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기술 없이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목표를 정한 뒤 연구개발에 들어가 창업 4년 만에 상품화에 성공한 기업이 있다. 바이오벤처가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교과서로 불리는 유진사이언스를 통해 우리나라 바이오벤처의 미래를 알아보자.
대부분 생명공학 제품이라면 의약품이나 농업, 산업에서 이용되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우리 생활 주변에도 수많은 생명공학 제품이 있다. 그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생명공학 제품은 무엇일까. 아마도 1994년 유공(현재 SK) 바이오텍 사업부에서 개발한 ‘팡이제로’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신발이든 자동차든 스프레이 형태로 뿌려주면 곰팡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팡이제로는 어려운 기술 설명 없이도 소비자들에게 상품 개념이 자연스럽게 각인돼 연간 매출 1백억원이 넘는 히트상품이 됐다. 팡이제로가 나올 당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있던 많은 사람이 무릎을 친 것도 소비자들에게 그만큼 가까이 다가선 생명공학 제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공 바이오텍 사업부에서 팡이제로 개발을 주도한 사람은 현재 유진사이언스의 대표이사로 있는 노승권 사장이다.
유진사이언스는 지난해 콜레스테롤 저하음료인 콜제로를 출시한 바이오벤처다. 올해로 창업 만 4년째가 되는 유진사이언스는 콜제로 출시를 계기로 3백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 바이오벤처업계에서는 이 회사를 바이오벤처를 기업화하는데 일종의 교과서적인 기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식품 매장에 가득한 음료 가운데 하나를 개발한데 불과한 작은 기업이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아내와 단둘이서 시작
노사장이 1996년 11월 유공 바이오텍 사업부를 퇴사하면서 가지고 나온 기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반적인 바이오벤처가 대학이나 연구소 실험실에서 개발된 기술을 가지고 나와 창업하는데 비해 무모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창업이었다.
그러나 노사장은 그동안 유공에서의 경험에 따라 시장에서 창업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 국내외 생명공학 관련 논문과 제품 DB를 샅샅히 뒤진 뒤 찾은 것은 콜레스테롤. 우리나라에서도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성인비만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고 콜레스테롤 지수가 높아 고생하는 사람들 역시 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만인구는 약 9백만명에 달하며 콜레스테롤 지수가 높아 고생하는 심혈관 질환자도 5백만명이 넘는다. 노사장은 시장이 콜레스테롤 저하상품을 요구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목표가 정해지자 노사장은 유진사이언스를 창립하기 전에 이미 합류한 3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콜레스테롤 연구에 돌입했다. 유진사이언스는 1997년 7월 노사장이 아내와 단둘이 오피스텔에서 시작했다. 그후 생산기술연구원에서 주관했던 신기술보육(TBI)사업자로 선정돼 1998년 3월 서울대 신기술 창업네트워크에 입주하면서 제대로 된 실험실을 갖출 수 있었다.
당시 유니레버나 존슨&존슨, 노바티스 등 굴지의 생명공학 기업들이 콜레스테롤을 저하시키는 마가린, 식용유를 상품화하고 있었지만 음료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녹는 콜레스테롤 저하 물질 개발을 목표로 했다.
유진사이언스는 1997년 말부터 특허를 출원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5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어떻게 그토록 빠른 특허 출원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묻자 노사장은 “이미 상품 개발 개념이 잡혔기 때문에 우선 특허를 출원한 다음 연구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틈새 시장 개척
콜레스테롤은 인지질과 함께 세포의 막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다. 아직 상세한 메커니즘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막 구조나 기능에 큰 역할을 맡는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혈액 내 콜레스테롤이 지나치게 많으면 고혈압, 고지혈증, 동맥경화, 뇌졸중 등을 유발해 문제가 된다.
혈액 속에서 존재하는 콜레스테롤은 단일 물질이 아니라 지방, 단백질의 복합체다. 복합체의 종류는 카일로마이크론, 초저밀도지단백질(VLDL), 저밀도지단백질(LDL), 고밀도지단백질(HDL)의 4가지가 있다.
이 중 의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LDL과 HDL이다. LDL은 혈관을 따라 순환하다가 세포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분해되지만 과다하게 들어 있을 경우 동맥 내부에 쌓여 플라크가 된다. 그 결과 동맥이 좁아져 산소 운반 혈액의 양이 줄게 돼 여러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한다. 반면 HDL은 혈액을 타고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세포 내에 있는 여분의 콜레스테롤을 회수해 간으로 이동시켜 지방의 흡수를 돕는 담즙산이란 물질로 변화시킨다. 이런 이유로 LDL을 나쁜 콜레스테롤, HDL을 좋은 콜레스테롤이라고 부른다.
