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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육군이 화이트샌드기지에서 V2 로켓을 시험하고 있다.


1957년 10월 4일 금요일 밤, 워싱턴 러시아(옛소련)대사관에서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국제지구물리의 해’(IGY)를 기념한 ‘로켓과 인공위성’에 관한 학술세미나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과학자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냉전시대에 동서 진영의 과학자들이 한자리 모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방국가 과학자들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있는 러시아의 로켓기술에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려고 저마다 러시아과학자들 옆에 붙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듯한 한 러시아과학자가 “우리는 조만간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만간이 대체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는 “1주일 아니면 한달”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1주일이라고?”

그날 과학자들 틈바구니에는 뉴욕타임스의 기자인 월터 설리번도 끼여 있었다. 파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는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내용은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오늘 발사했다는 뉴스가 타스통신으로부터 들어왔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파티장으로 뛰어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로 올라갔어!” 러시아가 미국이 추진해온 밴가드위성 계획을 급습한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가 인공위성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대사관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인공위성인데도 불구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그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2번이나 지났다.


1957년 12월 발사하자마자 주저앉은 밴가드로켓.


우주개발의 출발점 V2로켓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 때 독일이 개발해놓은 V2로켓기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로켓기술의 뿌리는 1927년 설립된 독일 아마추어로켓클럽(VfR). 헤르만 오베르트(1894-1989)와 폰 브라운(1912-1977)이 참여한 로켓클럽은 한창때 회원이 5백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33년 히틀러와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로켓클럽이 국제적인 활동을 벌인다는 이유로 해체해 버렸다. 이때 브라운은 육군 로켓연구반에 들어가 로켓연구를 계속했으며, 이듬해 고도 2.5km의 로켓을 개발해냈다. 그의 로켓은 무관심했던 군부의 태도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독일은 페네뮌데에 세계 최초의 우주센터를 건설하고 비밀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여기서 탄생한 비밀무기는 1944년 영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V2로켓. V는 ‘복수의 무기’라는 뜻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페네뮌데는 러시아군에게 점령됐다. 그러나 브라운을 비롯한 우수한 로켓과학자들이 미국으로 투항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버려진 V2로켓 부품과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몇몇 로켓과학자들을 흡수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익히 V2로켓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던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은 독일에 있던 V2로켓 제작시설을 모스크바 근처의 칼리닌그라드로 옮기고, 글라그(소련의 노동수용소)에 수용 중인 독일 로켓기술자들을 석방한 후 V2로켓 제작에 투입했다. 그러나 그곳의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강철 스프링을 사용하기 위해 알람시계를 분해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첫번째 러시아산 V2로켓이 1947년 10월에 발사됐다.

스탈린은 V2로켓을 개량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세르게이 코롤료프(1906-1966)는 V2로켓의 클론(유전자 복제)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정거리가 2백78km인 R1로켓과 사정거리가 5백56km인 R2로켓을 개발했다. R2로켓은 V2로켓의 길이를 14m에서 16.9m로 늘인 것에 불과했다.

한편 R1과 R2는 우주과학실험에도 이용됐다. 탑재물은 러시아인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개가 주로 이용됐다. 이러한 우주실험은 우주비행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몇분 동안의 실험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궤도를 끊임없이 돌 수 있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 소련과학아카데미 소장의 화를 돋우었다. 바실리는 인공위성을 제안한 과학자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 “다른 사람이 추상적인 계획을 세워 시간을 낭비할지라도 동무(소비에트에서 주로 썼던 말임)는 공공요원이기 때문에 국가방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트전투기지 어리석은 스푸트니크(러시아어로 ‘위성’이라는 뜻)가 아니란 말이오.”

러시아의 다음 목표는 러시아에서 서유럽까지 핵탄두를 나를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 서방에서 ‘SS3 샤이스터’(사기꾼이란 뜻)라고 부른 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천2백4km로, 1955년 실전에 배치됐다. 1957년 6월에는 1메가t의 탄두를 실어나를 수 있는 사정거리 1천8백km의 SS4 샌들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완성됐다. 이로써 미국이 핵폭탄을 배치한 서유럽, 아프리카, 극동지역은 모두 SS4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러시아가 인공위성 개발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탄도미사일 개발에 한참 자신감이 붙던 1955년이었다. 그해 1월 러시아는 중앙아시아(현재의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티우라탐 (‘바이코누르기지’라고 불림)에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기지를 건설하고, 1957년 8월 5메가t의 수소폭탄을 6천5백km 떨어진 곳까지 나를 수 있는 SS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9월 두 번째 시험발사는 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평소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싶어했던 코롤료프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미국은 공군에서 개발하고 있던 애틀라스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이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이를 안 코롤료프는 흐루시초프에게 미국의 콧대를 누르기 위해 SS6 로켓(위성을 쏠 때는 A로켓이라고 부름)을 이용해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준비하고 있던 밴가드위성을 쏘아올리기로 약속한 날이 불과 몇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허락이 떨어지자, 코롤료프는 위성개발팀에게 “첫번째 인공위성은 천체의 모습에 가깝도록 제작해야 하며, 아마추어 햄들이 라디오 신호를 수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가능한 한 육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스푸트니크 1호는 라디오 송신장치를 단 지름이 58cm인 공 모양의 인공위성이었다. 무게는 83.6kg.

