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을 찾아나선 그노시스파가 이어온 연금술. 현대 화학을 탄생시킨 연금술의 뜻은 금을 정련해내는 기술이지만 근원에는 이것과 저것을 잇거나 변화시키는 헤르메스가 자리하고 있다. 신화 속에 숨겨진 과학이야기의 세계로 떠나보자.
야누스(Janus)를 아시는지요?
고대 로마의 신 이름입니다. 머리 앞뒤에 얼굴이 있는 신, 문을 지키는 신, 즉 문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문이라고 하는 게 벌써 두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요? 문의 이쪽을 우리는 ‘안’, 저쪽을 ‘밖’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니까 문은 안을 향하는 얼굴, 밖을 향하는 얼굴, 이렇게 두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이 야누스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평화와 전쟁을 향한 두가지의 서로 모순되는 태도, 또는 이것과 저것에 대한 모순된 태도, 즉 양면성을 상징한다고들 하지요.
1년 열두달 중에도 두얼굴을 가진 달이 있습니다. 1년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달인 ‘1월’이 그렇습니다. 1월의 저쪽, 즉 1월의 과거 너머에는 1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있고, 이쪽, 즉 안쪽에는 1월에 이어지는 새로운 달 2월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1월이 흡사 얼굴이 둘인 문의 수호신 야누스 같다고 해서 ‘야누아리우스’(Januarius)라고 불렀답니다. ‘야누스의 달’이라는 뜻이지요. ‘1월’을 뜻하는 영어 ‘재뉴어리’(January)는 바로 이 야누아리우스에서 온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이 야누스를 고대 로마에만 있던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르마’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로마에선 야누스, 그리스에선 헤르메스
헤르마(Herma)는 ‘헤르메스 상’(像)이라는 뜻인데요, 고대 그리스의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의 경계선에는 이 헤르마가 서있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헤르마 역시 얼굴이 둘입니다. 머리 앞과 뒤에 각각 하나씩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헤르메스는 대체 어떤 신일까요?
헤르메스는 제우스 신의 아들입니다. 헤르메스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제우스의 전령, 즉 심부름꾼입니다. 그래서 ‘전령신’이라고 불립니다. 신들 중에서 제우스의 전령으로 하늘나라와 땅밑 저승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 하늘과 땅밑을 이을 수 있는 신은 헤르메스뿐입니다.
그는 말을 잘해서 여러나라 말을 통역하는 통역의 신, 외교의 신이기도 합니다. 그가 관장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물건 가진 자와 돈 가진 자를 잇는 상업의 신이기도 하고, 돈 없는 자와 돈 많은 자 사이를 잇는 돈놀이의 신이기도 합니다.
헤르메스는 또 태어난 날 소를 50마리나 훔친 도둑질의 천재입니다. 그래서 도둑의 신이기도 합니다. 헤르마, 즉 헤르메스 상이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의 경계에 서 있었다고 했지요? 여기에서도 헤르메스는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을 잇는 신의 직분을 맡습니다.
헤르메스는 나그네의 수호신이기도 합니다. 나그네가 어떤 존재인가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하는 존재, 즉 이미 잘 알려진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 아닌가요? 헤르메스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신, 이것과 저것, 즉 서로 반대되는 것을 하나로 이어주는 접속사 같은 신, 이것과 저것 사이의 막힌 관계를 트이게 하는 소통의 신입니다.
헤르메스는 ‘카루케이온’이라고 불리는 지팡이를 하나 들고 다니는데요,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있는 이 지팡이 위에는 독수리가 한마리 앉아 있습니다. 독수리는 하늘, 뱀은 땅밑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카루케이온은, 하늘과 땅밑을 잇는 헤르메스의 직분을 상징하는 셈이지요.
‘카루케이온’이라는 말은 ‘케룩스의 지팡이’라는 뜻입니다. ‘케룩스’는 ‘전령’(herald)이라는 뜻이지요. ‘헤랄드’라는 말이 어디에 자주 쓰이지요? 신문의 제호에 많이 쓰입니다. 신문은 어떤 일을 하지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도 헤르메스 신의 ‘이어주기’ 직분이 그대로 드러나는군요.