식물성 스테롤인 피토스테롤은 LDL콜레스테롤과 구조가 비슷해 인체 내부에서 LDL콜레스테롤의 소화·흡수를 방해해 몸밖으로 배출하게 만든다. 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사의 자회사인 립톤사는 피토스테롤을 샐러드 드레싱으로 만들어 199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고 미국, 유럽, 호주에서 판매중이다. 존슨&존슨사의 자회사인 맥닐사 역시 미국, 유럽 등지에서 같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스위스의 노바티스사와 일본의 아지모도사는 식용유로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상품은 모두 피토스테롤을 샐러드 드레싱이나 마가린, 식용유 같은 지용성 물질에 결합시킨 것이다.
유진사이언스가 개발한 콜레스테롤 저하 물질인 유콜은 피토스테롤에 수용성 유도체를 붙인 것. 이렇게 하면 다양한 음료 제품에 적용이 가능하다. 고려대 생명공학원 동미숙 교수는 유콜에 대한 동물실험 결과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절반 이상 감소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은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혈중콜레스테롤 농도가 10-20%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유진사이언스는 지난 3월 미국계 벤처캐피탈인 H&Q아시아퍼시픽에서 주식 액면가의 37배로 60억원의 투자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H&Q는 세계 3대 벤처캐피털중 하나로 바이오벤처로는 미국의 암젠 및 제넨텍사의 투자자로 유명한데 이 회사들은 모두 벤처를 넘어서 세계 굴지의 바이오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몇몇 정보통신벤처사에 투자한 바 있지만 바이오벤처에 투자한 것은 유진사이언스가 처음.
H&Q 심사역들은 존슨&존슨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유진사이언스와 같은 작은 벤처기업이 해낼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노사장은 그때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상업화를 철저하게 목표로 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의 전환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애완견 샴푸 팔아 연구개발비 조달
유진사이언스는 올해 내수목표를 2백억원으로 잡고 있다. 또 1백-2백50억 달러로 예상되는 세계 콜레스테롤 저하 식품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올 1월부터 미국에 콜제로를 수출하고 있으며, 3월에는 매출규모 4조원인 일본의 음료회사인 파이오사와는 기술 라이선스에 대한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만약 양해각서가 본 계약으로까지 성사된다면 1천억원의 기술 수출료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동안 콜레스테롤 저하 음료 개발에 매진해왔지만 유진사이언스의 진짜 목표는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유진사이언스의 매출 변화를 보면 지난해 콜제로가 출시되기 전에도 1997년 2천5백만원, 1998년 11억 5천만원, 1999년 50억원, 그리고 지난해는 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여기에 유진사이언스의 또다른 전략이 숨어있다.
유진사이언스는 콜제로가 출시되기 전에 노사장이 유공시절 팡이제로를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최대 애견사료사인 퓨라나 코리아에 애견용 삼퓨 등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납품했으며, 발냄새 제거제 등 생활화학 제품도 OEM과 자체브랜드로 판매해 매출을 올렸다.
이밖에도 식용유 원유와 가축사료 원료도 함께 생산, 판매했다. 이렇게 매출을 올린 결과 1998년 콜레스테롤 저하물질인 유콜과 유콜 함유 음료 콜제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조어 영양유전체학 만들어
마찬가지로 콜제로 판매로 예상되는 수익 역시 다시 더 큰 목표를 위한 연구개발에 투자할 예정이다.
유진사이언스는 3년째 우유에서 순수 콜레스테롤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추출한 콜레스테롤은 스테로이드 계열의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나 테스토스테론을 합성하는데 원료로 사용된다.
그동안 콜레스테롤은 소의 척수에서 추출해왔으나 이 방법은 최근 광우병 파동에 따라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우유는 안전성에 문제가 없고 단가가 싼 장점이 있다. 게다가 콜레스테롤이 제거된 우유는 비싼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다. 유진사이언스는 곧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앞으로 2-3년 이내 항생제 중간체나 식품 소재 등을 미생물을 이용해 합성해낼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산업용 미생물 균주 개발에서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바이오벤처사인 미국의 마이크로지노믹스사에 25% 지분참여로 투자했다.
