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라는 세균이 인체에 감염돼 발생하는 전염성 질환의 하나다. 콜레라 외에 전염병이 인류에게 큰 해를 입힌 것은 중세말의 한센병과 페스트, 17-18세기에 대유행한 발진티푸스와 두창의 예를 들 수 있다. 콜레라는 19세기 1백년 동안 인류를 줄기차게 공격했으며, 이로 인한 피해가 막대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류가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콜레라를 해결함과 동시에 인류가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까지 웃지 못할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여기에서는 콜레라를 해결하고도 역사의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과학자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무 한 일 없는 공중보건학의 아버지
19세기 초반,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대륙을 뛰어넘어 유럽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지였던 유럽이 콜레라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전유럽의 학자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무통분만에 클로로포름을 이용해 찬사를 받은 영국의 스노우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콜레라의 전파속도가 사람의 이동속도보다 느리다는 점에 착안해 콜레라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53년 런던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자 스노우는 환자 분포와 런던의 상수도 공급회사의 관계를 조사해 특정 상수도회사의 물을 공급받는 가정에서만 환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하여 그는 물속에 포함된 무언가가 콜레라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콜레라 해결에 노력했다. 그는 합리적 방식의 감염원 개념을 공중보건에 도입했고, 그의 이름은 ‘공중보건학의 아버지’라는 별명과 함께 역사에 남게 됐다.
그러나 당시에 스노우가 한 일은 가설을 세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연구 이후 런던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이 줄어든 이유는 그의 공이 아니라 독일의 페텐코퍼 때문이었다. 현재의 바이에른 주에서 위생학 교수로 명성을 떨치던 페텐코퍼는 그만의 콜레라 발생이론을 세웠다. 지표수의 수위가 갑자기 올라가면 토양의 수분성분이 증가하고, 건조기에 수위가 떨어지면 수분성분이 감소하면서 습한 토양층이 생긴다. 콜레라는 이 습한 토양층을 통해 오염된 공기(이를 미아즈마라고 한다)가 전염되면서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이론이었다.
페텐코퍼는 음료수와 지표수가 분리되도록 안전한 상수도 공급체계를 개발해 뮌헨 시민을 콜레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결과를 본 영국에서도 상수도 체계를 개선해 콜레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페텐코퍼는 자신만의 과학을 이용해 결과적으로는 콜레라를 퇴치했으나 근본적인 개념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세월이 흐른 지금, 콜레라를 해결한 공적은 스노우의 몫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신과 제자의 몸을 실험에 이용
19세기 중반 이후 파스퇴르에 의해 미생물이 전염병의 원인임이 증명됐으나 페텐코퍼는 지표면의 수위와 미아즈마에 의해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자신의 이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83년 독일에서 이집트로 파견된 코흐의 연구팀이 콜레라의 원인균을 발견했다. ‘세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코흐는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균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특정 병원균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학설을 발표한 사람이다. 전염병이 병원성 세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페텐코퍼는 코흐가 발견한 콜레라균이 콜레라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실험에 이용했다. 함부르크에 콜레라가 유행하던 1895년에 그는 콜레라균이 포함된 용액을 들이켰으나 의외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긴장된 상황에서 실험에 임한 그의 체내에서 위산분비가 증가돼 콜레라균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 오늘날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코흐의 학설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 일어난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자 페텐코퍼는 자신의 이론을 더욱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된 실험에서 콜레라균이 포함된 음료수를 마신 그의 제자에게 콜레라가 발생하자 코흐가 발견한 비브리오 콜레라균이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