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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등지에서 과학기술 개발정책 전문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최형섭 박사

"이제는 지식이 밑받침된 기술을 개발할 때"

흔히 선진국은 후진국보다 과학기술이 앞서 있다 하고 이 기술은 점차 후진국으로 전수된다고 한다.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많은 댓가를 치르고 기술이전을 받았고 이제는 동남아 각국이나 중동으로 우리의 기술을 수출한다는 것쯤은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보다도 우선하는 노하우는 과학기술 개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밑받침삼아 동남아 국가나 중동국가의 과학기술 개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을 직접 지휘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포항제철 산업과학기술연구소 고문으로 있는 최형섭박사(69)는 태국 경제개발계획의 과학기술부분 입안책임자였고 필리핀의 기술개발 자문역을 훌륭히 수행해 낸 과학기술 개발 정책 전문컨설턴트이다.

최박사는 70년대 7년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처장관을 지내면서, 공업화의 기술적 기반을 닦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형섭 박사


● 과학기술 정책 컨설턴트

―최박사께서는 80년대 들어 동남아국가를 중심으로 과학기술 정책 자문역할을 많이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계기로 그런 일을 하게 됐읍니까.

"미국원조개발처(USAID)나 유네스코 등에서는 후진국에 과학기술 관련 원조를 해오고 있읍니다. 이러한 원조시 기술개발 자문역으로 1~2명 정도를 현지나라에 파견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원조국 사람이 이 역할을 해왔으나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참조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사람을 빌려달라고 요청이 와 나한테 그일이 맡겨진 것 같습니다. 일년 동안 봐달라고 했으나 6개월만 하겠다고 승낙했지요."

―일종의 고용인인데다 현지인 또한 그리 협조분위기는 아니었을텐데…

"매사가 그렇지만 눈치보면서 선생노릇 하는 것이 가장 몹쓸짓이지요. 뭐 내가 일자리가 없어서 그일을 맡은 것이 아니고 그쪽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눈치볼 필요는 없었읍니다. 내 천성 또한 남의 비위 맞춰가면서 일을 하지 않으니까 별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를 현지인이었읍니다.

나도 그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태국사람들이 그렇게 배타적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자리로 가서 임기를 마친 사람이 없다니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다 새로 기획팀을 구성했는데 이들을 학교에서 제자 다루듯 했으니 오죽 했겠읍니까. 공무원들은 보통 4시반 퇴근인데 밤새우기 일쑤고 일요일도 없이 채근댔읍니다.

처음에는 애를 먹이다가 그쪽에서 의견이 안좋으면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대안을 제시하니까 따라오더군요."

최박사는 이 일을 계기로 동남아사회 경제개발기구(ESCAP)의 워크샵 등에서 한국을 모델로 기술개발정책 강의를 하게 되었고 각국의 기술개발 정책 세미나등에서 의장으로 기조연설을 도맡아 했다. 또한 파키스탄 스리랑카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개발 계획 지침을 만들고 과학기술 관련 법령을 만드는데 자문역할을 해오고 있다.

UN이나 ESCAP 등에서 전문컨설턴트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눈치보면서 선생노릇 하게될까바 이를 거절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해왔던 것.

● 우연한 계기로 행정분야에

―최박사께서는 금속학을 전공하신 연구자인데 어떻게해서 과학기술행정분야에 몰두하게 됐읍니까.

"아주 우연한 계기지요. 63년 국제원자력기구(IAA)에서 '지르코늄'제련방법을 공부하러 캐나다에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동안'국가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의 활동을 주의깊게 지켜 보았지요. 귀국해서 화학회지에 '캐나다 과학기술개발에 있어서 NRC의 역할'이라는 글로 기고했는데, 이것이 저의 인생항로를 바꾸어놓은것 같습니다.

이 글을 어떻게 봤는지 청와대에서 와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뭐 대통령 정도야 과학기술에 관한한 아마추어니까 적당히 이야기하면 되겠지 하고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읍니다. 막상 청와대에 가보니 대통령 이하 국무총리 등 전 각료들이 앉아 있더군요. 나보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브리핑을 하라는 거예요. 밑질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생각하던 몇가지를 얘기했지요."

최박사가 그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들려준 얘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교육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과학을 아는 교육'에서 '과학을 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하고, 둘째는 기업이 R&D(연구개발) 투자를 안하니까 이를 대신할 기술개발매체가 필요하며, 세째는 과학기술 풍토 조성에 대통령이 직접 앞장서라는 내용이다.

"그자리에서 '과학을 하는 교육'이 뭐를 의미하느냐는 질문도 받고 기술개발매체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약간의 토론도 했지요. 일단 자리를 파하고 대통령이 잠깐 보자고 해서 갔는데 그자리서 과학기술 담당 정부 부처를 만들어 장관을 맡으라고 하더군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제안이고 내 길하고는 너무도 달라 즉석에서 거절하고 돌아왔읍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됐던 과학기술 개발매체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현KAIST)로 결실을 맺었고 초대 소장에 최박사가 임명되었다. 이때가 1966년이며 이듬해 과학기술처가 탄생했다. 최박사가 KIST소장 당시 박대통령은 KIST를 자주 방문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었고 이를 연유로 1971년 2대 과학기술처 장관 임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본업을 잊은 채, 장관재직 7년 동안을 포함, 그 이후 줄곧 외도의 길을 걸었다고 푸념했다.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인 최형섭 박사


● 머리만이 기술이 아니다

―90년대에 진입하는 시점에서 60~70년대와 비교,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평가해주시지요.

"70년대 중반만 해도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본은 75년까지 1백년동안 축적기간이 있었읍니다. 이를 통해 80년대에는 모방을 창의로 뒤바꿔 놓을 수가 있었지요. 애석하게도 우리는 축적기간이 모자랍니다."

최박사의 기술에 대한 철학은 이렇다. 기술은 1백년을 50년으로 단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로를 생략할 수 없다는 것. 기술은 머리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데 기능은 시간이 걸린다는 설명이다.

"대학 나온 사람이 몇 대에 걸쳐 메밀국수집을 하는 일본과 부모가 설렁탕집한다고 창피해서 이민가버리는 우리의 풍토는 조금 다르지요. 그렇다고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젊은 사람들이 노력을 많이 해 밑바탕이 부족한 것을 어느 정도 메꾸고 잘 버텨왔읍니다. 이제부터 좋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기초에 투자해야 합니다."

최박사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이 빌려왔든지 사왔든지 훔쳐왔든지 간에 우리는 이제까지 지식없이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돈주고도 좋은 기술은 사올 수 없는 시대가 왔으므로 좋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기초에 투자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최박사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과학기술자가 갖추어야 할 몇가지 자세에 대해서 강조한다.

"돈 생각하면 안됩니다. 배부르면 공부 못합니다. 3극 진공관발명자 '드포레스트'가 GE사로 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는데 나중에 그가 죽고나서 쓴 액수를 보니, 고작 시골대학의 교수 월급보다도 못했다는 이야기를 그냥 웃고 넘겨서는 안됩니다.

과학기술자는 시계를 봐서는 안됩니다. 시간되면 퇴근하려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디슨은 시간에 상관없이 책을 베고 잤읍니다. 또한 학문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개인이 아는 지식은 뉴턴의 표현처럼 바닷가 수많은 조약돌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최박사의 뼈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저 책에서 보고 얻은 지식이 아니라 70평생 동안 몸소 실천하면서 주위에 가르치고 또한 배웠던 삶 그 자체인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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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윤기은 기자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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