1957년 10월 4일 오후 10시 28분(모스크바 시간) A로켓 엔진이 꿈틀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우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5분 후 인간이 만든 최초의 별은 지구 위 2백28-9백 47km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메시지를 지구로 보내왔다. “비프, 비프.”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스푸트니크 2호는 11월 3일 ‘라이카’라고 부르는 에스키모종 암컷 개 한 마리를 싣고 우주로 올랐다. 라이카는 1주일 동안 생명유지장치가 다할 때까지 우주에서 생활하면서 생물학 자료를 지구로 보내왔다. 이것은 애초 국제지구물리의 해에 계획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였다.

땅에 주저앉은 밴가드

러시아가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쏘았다는 사실은 세계인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독일로부터 60여기의 V2로켓과 우수한 로켓과학자들을 흡수했던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로켓 개발을 위해 육·해·공군이 모두 뛰어들고 있었다.

해군은 미국과학자들이 주축이 돼 에어로비, 바이킹과 같은 액체연료로켓을 개발했다. 나중에 해군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한 밴가드로켓을 개발할 때 바이킹을 1단로켓으로, 에어로비를 2단로켓으로, 그리고 고체연료로켓을 3단로켓으로 사용했다. 이와 달리 육군은 폰 브라운을 비롯한 독일과학자들이 주축이 됐다. 그들은 독일에서 가져온 V2로켓을 이용해 여러 가지 과학실험을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앨버트’라는 원숭이가 V2로켓을 타고 우주로 올라갔다. 육군은 V2로켓을 개량해 레드스톤과 주피터 C로켓을 개발했다. 공군에서는 애틀라스, 타이탄 등과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육·해·공군의 든든한 로켓기술을 염두에 뒀던지, 1955년 7월 23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국제지구물리의 해’ 계획의 일환으로 농구공만한 소형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국제지구물리의 해를 정하는 과정에서 과학로켓만으로는 지구관측이 어렵다고 보고 과학위성을 쏘아올리자고 미국 내 과학자들이 아이젠하워를 설득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미국의 고민이란 최초의 인공위성을 어디서 무엇으로 쏠까 하는 것뿐이었다. 해군의 바이킹, 육군의 레드스톤, 공군의 애틀라스가 모두 후보로 올랐다. 여기서 미국 정부는 실질보다는 자존심을 택했다. 독일과학자가 주축이 됐던 육군의 레드스톤를 제치고 자국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바이킹을 선택한 것이다. 국가의 미래를 짊어진 해군은 바이킹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새로운 로켓을 개발하기 위한 밴가드(선봉이란 뜻)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밴가드로켓을 개발하기도 전에 러시아가 선수를 쳐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최초의 밴가드로켓은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지 두달 후인 1957년 12월 6일에 시험발사됐다. 그러나 너무 서둔 탓인지 밴가드로켓은 2초 만에 1m 가량 오르다가 땅에 주저않고 말았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땅에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는 뜻으로 스테이푸트니크 (Stayputnik)라고 불렀다. 다음해 1월 25일 두번째의 밴가드로켓도 점화한지 14초만에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독일과학자들이 개발한 육군의 주피터C 로켓(레드스톤을 개량한 것)을 이용해 최초의 인공위성을 쏠 수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대학 소속의 제트추진연구소(JPL)가 만든 익스플로러 1호는 1958년 1월 31일 지구궤도에 올랐다. 익스플로러 1호의 성과라면 지구 밖에 있는 방사선띠인 밴 앨런대를 발견했다는 것.

익스플로러 1호가 지구궤도에 오르자 흐루시초프는 스푸트니크와 비교하면서 “작은 오렌지 만하군”하며 비웃었다. 익스플로러의 무게가 5kg(스푸트니크 1호의 약 16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후 1969년 달에 착륙하기 전까지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를 제2의 ‘진주만 폭격’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항공우주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 고쳤다. ‘타도 소비에트’를 외치면서. 오늘날 세계 항공우주의 메카로 자리잡은 미항공우주국(NASA)도 이때(1958년 10월 1일) 생겨났다. 육·해·공군이 따로 항공우주기술을 개발하는 한 러시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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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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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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