유진사이언스의 궁극적 목표는 비만, 당뇨, 콜레스테롤과 같은 성인병을 조절할 수 있는 식품을 개발해내는 것이다. 지난 2월 발표된 인간게놈지도는 인간 유전자 수가 예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유전자 발현과정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식생활과 같은 외부환경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사장은 유전자와 영양의 상관 관계를 밝히는 연구를 영양(nutrition)과 유전체학(genomics)을 합쳐 영양유전체학(nutragenomics)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앞으로 3-5년 간 콜제로 소비자들의 영양 패턴과 유전자정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개인별 맞춤의약품 개발을 위한 정보로 활용할 계획이다.
유진사이언스는 이미 산업자원부 차세대 신기술 개발사업 중 단백질 칩 세부과제 총괄기관으로 선정돼 이 같은 목표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이 사업에서 유진사이언스는 2003년 9월까지 식품오염 및 독성검출용 단백질 칩을 개발할 예정이다.
또 유진사이언스는 소비자의 유전정보를 제공받는 것을 의학 발전을 위한 일종의 유전자 기탁운동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앞으로 이를 위한 다양한 이벤트와 설득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소비자의 유전정보를 얻는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 개인별 유전정보를 분석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유진사이언스가 장기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준비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시장보다 한걸음 앞서가는 지략가 유진사이언스 노승권 대표이사 "매년 30억 이상 10년간 투자 목표"
노승권 사장은 자신의 이력을 소개할 때 몇번의 주기로 설명한다. 그 첫주기는 기술기획 업무에 종사하던 시절. 노사장은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마친 뒤 KAIST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85년 유공에 입사했다. 처음 맡은 일은 기술개발부의 기획 담당. 유공에는 당시 연구소가 없었기 때문에 기술개발부가 연구소 역할을 대신했다. 노사장은 이때 당시 전세계적으로 1백개에 불과하던 바이오기업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한 뒤 이 기업들에 대한 관련 뉴스를 정리하면서 바이오기술의 흐름을 모니터했다. 이때 영국과 미국에서 바이오벤처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
“1987년부터 1년 반 동안 영국의 더럼대학에서 생물공학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때 매주 한번씩 바이오벤처를 방문했습니다.”
영국 연수를 마친 뒤에는 미국 나스닥 상장 바이오기업인 셀진사와의 조인트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바이오벤처도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1989년 귀국한 뒤 1992년까지는 연구원 7명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 실무 경험을 쌓았다.
노사장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것은 1992년 12월 사내 벤처인 바이오텍사업부를 설립하면서다. 1996년 퇴사 전까지 노사장은 팡이제로, 산업용 미생물 계수기 등을 개발해내는 성과를 냈다.
벤처의 허물 벗고 기업으로 탈바꿈
그렇다고 벤처를 꾸려가는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사람과 자금이죠. IMF 시절이라 떠나는 사람을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연구개발비를 조달하는 일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IMF는 노사장에게 또다른 기회를 가져다줬다. 1997년 두산그룹이 내놓은 종가집 식용유 공장을 인수한 것. 식품 공장은 지자체 승인사항이라 기존 공장이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별도의 인허가가 필요 없었다. 모든 시설을 직접 개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생산시설과 폐수처리시설은 그대로 사용했다. 게다가 식용유 공장은 당장의 자금 유통을 위한 제품 생산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케팅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해외에서는 세계 최고의 벤처캐피털인 H&Q로부터 투자를 받았다고 하면 일사천리로 협상이 진행되는데 국내 대기업은 전혀 그렇질 못합니다.”
그래서 노사장은 콜제로의 판매를 담당할 바이오 전문 유통회사인 유콜바이오를 설립했다. 유콜바이오는 유진사이언스의 제품뿐 아니라 다른 바이오벤처의 제품도 유통할 계획이다.
유진사이언스는 상품화에 대한 명확한 목표에서 출발했기에 누구보다도 빨리 자체 수익 구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틈새시장만을 찾아다닐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만의 고유한 시장을 형성한다는 목표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구개발비가 덜 들어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진사이언스는 한해 연구개발비를 30-1백억원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10년 간은 투자해야죠.”
노사장은 올해 콜제로 등으로 30억 이상의 영업 이익을 올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연구개발비 등 소요 자금을 자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진사이언스는 명쾌하다. 하나의 목표로 달려와 성취해냈다. 내일의 목표는 진작에 세웠다. 지금은 그 목표를 위해 벤처라는 허물을 벗고 바이오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