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항공우주국의 화성탐사선 오디세이가 화성 궤도에 진입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동안 화성탐사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는데…. 화성탐사선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미래를 만나보자.
지난 10월 23일 저녁 7시 26분(태평양 시간), 붉은 행성 화성의 상공에서는 조그마한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6개월의 긴 여정을 끝내고 목적지에 안착하기 위해 지구에서 온 사신 화성 오디세이가 목적지에 닻을 내리기 위해 역추진 로켓을 분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탐사선이 화성의 중력그물에 걸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속도로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이것으로 최종적인 진입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탐사선이 원하는 궤도를 잡기 위해서는 이후로 3개월 정도의 어렵고 힘든, 속도를 늦추는 조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최종 목표는 고도 4백km의 원형 궤도. 이곳에서 화성 오디세이는 화성의 지질학적 구성성분을 분석하고, 물의 존재를 탐색하며, 추후 있을 인간의 화성탐험에 대비해 유해 방사능 환경을 조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용하는 브레이크 기술이 ‘에어로브레이크’(aerobrake)다.
무겁고 비싼 역추진 로켓을 이용하지 않고 화성대기와의 마찰을 이용해 공짜로 속도를 줄여보겠다는 이 최신 기술은 바로 화성에서 한차례 쓴잔을 맛본 적이 있다. 1998년에 발사된 화성 기후 궤도선(MCO)이 바로 그 희생물이었다. MCO도 에어로브레이크를 시도하다가 너무 근접하는 바람에 화성의 대기에 의해 영원히 ‘브레이크’를 당하는 꼴이 됐다. 따라서 화성 오디세이의 성공여부도 현재까지 100% 단언하기 어렵다.
최근 10년 간 세계의 여러 우주기구에서 단행한 20회의 탐사선 발사 중 50%에 가까운 8회가 화성을 겨냥한 것이다. 이렇게 화성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태양계의 행성 중 화성에서 생명체나 그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화성은 탐사활동이 이뤄질수록 인류에게 실망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은근 슬쩍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2010년까지 6회의 화성방문이 벌써 예약돼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화성방문이 생명체의 탐사와 같은 거창한 이유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우주계획과 마찬가지로 화성으로 떠난 탐사선은 정치적인 선전을 목적으로 한 비행이 계기가 됐다.
최초 탐사선 발사는 정치적 쇼
1950년대만 하더라도 크기와 궤도 외에 화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제트추진연구소(JPL)가 1958년 12월 미항공우주국(NASA)으로 이관되자 JPL의 과학자들은 1960년 10월의 화성탐사선 발사적기에 맞춘 화성탐사계획을 수립했다. 구체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짧은 시간 조우하는 ‘근접비행’(flyby) 계획이었다. 1950년대 후반 NASA에서 사용하던 로켓은 추진력이 부족해 화성궤도에 진입하는데 필요한 무거운 역추진 로켓이 부착된 궤도선을 발사할 능력이 못됐기 때문이다. 물론 근접비행은 탐사선이 다른 행성과 만나는 1단계 방식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우주탐사에 인색한 편이었다.
미국의 우주계획자들이 목표에 관해 논쟁하고 있을 때 옛소련의 과학자들은 화성을 향한 목표를 굳히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공산국가의 우월성이라는 선전전쟁에서 재미를 본 옛소련의 후루시초프는 더욱 많은 ‘세계 최초’를 원했고 최초를 위한 화성탐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9년 벌써 화성을 방문하기 위한 궤도계산이 이뤄졌고 옛소련의 R-7 ICBM을 이용한 5백kg정도의 탐사선이 다음해 발사를 위한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옛소련이 화성탐사선을 발사하기 위한 D데이는 1960년 10월경으로 잡혔다. 이때는 화성탐사선을 발사하기에 적합한 때이기도 했지만 후루시초프가 UN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하는 시기였다. 즉 정치적 시간에도 맞춰졌다. 앞서 1959년 UN 정상회의에서 후루시초프는 달에 처음으로 충돌한 루나 2호의 복제품을 아이젠하워에게 뽐내며 자랑했던 적이 있다. 후루시초프는 이번 화성탐사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된다면 자본주의국가 미국의 콧대를 다시 한번 누를 기회로 보고 자본주의의 대중에게 선보일 탐사선 모형을 자신의 배편에 싣게 했다.
