지옴의 경우 원래 환자들에게 처방하고 있던 약제의 효능을 실험적으로 확인한 것이므로 통상적인 신약개발과는 순서가 반대다. 확실한 효능과 약의 안전성이 검증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임상실험 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앤지옴의 어떤 성분이 MMP의 분비량을 감소시킬까. 앤지옴의 성분 중 유효성분을 찾으려는 연구는 세종대 생명공학과 권호정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권교수의 분석 결과 앤지옴의 비밀은 커큐민(curcumin)이라는 물질로 밝혀졌다. 커큐민은 앤지옴의 구성약물인 울금의 주요성분이다. 울금은 우리가 즐겨먹는 카레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커큐민에 대한 암전이 억제효과는 1996년 혈관신생 연구학회에서 보고된 적이 있으며 미 국립암센터에서도 관련된 임상연구가 진행 중이다. 비록 전혀 다른 배경과 과정을 거쳐 확인된 결과들이지만 이는 앤지옴을 통한 암전이 연구방향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아직까지는 보조수단
앤지옴은 한약 복합처방이다. 앤지오스태틴은 사람의 체내에 있는 ‘플라스미노겐’이라는 단백질의 일부 조각이며 엔도스태틴 역시 체내에 있는 ‘콜라겐18’의 조각으로 모두 체내에서 생산되는 생리활성 물질이다. 두 물질이 임상실험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않자 일부 의학계에서는 인체 내 물질로 항암제를 만들려는 시도에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단백질은 대체로 몸 밖에서 불안정하다. 또한 ‘영악한’ 암세포는 인체 내 물질에 쉽게 적응해 곧 내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기적의 항암제로 기대를 모았던 인터루킨 역시 임상에서 부작용이 너무 많아 지금은 흐지부지되고 있다.
이에 비해 앤지옴은 생약제재로 물질적 특성이 안정적이며 흡수율 또한 서양의 화학약품보다 뛰어나다. 아울러 앤지옴은 면역세포인 킬러 세포를 활성화시키는 등 인체의 면역력을 향상시키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앤지옴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암세포의 전이와 성장에는 효과적이지만 앤지옴 자체로는 암세포를 직접 죽일 수 없다. 아직까지 암에 대한 치료는 기존의 수술,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등이 주축이다. 앤지옴은 다만 이들의 1차치료가 끝난 후 잔여암의 재발 방지와 전이를 막기 위한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한방 자체만으로 암세포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