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과 마찬가지로 심해에도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심해에 사는 생물종 수만 1억에 이를 정도다. 그리고 심해에서는 미지의 새로운 생물을 만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 심해의 생물을 직접 만나보자.
심해저에는 수만km의 커다란 산맥과 수천km에 이르는 해구, 수백km 뻗어있는 해저 협곡이 있고, 심해 평원에는 높이 수천m의 해산이 있다. 심해저에 펼쳐진 그 장대한 광경은 육상지형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다양한 지질학적 환경에 걸맞는 다양한 생물이 심해에 살고 있다.
지형이나 수심이 달라지면 당연히 해수의 움직이는 방향이 변하고, 생물이 뿌리를 내리는 방법과 먹이를 잡는 방법도 달라진다, 결국 심해 환경에 따라 다른 생활형을 가진 독특한 생물 군집이 형성된다.
매우 엄격한 먹이 환경
식물이 살 수 없는 심해저에서 광합성에 의한 유기물질 생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물의 먹이 환경은 아주 엄격하다고 할 수 있다. 육지로부터 거리가 먼 외양 심해는 바다 표면에서의 유기물질 생산이 아주 적을 뿐 아니라, 유기물질의 대부분은 낙하하는 과정에서 중간층에 사는 미생물이나 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따라서 심해저에 도달하는 유기물은 영양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표면의 0.1-1% 정도에 불과하다.
또 심해는 육지보다 수천배나 높은 기압이기 때문에 육지의 일반 생물이 심해에 들어가면 형체도 남기 힘들다. 그런데 심해의 생물을 표층으로 올렸을 경우 생물이 터져 버리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압력이 문제가 되는 상황은 물고기의 부레와 같이 기체가 존재하는 경우이고, 몸 내부 전체가 액체 또는 고체로 채워져 있다면 전혀 영향이 없다.
이런 극한 환경 속에서 생물은 어느 정도 살고 있을까. 그 양을 알려주는 척도가 바로 생물량이다. 생물량이란 1m2의 해저 면적 당 살고 있는 생물 체중의 합계로, 그 환경이 유지할 수 있는 생물의 양이라는 뜻이다. 연안에서는 수십 g/m2로 생물량이 높지만, 대양 중앙부의 심해는 생물량이 0.05-1g/m2에 불과할 정도로 서식 밀도가 매우 낮다. 그러나 육지 근처의 움푹 파인 곳인 해구는 수심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이상의 생물량을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 때문에 강에서 흘러나온 유기물이 해구에 많이 쌓이기 때문이다.
운동기관 포기한 ‘인내형’
육지와는 아주 다른 환경, 즉 유기물이 적고, 생물의 서식밀도가 낮은 아주 엄밀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물은 무엇인가 육지와 다른 적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
대표적인 전략 몇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감각기관을 심해환경에 맞게 특수하게 발달시키는 방법이다. 어두운 심해에서 광감각기를 포기하지 않고 빛을 내는 발광기관을 발달시키면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광감각기 대신 움직임을 느끼는 진동감각기관을 발달시키거나, 소리를 듣는 청각기관을 발달시키기도 한다. 또 자신이 필요한 화학물질을 감지하는 수용기를 발달시킨 종류도 있다.
또 다른 적응 전략은 먹이를 구하는 방법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찾는 육식성, 잡식성 생물은 몸집이 커지고 근육질이 된다. 그러나 뻘이나 모래 속에서 먹이가 되는 퇴적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인내형’ 생물은 몸집을 작게 만들고 운동기관을 버린다.
번식 전략도 달라진다. 심해생물은 어떤 크기의 알을 얼마나 자주 산란할지 고심해 선택한다. 적은 수의 커다란 알을 산란하거나, 알 대신 새끼를 직접 낳는 태생의 특징을 갖고 있는 종류도 있다. 암수가 쉽게 만나기 힘든 조건이기 때문에 수컷이 암컷에 기생하거나 우연히 만난 상대방에 맞춰 성전환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먹이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나 유인하는 방법 , 많이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방법의 훈련 등을 통해 생물은 심해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생물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이나 연구 결과를 뛰어넘을 정도로 무척이나 다양하기 때문에, 이와 다른 예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미지의 생물 만나기 쉽다
현재 생물 다양성 보전은 과학을 넘어 정치 문제가 될 정도로 지구의 중요한 과제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말, 미국의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샌더스는 여러 수심에서 생물종을 비교했다. 그는 심해생물과 종다양성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심해는 종 다양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샌더스는 종 다양성이 높은 이유로 ‘안정성시간가설’(Stability Time Hypothesis)을 제창했다. 안정한 환경에서 생물은 생태적 지위를 세분화하기 위해 진화한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안정한 환경일수록 다양성은 높아지는데, 심해가 바로 그런 환경이라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그후 많은 논쟁을 일으켰는데, 1983년 렉스에 의해 심해생물의 종다양성을 일으키는 최대 요인으로 ‘교란’이 지목됐다. 교란이란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해 생물에게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한다. 벌목이나 댐건설과 같은 심각한 인위적 교란은 오히려 종다양성을 줄인다. 그러나 물의 흐름의 변화나 수온의 변화와 같이 심해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교란은 오히려 약으로 작용해 심해생물의 종 분화를 촉진했다는 얘기다.
현재까지 심해 저서생물군집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는데, 심해는 총 1억종에 달하는 생물다양성의 보고라는 사실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심해 전체의 생물종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따라서 심해에서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물을 만날 가능성은 무척 크다.