하지만 1960년 10월 10일 옛소련의 튜라탐기지에서 SL-6 몰리야 로켓에 의해 발사된 최초의 화성탐사선 마스닉 1호(Marsnik 1)는 3단계 로켓의 작동불능으로 대기권도 벗어나지 못한채 추락하고 말았다. 탐사선의 발사 실패는 비밀에 부쳐졌고 후루시초프의 배에 실렸던 탐사선 모형도 창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최초 탐사로 깨진 화성인의 환상
1962년 7백80일을 주기로 돌아오는 화성발사 최적기를 맞아 옛소련은 야심찬 발사계획을 다시 수립했다. 이번에는 물량 공세였다. 3대를 연속으로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말이다. 1962년 10월 24일과 11월 1일, 11월 4일에 각각 발사했는데, 지구궤도를 벗어난 것은 두번째로 발사한 ‘마스 1호’뿐이었다. 이것 또한 비행도중 통신두절로 실종되고 말았다.
마스 1호가 우주공간을 헤맬 때 두대의 화성탐사편대가 미국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정부에 의해 무시되던 화성탐사계획들은 케네디로 정권이 바뀌면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NASA는 최초의 화성탐사선으로 초기 로켓에 비해 몇배의 힘을 가진 달로켓 새턴의 초기버전을 이용한 거대한 규모를 구상했다. 그러나 이런 원대한 계획은 다음 발사 적기인 1964년까지 미국에서 쓸만한 로켓이 공군의 아틀라스-아제나밖에 없어 결국 1천kg의 탐사선에서 2백61kg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또한 마리너 금성탐사선과 레인저 달탐사선의 기존 기술을 응용해 제작됐다. 1964년 11월 마침내 화성을 향한 미국 최초의 쌍둥이 탐사선이 마련됐다. 첫번째 마리너 3호는 발사체의 고장으로 실패로 끝났고, 11월 28일 마리너 4호만 무사히 화성을 향했다.
쌍둥이 중 동생만이 성공한 셈이지만 쓸쓸히 혼자만 화성을 향하지는 않았다. 이틀 후 옛소련도 화성행 존드 2호를 발사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향한 진정한 레이스가 벌어진 셈이다. 미국과는 다른 경로를 택한 옛소련의 탐사선은 화성에 미국보다 3주나 늦게 도착할 형편이었다. 옛소련으로서는 미국의 탐사선이 도중에 고장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바램은 오히려 저주로 다가왔다. 존드 2호가 1965년 4월 실종됐던 것이다.
반면 마리너 4호는 7월 무사히 화성에 근접해 1만7천km 떨어진 곳에서부터 희미한 사진들을 찍어 보내오기 시작했다. 희미하긴 해도 이들 사진은 지상 망원경보다 30배나 선명한 것들이었다. 이들 사진 속의 화성에는 퍼시벌 로웰이 봤다는 수로도, H.G 웰스의 소설 속에 나오는 화성인도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단지 크레이터(운석충돌구덩이)로 덮인 죽음의 별로 보였다. 마리너 4호의 데이터는 지구인에게 화성에 관한 모든 환상을 깨뜨리는 참혹한 것이었다.
옛소련 탐사선만 잡아먹는다?
이후 옛소련은 금성탐사에만 전력을 하다가 다시 1969년부터 2년을 주기로 1973년까지 화성을 향해 9대의 탐사선을 발사했다. 이들의 종류는 근접 탐사선, 궤도선, 착륙선 등으로 다양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히 성공하지 못했다. 화성은 금성에서의 놀라운 업적을 올리던 옛소련에게 가혹할 정도로 실패를 안겨줬다.
이렇게 옛소련의 실패율이 높은 이유는 발사체와 탑재장비의 신뢰성이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옛소련의 탐사선들은 아예 지구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무사히 벗어났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 고장나기 일쑤였다. 임무비행거리와 시간이 6개월 이상 걸리는 화성에 비해 절반 정도로 짧은 금성에서만 옛소련은 성공할 수 있었다. 옛소련이 화성프로그램에 지불한 금액은 30억달러나 된다. 하지만 얻은 것은 마스 2·3·5호가 찍은 불분명한 사진 약간과 마스 4·6·7호가 얻은 근접 데이터가 고작이다. 옛소련이 다시 화성으로 돌아가는데는 15년이나 걸렸다.
