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갈래 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할 때 누군가의 도움과 정보가 절실하다.떠오르는 생명공학에서는 어떨까.생명공학을 전공하려면 어느 과로 가야 할까.
담임선생님: 지원이는 어디 지원할거니?
고3수험생 지원: 저…생명공학요.
담임선생님: 왜?
고3수험생 지원: 전망이 좋은 것 같아서요.요즘 게놈이니 복제로 막 떠들썩하잖아요.그런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어요.의대예요?공대예요?자연대에요?"
대부분 사람에게 자신의 진로문제가 처음으로 심각하게 다가오는 때는 대학입학을 눈앞에 둔 고3 시절이다.요즘 학부제로 과거보다 선택의 부담감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역시 가장 절실한 고민의 시기인 것이 사실이다.부모님,선생님,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어디가 전망이 밝은지를 곰곰이 따져본다.이때 머리에 떠오르는 분야 중 하나가 생명과학 또는 생명공학이다.생명공학자가 돼서 암을 정복하거나 생명의 신비를 밝힌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어느 과를 가야 할까.생명과학과,생명공학과,의학과?
그러나 이때 놓치기 쉬운 점들이 있다.우선 생명공학에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생물체가 다양하다는 것이다.생물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식물,그리고 미생물로 구분된다.또 동물 가운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곤충만 해도 약2백만-5백만종일 것으로 추정된다.때문에 의학,생명과학,생명공학이라는 명칭이 붙은 과뿐 아니라 농생명공학,축산학,농화학,식품공학과 같은 여러 농대 학과들,제약 또는 약학,그리고 수의학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생명을 대상으로 연구하거나 응용하는 모든 학과가 생명공학의 인접학문인 셈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생인 권모(30세)씨는 "수험생이 자신의 수능점수가 부족해서 생명과학과나 의대를 가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농대,수의대를 가서 생명공학을 할 수도 있고,대학원을 생명과학과로 진학하면 된다"라고 말한다.그는 학부과정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지만 생물과학부 대학원에 진학해서 적응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생명공학의 기초교과목이 어느 인접 학과에서나 교과과정에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수의학과에서 달성한 세계수준의 복제술
그러나 농대,수의대를 가도 된다는 권씨의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가령 동물의 질병을 예방·치료하는 수의사 양성이 주목표인 수의학과로 진학하는 미래 생명공학도가 있다면 그곳에서 6년이란 세월의 대부분을 수의사 양성교육을 받았을 때 많이 방황하지 않을까.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 5개국만이 이뤄낸 복제기술을 보유하게 된 것이 바로 서울대 수의과의 황우석교수 덕택이라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활발한 생명공학 연구가 이뤄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생명과학 교수의 출신 학부에서도 이런 점이 확인된다.대표적인 사례로 포항공대 생명과학과의 경우 18명 교수의 출신 학부를 보면 의학1명,제약2명,수의학1명,식품공학2명,농학1명,생물학1명,동물학3명,식물학1명,그리고 화학4명으로 다양하다.
한편 생명현상은 매우 복잡하다.생명과학과는 다시 식물학,동물학,미생물학,분자생물학,세포생물학,유전학,생화학,생리학,진화학,분류학 등으로 나눠져 있다.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이들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감 잡기가 어렵다.이것이 바로 20세기 과학의 산물이다.연구대상이나 방법에 따라 학문이 여러 개로 세분화된 것이다.물리학의 핵물리,원자물리,천체물리,응집물리 등으로 구성된 것처럼 말이다.이로 인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세분화된 분야가 다르면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다.그러나 생명이라는 상당히 복잡한 주제를 단순하게 한 분야로면 바라봐서는 그 전모를 밝힐 수가 없다.
공동연구 통해 시너지 효과 얻은 게놈연구
때문에 최근에는 여러 분야 연구자가 참여하는 공동연구가 늘어가고 있다.게놈연구가 그 한예다.국내 게놈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생명공학연구소 인간유전체사업단은 김용성 유전학 박사를 중심으로 생화학,분자생물학,생물정보학 전문가로 이뤄져있다.게놈연구의 여러 부분을 전문분야에 따라 나눠 공동 진행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임자가 있는 체계다.
미국의 경우 참여하는 연구자의 전문분야가 생명과학을 뛰어넘는다.인간의 유전자 서열 규명 작업과정에서 컴퓨터가 필수 도구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980년대에 생물학자 한명이 꼬박 1년 걸렸던 1만개의 염기쌍 서열 분석이 1992년 컴퓨터 한대가 하루만에 해치웠다.이로 인해 원래 계획보다 완료시점을 5년이다 앞당길 수 있게 됐다.게놈연구 과정에서 생물학자가 컴퓨터공학자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이다. "많은 생물학자들에게 지루한 작업이었던 DNA서열 규명 작업이 컴퓨터 공학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연산문제였다"고 워싱턴 대학 컴퓨터공학자 리처드 카프 박사는 말했다.공동연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을수 있었던 것이다.
