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시계가 진동하는 판 위에 놓인다면 떨어지는 모래의 움직임은 어떨까.
과학전공 대학원생이나 교수라면 이 문제를 보고 즉시 정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들도 관련 자료를 찾고, 아이디어를 내며, 실험하고, 수학적으로 따져보아야 할지 모른다. 또한 결과로 얻은 해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이같은 문제를 수개월 동안 팀을 이뤄 함께 해결한 뒤, 다른 팀과의 논쟁과 토론을 통해 과학 실력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 바로‘국제청소년물리학자토너먼트’(International Young Physicists’Tournament, IYPT)다.
IYPT는 1979년 옛소련의 모스크바대에서 물리학에 뛰어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그러다 동구권 국가가 참여하면서 국제대회로 발전했고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면서 서유럽 국가가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시아권에서 참가한 국가는 없다.
올해 대회는 5월 23-29일 핀란드 에스푸에서 열렸다. 국제대회로는 14회로 16개국에서 18개팀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물리학에 재능을 지닌 18세 미만의 학생 5명으로 구성된 팀이 참가한다. 대개 구성원은 고등학생이다.
발표∙반론∙평론 1팀 3역
우리나라에서 물리올림피아드, 수학올림피아드와 같은 국제과학경연대회가 비교적 널리 알려진데 반해 IYPT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대회가 교육 관계자로부터 주의를 끄는데는 이유가 있다. 대회 진행방법과 내용이 특이할 뿐 아니라 교육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저명한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조직 위원회는 매년 가을(주로 10월) 17개의 문제를 출제해서 공개한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닌 주변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과 관계되고 대부분 이론적 모형에 따라 해가 달라지는 특성을 갖는다. 심지어 과학자에게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흥미로운 문제가 제시되기도 한다. (과거에 출제된 문제는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 (www.dongaScience.com)를 통해 볼 수 있다).
참가자들은 주어진 과제를 과학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한뒤 결과를 해를 제시해야 한다. 즉 관련된 방정식이나 수학적 모형을 세우고 이론을 전개하며 이러한 이론적 결과와 실제 실험 결과를 비교해 해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이같은 준비과정을 거친 후 실제 경기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3팀이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각 팀은 돌아가면서 발표팀, 반론팀, 평론팀을 맡는다. 따라서 한경기는 3팀이 3회전을 치러야 끝난다. 시간은 각 회전마다 45분이다.
토론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러시아어이지만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수일간의 예선전을 거쳐 총점이 가장 높은 우수 3팀이 최종 결승전에 참가한다.
긴장되고 팽팽한 예선전을 거친 결과, 이번 최종 결승전에 슬로바키아, 독일, 그리고 호주팀이 진출했다. 호주팀은 모두 여학생으로 구성돼 있어 대회 초반부터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독일은 막강한 수학실력과 차분한 발표로 다른 참가국을 압도했다. 슬로바키아는 예선전 초반에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후반에서 점수가 급상승하면서 다른 팀을 긴장시켰다. 최종 우승팀은 슬로바키아. 근소한 차이로 호주가 2위, 독
일이 3위를 차지했다.
참가 학생과 지도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각 나라별로 어떻게 이 대회에 참가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미국과 호주팀은 국가 대표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한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팀이 출전한다. 반면 폴란드는 34개팀이 참여한 국내대회를 통해 대표팀이 선발된다.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대에서 IYPT 대회를 공고하고 학생 개인별로 탐구보고서를 제출하면 우수한 개인을 선발해 대표팀을 조직하고 이를 지원한다.
대체로 국가 대표 선발전을 거치는 경우, 준비가 보다 철저하고 문제해결과정에서 대학이나 과학자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기가 용이하다. 일반적으로는 주어진 과제가 17개나 되기 때문에 한 학생이 3-4개의 과제를 중점적으로 맡아 해결하면서 1주일에 서너번씩 팀별로 모여 서로 부족한 점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대회를 준비한다.
호주팀의 경우 퀸즈랜드 여자고등학교의 물리선생님이 IYPT에 관심을 가져 4년 전부터 참여했다. 처음에는 하위권에 머물다가 올해 처음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지도교사는“이 대회가 결과에 관계없이 학생들에게 소중한 교육적 기회라는 것을 믿고 개인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학생들을 참가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끝이 열린 경연 대회
미국은 지금까지 두번 참여했지만 지난번과는 전혀 새로운 팀이어서 대회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부족했다. 영락없이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지만 지도교사는 낙담하지 않고 IYPT가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특히 참가자 중 양팔이 없는 장애 학생이 발표할 때 발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모습은 과학 외에도 학생들이 IYPT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줬다.
상당한 경험과 국가적 지원을 받아 참가한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학생들은 수학, 과학의 기본지식과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이 대학 수준 이상이었다. 그리고 연구결과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IYPT는 청주대 정병훈 교수에 의해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 1993년과 1994년 2년 동안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 주최로‘공동탐구토론대회’라는 이와 유사한 형식의 대회가 실시된 바 있다. 현재는 서울대 물리교육과에서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평소에 이 대회에 주목하고 있었던 서울대 박승재 교수는 이번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돼 참석했다. 박교수는 국내에서도 좀더 논의가 활성화되면 이와 유사한 경연이 실시돼 과학에 재능있는 학생들에게 좋은 도전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YPT와 같이‘협동적’으로 상당한 기간동안‘이론’과‘실험’을 병행해야 하는‘끝이 열린’과학 경연은 한국의 과학교육 방법과 내용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