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기 속에서 엄청난 속도를 얻은 전자와 양성자는 물질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간다.이 과정을 통해 우주를 이루는 근본입자들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밝혀질 것이다.
1994년 미국 클린턴 정부는 부시 정부가 승인했던 1백억달러(약 12조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될, 총 40조eV 에너지의 초전도초가속기(SSC: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건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늘어나는 가속기 건설비용을 더이상 국가가 메우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비용도 엄청나지만 국민의 세금을 가속기 건설에 계속 투입할 명분이 적어진 것도 한 이유다. 이미 20억달러 가량을 투자한 상태에서 이뤄진 결정이라 입자물리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입자물리실험을 위한 가속기 건설에 1백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려고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물리학의 꽃으로 등장한 입자물리학과 떼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속기, 그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물질 깊숙한 곳을 파헤친다
태초의 우주는 1028K 이상의 높은 온도를 유지했다. 그 당시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달라서 현재의 물질 같은 것들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입자물리학자들은 초기 우주는 너무나 뜨거워서 모든 물질을 녹였고 더 나아가 핵조차도 녹여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당시의 세상은 더이상 녹일 수 없는 물질인 소립자들로 돼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반인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입자물리학자들은 이 상황을 재현하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화석을 발굴하면서 인류의 기원을 알려고 하듯이 입자물리학자들은 우주 초기의 물질을 찾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가속기를 이용한 방법이 대표적이다. 가속기 속에서 전자와 양성자는 물질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속도인 빛의 속도에 접근한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운동량이 크다는 말이다. 빠른 전자가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와 충돌하면 그 속 깊숙이 파고 들어가게 된다. 과학자들은 물질 깊숙한 곳에 물질을 이루는 궁극적인 소립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속된 전자나 양성자가 물질 속을 파고 들어가 소립자를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즉 입자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이루는 근본입자들을 발견하고 소립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밝혀내려고 한다. 이것이 입자물리학자들의 희망이다.
핵을 충돌시켜 연금술사 꿈에 도전
핵물리학의 시작은 1896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베크렐이 우라늄에서 흘러나온 방사선을 발견하면서 비롯된다. 방사선은 핵이 붕괴되면서 나오기 때문이다. 소립자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입자물리학의 시작은 1897년 영국의 톰슨이 음극선의 운동 방향과 수직으로 전압을 걸어주고 음극선이 휘어지는 방향을 알아내면서 비롯됐다. 이 입자가 음의 전기를 갖는 입자 즉 최초의 소립자인 전자다.
1911년 핵의 존재를 밝혀낸 러더퍼드 경은 알파 입자(헬륨 핵)를 질소 핵에 충돌시켜 질소 핵이 산소 핵과 양성자로 변환되는 것을 측정했다. 이로써 물질을 변형시켜 금을 만들겠다는 연금술사의 오랜 숙원이 현실 속에서 이뤄질 수 있게 됐다. 이후 알파 입자를 여러 종류의 핵에 충돌시켜 핵반응을 연구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생되는 알파 입자로부터는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다양한 핵반응을 연구하는데 장애가 됐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인위적인 에너지원이 필요해졌다.
1932년 콕크로프트와 월튼은 케임브리지연구소에서 수소 원자로부터 전자를 떼어낸 양성자를 80만V의 고전압으로 가속시켜 리튬 핵에 충돌시킴으로써 리튬 핵을 헬륨 핵으로 변환시키는 실험을 성공시켰다. 최초로 입자가속기를 만들어 인위적인 핵변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가속기인 정전기 고전압 가속기다. 콕크로프트-월튼 정전기 가속기는 현재에도 입자를 처음 가속시킬 때 사용된다.
1932년 이후 가속기의 성능은 지속적으로 발전했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개발해도 공기중의 정전기 방전현상 때문에 1천2백만V 이상의 고전압을 유지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입자물리학자들은 더 높은 에너지를 내는 가속기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그러나 러더퍼드 경은 핵물리학 연구를 위해서 높은 에너지의 입자가 필요하긴 하지만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가속기를 설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졌다. 이로 인해 입자가속기에 대한 연구는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건너가 발전한다. 그리고 입자물리학자들은 좀더 높은 에너지의 가속기로 원자나 핵 속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밝히는 동시에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면서 입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가속기의 종류
가속기에는 가속시키는 방식에 따라 선형가속기와 우너형가속기로 나뉜다.선형가속기는 입자를 직선 상에서 가속시키며,원형가속기는 입자를 원둘레를 돌게 하면서 가속시킨다.또한 가속시키는 입자의 종류에 따라 전자-양전자 충돌가속기,양성자-양성자 또는 양성자-반양성자 충돌가속기,전자-양성자 충돌가속기 등이 있다.