대형보다 중형이 유리
표층에서 생산돼 심해에 도달하는 아주 적은 양의 유기물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는 심해 생물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물에 비해 수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생물이 유리하다.
심해에는 대형저서생물에 비해 중형저서생물(0.032-1mm 사이의 생물)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다. 몸집이 작으면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먹이의 중요한 경쟁자인 대형저서생물이 심해에서 큰 폭으로 감소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형저서생물이 이용할 수 있는 비율이 커진다. 또한 대형저서생물의 일부가 중형저서생물의 크기까지 작아진 경우도 있다.
심해 중형저서생물의 군집 중 가장 많은 것은 유공충류와 선충류다. 가장 오래된 생물의 하나인 유공충류는 석회질로 된 껍데기에 싸여 있는데, 먹이를 잡는 가늘고 긴 위족을 갖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선충류는 몸이 가늘고 양끝이 뾰족한 줄 모양으로 생긴 적응력이 탁월한 생물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해양 어디에나 쉽게 적응해내는 저서성 요각류다. 이 외에도 마디로 이루어진 몸에 털이 많이 나있는 다모류나 짧고 뭉툭한 몸통에 4쌍의 다리를 가진 완보동물 등이 있다. 이 그룹에 관한 최신 연구정보는 ‘사모날리아’(Psammonalia)라는 국제학회의 홈페이지(http://inlet.geol.sc.edu/∼nick/meiofauna.html)에서 얻을 수 있다.
갈라파고스형 생물 군집
영국의 전함 챌린저호가 진기한 심해생물을 찾아서 세계일주탐험에 나선 것은 1872-1876년의 일이다. 챌린저호는 여러 가지 관측기기와 채집기구를 사용해 그때까지 상상의 세계에 머물러있던 수천m 해저의 심해생물을 조사했다. 범선을 이용한 심해생물 탐험의 시대는 1950년대 소련과 덴마크에 의한 생물조사로 막을 내린다. 그 후의 근대적인 심해조사에서는 심해용 카메라나 비디오, 무인·유인잠수정 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1977년 미국의 심해잠수정 앨빈호에 탑승한 지질학자가 남태평양의 갈라파고스제도 주변에서 지질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심 2천6백m의 해저에 지구내부로부터 막 생겨 나온 신선한 용암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거대한 조개껍질이 산을 이루고 있었으며 거대한 관에 사는 동물이 떼를 지어 있었다. 열수분출구 생물군집의 첫 발견이었다. 이 발견은 그동안 심해에는 생물이 적다는 상식을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갈라파고스나 환 데 후카(Juan de Fuca) 등 대표적인 해저열수구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을 살펴보자.
열수분출구에 접근함에 따라 넓은 의미에서 집게에 속하는 심해 새우와 말미잘, 눈이 퇴화된 게, 새우류 등 갑각류의 밀도가 서서히 높아진다. 그리고 다모류와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오래된 만각류도 보인다.
분출구 근방 수m에는 홍합류, 흰패각조개류, 그리고 커다란 관벌레(Riftia pachyptila)가 용암의 틈 사이에 밀집하고 있다. 몸길이 2m, 지름 3-5cm에 달하는 관벌레는 최근 Vestimentifera라는 새로운 동물문(門)으로 분류된 특이한 생물이다. 이 생물은 황갈색의 관에서 아가미와 비슷한 움직임을 갖는 선홍색 혀 모양의 구조를 수중에 내놓고 있다. 이 관 위로 역시 진화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소형 권패류가 떼를 지어 있고, 가끔 특이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30℃ 이상의 고온인 열수를 분출하는 굴뚝 표면에는 갯지렁이처럼 털이 많은 다모류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분출구의 위에는 심해 게 종류가 지나다니면서 다모류를 잡아먹는다.
해저열수구 생물군집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은 생물량이다. 비슷한 수심의 심해저에는 생물량이 많아야 1g/㎡ 정도인데 비해, 해저열수구는 대표적인 동물의 생물량만 15kg/㎡을 넘을 정도다.
1984년에 들어 워싱턴주 앞 바다, 일본의 사가미만의 하쯔시마 동남쪽 심해저에 고온의 분출은 동반하지 않지만 갈라파고스형의 특이한 생물 군집이 연이어 발견됐다.
심해저의 수렴대를 따라 육지쪽 방향, 즉 남해트러프, 일본해구, 쓰시마해구 3천8백-6천5백m의 해저에 이러한 형태의 생물 군집이 존재했다. 또 페루 해구에서도 발견돼 범세계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뿜어 오르는 차가운 물에 포함된 유황가스나 메탄 등의 물질에 의해 유지되는 생물 군집이라는 의미에서 ‘냉수용출대 생물군집’이라고 부른다.
|생태적지위(Ecological niche)|
생태계 내에서 한 생물이 차지하는 먹이와 공간의 지위. 즉 한 생물이 어디서 서식하며 무엇을 먹고, 무엇에 먹히며 생활하고 있는지를 뜻한다. 생태적 지위가 중복되면 두 개체군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난다. 생태적 지위를 같이 하는 두 종류는 동일한 환경에서는 공존하지 못한다.
|수렴대|
심해저를 이루는 대륙판이 서로 충돌하는 경계. 거대한 습곡산맥이나 해구, 호상열도 등이 발달하고 화산과 지진이 활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