수은은 액체일까 고체일까
고체와 액체는 어떻게 다른가요? ‘일정한 모양이 있음’과 ‘일정한 모양이 없음’이 고체와 액체의 차이점입니다. 수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과학자들은 이것을 고체라고 해야 할 것인지, 액체라고 해야 할 것인지 꽤 고민했을 법합니다. 금속이라고 부르자니 일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체라고 부르자니 비록 액체 모양을 하고 있기는 하나 엄연한 금속을 그렇게 부를 수도 없어서 고민했을 법합니다. 우리도 ‘수은’이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액체 상태의 은’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붙이기 까다로운 것에 붙여진 이름이 ‘메르쿠리우스’(Mercurius)입니다.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고 하지요. 메르쿠리우스는 라틴어 이름인데, 그리스 이름은 놀랍게도 ‘헤르메스’랍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물질’, 고체와 액체 경계에 존재하는 물질, 헤르메스 신 같은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참으로 절묘하게 지은 이름 같지 않나요?
하늘에는 항성인 태양과 9개의 행성이 있습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의 이름이 무엇이죠? ‘수성’입니다. 라틴어 이름으로는 ‘메르쿠리우스’, 영어로는 ‘머큐리’입니다. 그리스 이름은 역시 ‘헤르메스’입니다. 여기에서도 헤르메스는 항성인 태양과 행성인 9개의 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헤르메스는 어쨌든 이것과 저것을 이어주는데는 선수인 그리스 신입니다.
앎을 섬긴 기독교도 그노시스파
이집트에는 토트(Thoth)라는 신이 있습니다. 이집트 신성 문자의 발명자이자, 학문, 지혜, 기술의 신입니다. ‘연금술’을 아시지요? 글자 그대로 풀어내면 ‘금을 정련해내는 기술’이라는 뜻입니다. 토트는 연금술의 발명자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이 불로초와 불사약, 즉 사람을 늙지 않게 하는 약초,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의약품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을 동안, 서양인들 특히 그리스의 연금술 기술자들은 구리나 주석 같이 흔한 금속으로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정련하는 기술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초기 기독교의 한 갈래에 ‘그노시스파’가 있습니다. ‘앎을 섬기는 기독교도’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도라면 하느님과 그리스도만 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앎’을 섬겼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한 이단이었을 것입니다. 이 이단적인 기독교도인 그노시스파 연금술사들이, 연금술의 발명자인 토트 신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바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라고 불렀답니다. ‘위대하시고, 또 위대하시고, 한번 더 위대하신 헤르메스 신’이라는 뜻입니다. 2-3세기 즈음의 그노시스파 기독교인들이 주도하고 있던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의 금속 정련 기술과 그리스 철학의 전통인 원소 사상(세상 만물은 흙, 물, 불,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의 결합으로 태동한 첨단 과학이었던 것입니다.
화학의 정점에는 헤르메스가 있다
연금술, 즉 근대화학을 탄생시킨 ‘금속을 변화시키는 기술’(the art of transmuting metals)의 라틴어 이름은 놀랍게도 ‘헤르메티쿰’(Hermeticum)이랍니다. ‘헤르메스의 기술’이라는 뜻이지요. 연금술 기술자들은 ‘헤르메틱’(Hermetic)이라고 불렸지요. ‘헤르메스의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연금술을 뜻하는 영어 ‘알케미’(Alchemy)는 아랍어 ‘알케메이아’(Alchemeia)에서 온 말입니다. 연금술사는 ‘알키미스타’(Alchemista)라고 불렸지요. 중세로 들어오면서 연금술 기술자들은 유럽 언어에 맞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알’(al-)이 탈락한 ‘키미스타’(Chimysta)가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어에서 ‘화학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지요? ‘케미스트’(Chemist)이지요.
근대 과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학의 조상은 연금술입니다. 그 연금술의 정점에는 누가 있지요? 바로 이것과 저것을 이어주는 신, 이것을 저것으로 바꾸는 헤르메스 신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을 차례입니다.
‘나는 무엇을 무엇으로 바꾸는데 이바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