이렇게 옛소련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전락했지만 미국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도 유인 달 착륙의 준비가 완료된 1969년부터 화성탐사를 재기했는데, 1975년까지 거의 2년마다 2대씩의 탐사선을 파견했다. 이 중 실패는 1대뿐이었다. 특히 1971년에 발사한 마리너 9호의 경우 행성탐사의 두번째 만남 방식인 ‘궤도비행’(orbit)에 최초로 성공했다. 초기 궤도비행도중 예상치 못한 화성에서의 모래폭풍으로 수개월 동안 사진을 찍지 못하기도 했지만, 이후 7만장이 넘는, 화성 표면의 80%에 해당하는 정보를 보내왔다. 이들 사진에서 화성 표면은 크레이터 외에도 물에 의해 침식된 것 같은 신비로운 모습의 지형을 드러냈다. 이로써 행성탐사의 마지막 단계인 ‘착륙’(landing)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1975년 마침내 쌍둥이 탐사선 바이킹 1·2호가 최초로 지구 외 생명체를 조사하는 소형 감지장비를 부착한채 황금평원과 유토피아평원에 도착했다. 로봇팔을 이용해 토양 샘플을 채취한 후 3개의 생명 감지장비 속에 넣고 실험했지만 애석하게 생명이 존재한다는 신호는 발견하지 못했다. 실망스러운 결과와 함께 화성은 잊혀졌다. 이후 미국은 새로운 우주수송시스템인 우주왕복선 개발을 위해 예산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옛소련은 우주정거장 살류트를 유지하고 우주정거장 미르를 개발하는 등 관심은 지구궤도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에도 3회 연속된 불운
화성탐사가 재기된 때는 바이킹이 발사된 지 13년 후인 1988년이다. 러시아의 쌍둥이 탐사선 포보스로부터 다시 시작됐다. 포보스는 러시아 행성탐사과학 분야의 야심작이었다. 포보스는 이름대로 처음으로 화성의 위성 중 하나인 포보스를 탐사하기 위한 것이다. 포보스 탐사선은 궤도선과 2개의 착륙선으로 이뤄졌다. 착륙선은 정지형의 착륙선과 캥거루처럼 뛰어다니는 ‘호퍼’(hopper)로 구성됐다.
하지만 액운은 이번에도 러시아를 빗나가지 않았다. 포보스 1호는 화성으로 가는 도중 조정실패로 신호가 끊어졌고 포보스 2호는 포보스 위성에 접근하는 동안 연락이 두절됐다. 이후 러시아는 1996년 금세기 마지막 화성탐사선 마스 96호를 다시 한번 발사했다. 마스 96호는 궤도선에 4대의 착륙선과 2개의 굴착기가 준비됐다. 실험장비는 22개국의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마스 96호 역시 지구궤도를 떠나지도 못하고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성의 저주는 더이상 러시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미국 또한 재개된 화성탐사에서 5할의 성공만을 거뒀다. 1992년 바이킹 이후 처음으로 발사된 화성궤도선 마스 옵저버가 궤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라졌고, 1998년 발사된 화성 기후 궤도선(MCO)도 궤도진입 과정에서 화성에 너무 근접한 탓에 대기와의 마찰로 산산조각 났다. 1999년 발사된 화성 극지 착륙선과 여기에 실린 딥스페이스 2호는 착륙과정에서 실종됐는데, 너무 일찍 역추진로켓이 점화돼 착륙선이 표면에 충돌한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처음으로 화성탐사를 시도한 일본에게도 액운은 예외가 아니었다. 1998년 발사된 노조미는 화성으로 가기 위해 지구와 달의 중력을 이용해 속도를 증가시키는 과정에서 충분한 추진력을 얻지 못해 곧바로 못갈 운명에 놓였다. 결국 노조미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4년 동안 태양계 주위를 돌며 속도를 증가시키는 대안을 택했고, 그동안 살아남는다면 2003년 12월 화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에어백 동원된 표면 착륙
화성과의 성공적인 재회는 20년만에 이뤄졌다. 1996년 발사된 화성 전역 서베이어(MGS)가 그 주인공으로 1997년 9월 궤도에 진입했다. 서베이어는 지구의 2년에 해당하는 화성의 1년여 동안 극궤도를 낮은 고도로 돌며 화성의 기후, 날씨, 중력, 대기 조성 등 화성 전체를 탐색했다. 서베이어의 1단계 임무는 2001년에 끝났지만 지금도 연장된 임무를 수행중이다.