또 재미있게도 생명체 유전자 서열규명을 위한 세계 최대 저장소인 미국의 젠뱅크를 세운 이는 생물학자가 아닌 수학자 스타니슬라브 울람박사다.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기여하는 이는 생명과학자만은 아닌 것이다.특히 20세기에 상당수의 화학자가 생명공학에 기여했다.1700년대 후반 근대 화학의 아버지인 라부아지에가 "생명은 화학작용이다"고 선구적으로 말한 이후 생명 현상을 분자수준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1869년 스위스의 화학자 미셔는 세포핵에 있는 화학물질에 관심을 가져 DNA를 발견했다.이후 생명과학계에 분자생물학이 큰 분야로 자리잡았고,화학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생명과학의 기초교과목으로 생화학이 중심일 정도다.
뇌과학 연구 상당수가 물리학자
화학자뿐 아니라 물리학자가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특히 뇌과학 연구자의 상당수가 물리학자다.신경세포가 어떻게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처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뇌파분석과 같은 물리학적 연구방법이 이용되고 있다.한 예로 미국 예일대 의대 연구원이며 본지 '복잡성의 과학'의 필자인 정재승 박사가 물리학자로서 뇌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있는 곳은 물리학뿐 아니라 생물학,화학,심리학,정신과,생리공학,생리학 등 온갖 분야 전문가가 '복잠한 뇌작용을 이해한다'는 목표로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물리학자인 정재승 박사는 어쩌다가 뇌를 연구하게 됐을까.그의 학부전공은 천체물리학이다.그러나 그는 석사 때 복잡성과학을 이용한 생물리학과 전산뇌과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그래서 실험실을 옮기고 싶다고 천체물리학 지도교수에게 의사를 표했을 때,교수로부터 "괜히 이도저도 아닌 거 하지 말고 물리학을 해"라는 말을 들었다.우리나라는 아직 정통물리학만이 물리학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이것은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통물리학보다 이제는 응용물리,경제물리학이나 생물리학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고 있다.학문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교과과정의 변화에서도 이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최근 포항공대는 생명과학 교과목 이수 체계를 대폭 수정했다.생물학 중심의 전공과목 대신 자연대와 공대 학과의 여러 과목을 들어도 졸업할 수 있게 됐다.이에 대해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학과장 채치범 교수는 "앞으로의 생명과학 연구에는 물리학,화학,수학,전산학,그리고 공학 등과 같은 폭넓은 지식과 안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물학적 지식과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게놈연구 이후 대두되고 있는 정보생물학 분야가 더욱 그러하다.정보생물학은 게놈연구를 통해 얻어진 DNA염기서열 정보를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처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분야다.
이런 이유로 최근 수학,물리학,화학 학부 전공자의 생명과학 대학원 입학을 환영하고 있다.MIT 생명과학 대학원은 홈페이지에 타학부 전공자가 진학하고자 한다면 기초생명과학 교육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국내에서 이런 체제가 마련돼 있지 않아서 타학부 전공자가 생명과학 대학원에 진학한 후 기초생물학을 혼자 공부해서 생명과학 학부졸업생을 좇아가거나,학부때 미리 몇과목을 수강해둘 필요가 있다.
포항공대에서는 최근 물리학 교수 채용에서 이변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생물리학 전공자인 생명과학자가 물리학 교수로 채용된 것이다.반대의 경우는 찾기 쉽지만 이 경우는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한다.이에 대해 포항공대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물리학자가 생명과학으로 진출했지만,이제는 적극적으로 생명현상을 물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변호사가 생명과학 대학원 진학
한편 생명공학의 성과는 비단 과학자만의 관심사가 아니다.생명공학이 제시하는 미래 모습은 일반인에게 유전자 조작을 통한 유전병 치료,에이즈와 같은 현대 불치병 퇴치,새로운 신약 개발,복제를 통한 장기이식,식량문제 해결,그리고 생명연장과 같은 강렬한 희망을 주고 있다.하지만 이와 더불어 인간성 상실,우전자조작식품에 대한 두려움,유전정보를 소유한 새로운 권력층 탄생,그리고 유전자에 의한 차별과 같은 사회,철학,윤리,경제,그리고 법적인 문제를 들춰낼 수 있다.이러한 이유로 비과학도가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일도 늘어가고 있다.
생명과학과 관련된 법적 문제가 증가할 것을 대비해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생명과학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이 있다.소위 생명과학 전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다.경제학 전공자도 생명과학 지식이 필요하다.정보통신이 그랬듯이 최근에는 생명공학 벤처가 주식시장에서 인기종목이기 때문이다.만약 경제전문가가 생명공학 벤처에 대한 투자문의를 고객으로부터 받았을 때 생명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그 벤처를 평가할 수 있을까. '생명과학전문 투자자문가'라는 새로운 전문직이 필요한 셈이다.
사회학자나 윤리학자,철학자도 마찬가지다.유전자 조작을 통한 치료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집단이 생겨나 사회문제를 일으킬수 있다.또한 윤리적,종교적으로 장기이식을 위해 만들어진 생명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가 조만간 닥칠 현안이다.
이처럼 생명현상은 여러 분야의 관심사다.따라서 정통생명과학의 길 외에도 생명과학과 관련해서 수많은 갈래 길이 있다.생명과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이는 우선 자신이 생명과학이란 학문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관심사를 구체적으로 찾아갈 필요가 있다.어떤 분야의 전문연구자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고 무엇을 공부할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