1.선형가속기
1928년 노르웨이 출신의 공학자인 위데로에가 독일에서 개발한 가속기로 현재의 선형가속기와 똑같은 형태다. 하전된 입자는 가속되는 동안 원운동 때문에 에너지를 잃는다. 그리고 이같은 에너지 손실은 양성자에 비해 전자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또 하전된 입자가 직선 운동을 할 때는 복사에 의한 에너지 손실이 원운동을 할 때보다 작다. 따라서 선형가속기는 주로 전자를 가속시키는데 많이 이용된다.
선형가속기는 관과 관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전압을 가해주어 입자를 가속시킨다. 가속에 의해 입자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관의 길이도 길게 해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가속기다. 우리나라의 포항가속기가 선형가속기로 전자를 20억eV까지 가속시킬 수 있다.
2.사이클로트론
전기를 띤 입자는 자기장에 의해 힘을 받는다. 하전된 입자가 자기장의 방향과 수직으로 입사되면 입자는 자기장에 의해 자기장의 방향과 입자가 움직이는 방향에 서로 수직인 방향으로 힘을 받는다. 이때 주어진 자기장이 균일하다면 입자는 반경이 일정한 원궤도 상을 움직인다. 여기서 힘의 크기는 움직이는 입자의 전하량과 입자의 속도, 그리고 자기장의 세기에 비례한다. 하전된 입자를 전압이 일정한 전기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속시키고 자기장에 의해 원운동하게 만드는 원리를 이용하면 입자를 효율적으로 가속시킬 수 있다.
현재의 원형가속기와 유사한 형태의 최초의 가속기는 1930년에 로렌스에 의해 제안된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이다. 로렌스는 어느 날 저녁 대학 도서관에서 논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독일어로 쓰여진 위데로에의 논문에 실려있는 그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위데로에의 선형가속기를 사용해 높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길게 설치해야 하는데, 연구실 안에 설치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좀더 소형으로 만들 궁리 끝에 긴 직선을 나선 형태로 돌돌 말면 충분히 작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데 착안해 속이 빈 D 모양의 2개의 반원통을 마주보게 하고 원통 사이에 전압을 걸어줘 입자를 가속시키고 2개의 전자석을 원통 위와 아래에 설치해 입자가 통 안에서 회전하도록 고안했다.
D자형 용기 양단에 전압을 걸어주면 전압차에 의해 양성자가 두개의 D자형 용기 사이를 지나면서 가속된다. 가속된 후 다른 D자형 용기로 들어온 양성자는 가속된 만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이때 일정한 주기로 D자형 용기 사이의 전기장의 극을 바꿔주면 양성자는 계속 가속된다. 좀더 큰 에너지를 얻은 양성자는 자기장에 의해 더 큰 반경을 그리고 방향이 바뀐 전기장내에서 가속된다. 사이클로트론에서 양성자의 에너지를 크게 하려면 일정한 자기장을 만들어주는 전자석을 크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넓은 영역에 일정한 자기장이 유지되도록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사이클로트론으로는 양성자를 수백만 eV 이상 가속시킬 수 없다.
3.싱크로트론
현재와 똑같은 형태의 최초의 원형가속기는 1945년에 미국인 맥밀란과 소련인 벡슬러가 각각 독립적으로 제안한 싱크로트론(synchrotron)이다. 싱크로트론은 입자가 전기장에 의해 가속될수록 자기장의 크기도 함께 증가시킨다. 이때 입자는 주어진 궤도의 진공관 안에서만 회전한다. 싱크로트론은 링 주위에 많은 자석을 설치해 입자를 가속시키는데, 입자가 가속돼 에너지가 커지더라도 일정한 회전 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장을 변화시켜준다. 그리고 링 주위의 몇 군데에서 전기장이 발생돼 입자가 계속 가속된다. 가속을 위해 링으로 들어오는 입자들은 각각 서로 다른 경로를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입자들은 링 중앙의 궤도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 결국 빔 파이프와 충돌해 없어진다. 이 현상을 막기 위해 가속시키는 동안 빔을 집속시키는 장치로 자석을 이용한다. 이때 빔 파이프는 운동 중의 입자가 다른 기체 입자와 충돌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초진공 상태로 유지한다. 1.8조eV의 총 에너지를 내는 페르미연구소의 가속기는 싱크로트론의 일종이다. 이 가속기는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9천억eV까지 가속시킨다. 링의 반지름은 약 1km이다. 싱크로트론에서의 에너지는 입자가 도는 링의 반지름에 의존한다. 2005년에 가동될 예정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총 14조eV의 에너지를 내는데 링의 반지름은 약 4k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