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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첫 특허가 출원된 지 55년 뒤에야 상업화에 성공한 제품은? 바로 볼펜이다. 지금은 한 사람이 보통 대여섯 자루는 갖고 있고 책상 서랍을 뒤지면 안 쓰는 볼펜이 한 다스는 될 만큼 흔한 필기구가 됐다. 그렇다면 이제 볼펜의 기술은 완성됐을까. 신제품은 단지 디자인만 바꾸는 정도일까. 손안에 쥔 볼펜에 담겨 있는 최신 기술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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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불편 극복한 유성볼펜

펜 끝에 볼을 달아 종이 위에 글씨를 쓴다는, 즉 펜 끝이 이동할 때 볼이 굴러 위쪽에 있던 잉크가 아래쪽 종이에 묻게 한다는 아이디어는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 생각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볼펜을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은 19세기 영국의 가죽가공업자인 존 라우드다. 당시 주된 필기도구인 만년필로는 가죽에 글씨를 쓸 수 없어 고민하다가 볼펜을 생각해냈다.

그는 강철 재질의 볼과 볼을 싸는 소켓을 고안해 1888년 특허까지 냈지만 잉크가 줄줄 새 제품화에는 실패했다. 헝가리의 신문 편집자였던 라즐로 비로 역시 만년필의 불편함을 투덜거렸다. 만년필은 잉크를 충전하기도 번거로울뿐더러 글씨를 쓰다 잉크가 덜 말랐을 때 손에 묻거나 말라도 물이 닿아 번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문을 인쇄하는 잉크가 금방 마르고 번지지도 않는다는 데 착안해 만년필에 는 점도가 높아져 볼펜을 뒤집어도 볼펜심에서 흘러내릴 염려가 없다. 볼펜을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튜브가 깨지지 않는 한 잉크가 좀처럼 새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유성볼펜도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뻑뻑한’ 필기감은 만년필의 사용감을 따라가지 못한다. 잉크의 점도가 높은데다 소량을 내보내기 위해 소켓과 볼 사이의 틈이 좁아 볼이 구를 때 마찰이 크기 때문이다. 볼펜을 세운 채 누르지 않고 옆으로 움직이면 볼이 구르지 않아 잉크가 나오지도 않을 정도다. 보통 유성볼펜의 볼 지름이 0.5mm가 넘는 이유도 볼이 작을수록 굴리는 데 힘이 더 들기 때문이다.

참고로 볼펜의 규격은 볼의 지름을 의미한다. 볼의 제조과정은 맷돌에 곡식을 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텅스텐 카바이드란 금속합금에 니켈, 크롬을 배합한 재료를 볼 형태로 만들고 얇은 틈 사이에 넣고 굴리면 표면이 마모되면서 매끄러운 구가 된다. 볼 지름의 오차는 0.1% 이내로 유지해야 하므로 볼이 작을수록 더 높은 정밀도가 필요하다.

한편 볼펜을 쓸 때 볼에서 나온 잉크가 종이로 100% 옮겨지지 않고 볼 주변에 조금씩 쌓이는데, 어느 정도 이상 커지면 글씨를 쓸 때 한꺼번에 종이에 묻어 보기 싫게 된다. 소위 ‘볼펜 똥’이다. 볼펜 똥은 용제가 종이로 완전히 흡수되지 않아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종이가 지저분해지는 경우가 많다. 플라스틱처럼 매끄럽고 딱딱한 표면은 마찰력이 작아 볼이 구르지 않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글씨가 안 써지는 문제도 있다. 억지로 쓰려고 볼펜을 세게 누르다가는 볼 부분이 망가진다. 종이처럼 눌리는 바탕에는 소켓 밖으로 나와 있는 볼이 거의 다 닿기 때문에 지름에 가까운 두께로 글씨가 써진다. 하지만 딱딱한 바탕에서는 볼의 끝만 닿아 선이 얇아진다.



중성볼펜, 볼이 작으면서도 필기감 좋은 이유

유성볼펜의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수성볼펜이 등장했다. 만년필 같은 필기감을 볼펜으로 구현한 수성볼펜은 잉크의 점도가 낮아 볼이 잘 굴러 유성볼펜보다 쓰기가 편하고 볼펜 똥도 거의 생기지 않는다. 수성볼펜은 대부분 볼 지름이 0.5mm 이하다. 문구제조사인 모닝글로리의 디자인연구소 이노피스팀 최정헌 팀장은 “수성잉크는 종이에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번지지 않고, 깔끔한 선이 나오려면 볼이 작아야 한다”며 “볼이 작아질수록 같은 거리를 움직일 때 볼이 구르는 횟수가 늘어나므로 내구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힘을 줘 쓰는 유성볼펜은 글씨를 쓸 때 미끄러지는 경향이 있다. 반면 볼을 굴리는 데 힘이 덜 들어가는 수성볼펜은 좀 더 정교하게 힘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수성볼펜도 단점이 있다. 펜을 종이에 둔 채 잠깐 딴 생각을 하면 잉크가 번지고, 글씨를 쓰다 글씨가 손에 닿으면 번지기도 한다. 물이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말랐더라도 물에 닿으면 다시 번지기도 한다. 또 뚜껑을 덮지 않으면 잉크가 마르기 때문에 쓰지 않을 때는 뚜껑을 닫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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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볼펜과 수성볼펜의 단점을 보완한 볼펜은 1000m 정도 쓰면 수명이 다하는데, 마하펜은 5배나 되는 5000m를 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수명으로 볼펜을 많이 쓰는 고시생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본 제품이 볼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마하펜이 다크호스로 등장한 셈이다. 그렇다면 마하펜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성능을 갖게 됐을까.