1996년 12월 발사돼 1997년 7월 4일 화성에 착륙한 패스파인더의 경우 화성탐사선 중 바이킹탐사선 다음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바이킹 이후 21년만에 다시 화성에 착륙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십억달러의 바이킹에 비해 수억달러의 저렴한 예산으로 제작된 탐사선의 특징 때문이었다. 패스파인더는 착륙선으로는 처음 역추진로켓이 아닌 에어백이라는 공기주머니가 착륙의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장치로 이용됐고, 달탐사 이후 처음으로 이동형 탐사차량이 동원됐다. 미국은 이미 달에서 유인 달탐사차량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원거리인 지구에서 조정하는 무인 탐사차량은 처음이었다. 착륙 후 칼세이건 기념기지로 명명된 패스파인더 착륙선(예정수명 30일)과 탐사차량 소저너(예정수명 7일)는 예정됐던 수명을 훨씬 넘어 1997년 9월 27일, 원인모를 통신두절이 있기까지 작동함으로써 우주과학기술의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2003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단계 발전된 이동 차량을 보내게 된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동성이다. 소저너가 한달 걸려 움직였을 거리를 이 차량은 하루면 갈 수 있다. 따라서 더욱 넓은 지역에 대해 물이 존재하는지 이잡듯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05년에는 화성 정찰 궤도선이 발사돼 첩보위성 수준인 20-30cm 해상도로 정밀한 탐사를 펼치게 된다. 이 정보는 화성의 이해뿐 아니라 인류의 화성 착륙장소를 선정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풍선에서 비행기까지 기동성 확보하라
미래 화성탐사의 화두는 넓은 지역을 저렴한 비용으로 탐사할 수 있는 기동성의 확보에 있다. 소저너와 같은 이동형 차량으로는 탐사영역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화성의 지형은 매우 거칠며 지구에서처럼 편안하게 다닐 만한 어떤 도로도 없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화성의 대기와 바람을 이용할 예정이다. 그 중 하나가 2층 높이의 비치볼 같은 모양으로 부풀어오르는 풍선형 탐사선이 연구중에 있다. 이 탐사선은 바람에 따라 사방을 돌아다니는 특성 때문에 사막을 떠도는 죽은 잡초가 뭉친 회전초와 같아 소위 ‘회전초 공’으로 불린다. 커다란 축구공처럼 생긴 풍선 중앙에 탐사장비를 부착하고 평균 초속 10m의 속도로 이동하게 된다. 가파른 언덕도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내부공기를 뺌으로써 정지상태로 장시간 탐사활동을 벌일 수 있다.
지상형 풍선뿐 아니라 공중형 풍선도 있다. 이런 공중형 풍선탐사선은 궤도선보다 수백배나 표면에 가까이 근접해 비행할 수 있고 이동 차량에 비해 수천배나 먼 거리를 탐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하지만 기존의 헬륨가스가 들어가는 가스형 풍선은 수명이 겨우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백일 이상 1년 정도의 수명을 가진 풍선을 제작하는 일이 큰 관건이다. 가스형 풍선 외에 열기구형 풍선도 동원될 것이다. ‘몽골피에 기구’라고 불리는 이것은 가벼운 가스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데워져 가벼워진 화성의 대기를 연료로 한다. 태양에 의해 데워진 풍선은 부력을 얻어 비행할 것이다. 열기구형 풍선을 이용할 경우 하루 동안의 비행가능시간이 불과 몇시간에 불과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상탐색과 공중탐색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가장 극적인 탐사선은 아마도 비행기가 될 것이다. 인류는 라이트형제의 비행기에 의해 하늘을 난지 겨우 1백년도 되지 않았는데 화성의 대기에 비행기를 날리려고 시도한다. 현재 연구중인 비행기는 인간의 도움 없이 자율적으로 날 수 있는 것이다. 비행기가 화성의 하늘을 날기 위해 넘어야 할 큰 어려움은 바로 얇은 대기이다. 화성의 얇은 대기에서 비행에 필요한 양력을 얻으려면 큰 날개와 활주로가 필요하다. 따라서 화성탐사 비행기는 지상의 착륙선에서 이륙하기보다는 대기권 돌입과 함께 공중에서 바로 비행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이를 위해 비행기는 열보호 덮개 속에서 날개를 접고 있다가 무사히 대기권을 진입하면 날개를 펼치고 건전지를 동력으로 이용해 비행하거나 글라이더처럼 무동력으로 비행할 것이다. 이 경우 비행시간이 풍선형에 비해 상당히 짧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조정이 가능해 흥미로운 목표에 더욱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류가 직접 화성에 발을 내딛기 위한 준비도 진행중이다. 화성과 유사한 지형을 가진 캐나다의 북쪽 지역인데본 아일랜드에서 유인탐사를 위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NASA가 지원하고 세티(SETI) 연구소가 운영하는 화성용 모의 거주모듈이 설치돼 6명씩 교대로 거주하면서 총 25명의 화성우주비행자원자가 생활한 바 있다. 결국 다양한 무인 탐사선의 활동으로 수집된 자료들은 이들을 화성으로 보내기 위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실제 화성우주비행사로 뽑히는 행운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