“보통 대롱에 들어 있는 잉크의 양은 0.5ml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하펜은 펜 몸통의 절반 이상이 잉크통이라서 1.7ml나 들어갑니다. 볼의 지름이 0.4mm이므로 끊임없이 잉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이죠.”

물론 수성잉크를 이렇게 많이 넣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은 온도가 올라가면 팽창하기 때문에 체온이 전달되는 셔츠 호주머니에 꽂고 있거나 한여름에는 내용물이 흘러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팀장은 “펜대의 아랫부분을 보면 물고기 아가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판들이 막고 있다”며 “잉크통에서 잉크가 좀 새더라도 여기에 걸려 볼펜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잉크통과 펜 끝 사이는 지름이 불과 0.5mm인 얇은 관으로 연결돼 볼이 굴러 앞쪽의 잉크가 소모되면 잉크가 흘러간다.

마하펜의 팁을 공급하는 (주)아미온의 박찬원 사장은 “볼펜 팁에도 노하우가 숨어 있다”고 밝혔다. 보통 유성볼펜은 끝이 깔대기 모양인 콘 팁(cone tip)을 쓴다. 콘 팁은 구리나 황동으로 된 작은 원기둥 조각을 파내 볼이 들어갈 소켓을 만든다. 반면 수성
볼펜이나 중성볼펜은 주로 파이프 팁(pipe tip)을 쓴다. 얇은 스테인리스강을 말아 용
접해 파이프로 만든 뒤 볼을 넣고 아래쪽은 오므리고 위는 파이프 바깥에서 안쪽으로 서너 곳에서 눌러줘 볼을 고정한다.

박 사장은 “지름이 0.4mm에 불과한 볼을 고정한 채 오랫동안 마모되지 않고 쓸 수 있으려면 재질이 강해야 하는데, 그 결과 가공할 때 정밀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며 “이를 극복하는 기술이 업체의 노하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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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처럼 지워지는 볼펜

글씨 쓰기가 ‘힘들어’ 특히 여성들이 외면해 온 유성볼펜도 염료 함량을 줄여 점도를 낮춘 잉크를 사용한 제품을 출시하며 반격에 나섰다. 충분히 짙은 색을 내려면 유출량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대신 용제의 휘발도를 높였다. 물에 번지지 않는다는 유성볼펜의 장점을 여전히 갖고 있으면서도 쓰기도 한결 편하다.

한편 ‘볼펜은 지워지지 않는다’라는 상식을 뒤집은 제품도 나왔다. 일본 파일로트사
의 제품 프릭션(FriXion)은 지워지는 젤잉크를 쓴 제품인데, 글씨를 쓴 뒤 펜 끝에 달
린 플라스틱으로 문지르면 글씨가 사라진다. 하지만 연필로 쓴 글씨가 지우개에 지워지는 것과는 메커니즘이 다르다. 연필로 쓴 글씨는 종이 위에 흑연이 묻어 있는 상태라 지우개로 문지르면 흑연이 지우개에 달라붙어 떨어져 나간다. 반면 지워지는 젤잉크는 플라스틱으로 문지를 때 생기는 마찰열에 색소분자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색이 사라지는 원리다. 다만 지워지는 볼펜은 색이 흐릿한 게 단점이다.

검은 종이처럼 바탕색이 어두운 경우 보통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알아볼 수 없다. 용액에 색소분자가 녹아 있는 잉크를 쓰는 보통 볼펜은 투명도가 높기 때문에 빛이 바탕까지 도달해 흡수되기 때문이다. 이럴 땐 금가루나 은가루를 섞은 듯한 펜을 쓰면 글씨 선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두운 바탕에도 묻히지 않는다. 암녹색 칠판에 흰색 분필로 쓴 글씨가 희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볼펜에서 이런 효과를 내려면 잉크에 입자가 큰 안료를 타야 한다. 안료는 일종의 돌가루다. 수성잉크일 경우 안료가 가라앉아 뭉칠 수 있으므로 이런 볼펜에 쓰는 잉크는 안료가 분산된 채 유지되는 젤타입이다. 그렇다면 볼펜의 볼은 얼마나 더 작아질 수 있을까. 박 사장은 “외국에는 지름 0.18mm짜리 볼펜도 나와 있다”며 “그러나 볼이 작다고 무작정 좋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바늘 끝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사용감이 좋지 않을뿐더러 볼 지름이 작아질수록 펜 끝이 받는 압력이 커져 쉽게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높은 수준의 정밀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불량률도 높다. 지름 0.25mm 볼펜이 사실상 국내에서 가장 가늘게 쓸 수 있는 볼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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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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