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세계에서 5억7천6백만t이 생산돼 인류가 섭취한 전체 칼로리의 21%를 공급한 곡물은 무엇일까?
답은 쌀이다. 우리 민족의 주식이자 밀과 함께 곡물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쌀. 한동안 서구세계를 대표하는 밀에 밀리던 쌀이 21세기 들어 기운을 되찾고 있다. 쌀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점차 밝혀지면서 최근에는 서구에서도 쌀을 먹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쌀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식생활의 서구화와 외식 증가로 1인당 쌀소비량이 매년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모습의 쌀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바로 기능성 쌀이 그 주인공이다.
영양 만점, 거대배아미
쌀눈, 즉 쌀의 배아는 영양의 보고다. 그러나 백미로 도정을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낟알의 껍질, 즉 왕겨만을 제거한 상태인 현미가 몸에는 더 좋다. 하지만 문제는 밥맛이다. 현미로 밥을 하면 맛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제대로 익지도 않는다. 배아와 배유를 보호하는 과피, 종피, 호분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식물육종연구실 고희종 교수팀은 돌연변이 육종교배를 통해 거대배아미 품종 ‘서농6호’를 개발했다. 벼의 7번 염색체에 있는 ge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긴 거대배아미는 일반 쌀에 비해 배아의 크기가 3-5배다.
고 교수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주)신지는 지난해 안성의 고삼농협에 의뢰, 논 4만평에서 친환경 오리농법으로 재배한 거대배아미 80t을 첫수확해 올해 8월부터 시판하고 있다. (주)신지의 진중현 이사는 “쌀눈에는 단백질, 지질,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매우 풍부하다”며 “거대배아미를 백미에 놔먹으면 밥맛은 유지하면서 현미를 먹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거대배아미는 생식이나 이유식의 재료로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돌연변이로 만든 신품종이라면 유전자조작식물(GMO)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진 이사는 “생물은 돌연변이를 통해 진화한다”며 “우리는 다만 인위적으로 그 속도를 빨리 해 추구하는 특성을 지닌 변종을 선별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거대배아미도 언젠가는 자연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GMO는 전혀 다른 종의 유전자를 도입한 것으로 자연적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변종을 얻게 된다.
다이어트하려면 밥 먹어라
우리나라 농작물 신품종개발의 산실인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도 각종 기능성 쌀 개발이 한창이다. 지난봄에 개발한 ‘고아미2호’는 식이섬유가 보통쌀보다 2-3배 많이 들어 있는 고식이섬유쌀이다. 식이섬유란 사람의 소화효소가 분해하지 못하는 탄수화물이다. 예전에는 인체에 불필요한 물질로 여겼으나 최근 그 역할이 밝혀지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비만의 치료와 예방에 효과가 있다. 식이섬유는 에너지를 내지 못하지만 포만감을 준다. 또 장내에서 콜레스테롤이 흡수되는 것을 막고 대변의 양을 늘려 변비를 완화한다. 그리고 장내 유해물질을 흡착시켜 함께 배설된다.
농촌진흥청 농촌생활연구소 이성현 박사는 고식이섬유쌀이 당성분의 흡수를 막아 혈당을 낮춰주는 효과가 보통쌀보다 크다는 사실을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쌀이 밀이나 감자 등 다른 곡류에 비해 비만을 유발하는 경향이 덜하다는 사실은 20여년 전에 밝혀졌다.
쌀밥은 혈당의 급격한 증가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인슐린 분비를 자극하지 않아 체지방의 합성과 축적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듀크대 의대에서는 ‘쌀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작물시험장에서는 현미로 밥을 해도 밥맛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중간찰성의 품종 ‘백진주’, 홍국미를 만들 때 홍국균이 침투해 발효가 잘 되게 전분의 조성이 짜여있는 ‘설경’ 등 다양한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방생약 약재로 쓰인 홍국미는 각종 성인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새로운 품종이 개발돼 그 종자가 실제 농가에 보급되는데는 10여년이 걸린다. 작물시험장 황흥구 박사는 “1990년대부터 기능성 쌀 시대를 예측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왔다”며 “앞으로 수년내에 여러 종류의 기능성 쌀들이 식탁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알레르기 유발물질 적어
최근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예전에는 없던 병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알레르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식생활의 서구화란 간단히 말해 쌀대신 밀을, 채소대신 고기를 많이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을 먹는 것과 알레르기 증가가 연관이 있을까?
밀에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발효시키면 부풀어오르는 것도 글루텐 때문이다. 빵을 만드는데 밀이 가장 적합한 곡물인 이유다. 그런데 글루텐이 일부 사람들에게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의사들은 아토피나 천식이 심한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백미의 경우 단백질이 6.5%로 밀가루의 10.4%보다 적지만 양질의 단백질이라 소화율이 더 높고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경향이 훨씬 작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이런 환자들에게 쌀을 권하고 있다. 최근에는 백미를 추가로 도정한 저린미(低燐米)가 인기다.
알레르기 환자나 신장기능이 저하된 사람들은 단백질과 인의 함량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인이 몸에 쌓이면 뼛속 칼슘의 배출이 촉진돼 근골격계 질환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한유는 밥을 할 때 씻지 않아도 되는 저린미를 만드는 다이아몬드 정미기를 개발했다. 이 회사 윤종락 대표는 “인과 단백질은 쌀알의 표면에 많이 들어있으므로 이 부분을 깎아 내야한다”며 “저린미에 대한 국내외 의료계의 수요가 점차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쌀만큼 완벽한 곡물도 없다. 서구의 주식인 밀은 알곡으로는 먹기가 어려운 거친 곡물이다. 따라서 밀가루로 만들어 빵을 만들어야 하는데 달걀이나 설탕을 첨가하지 않으면 영 맛이 없다. 보리나 귀리 등 다른 곡물들도 쌀에 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벼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작물로 많은 노동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따라서 예전에는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고, 기장을 주로 먹던 중국에서도 쌀은 귀한 사치품이었다.
한편 벼농사는 환경적으로도 큰 기여를 한다. 우리국토의 10%를 차지하는 논은 단순히 주식인 쌀을 생산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논에서 벼가 자라면서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연간 2천2백만t에 이른다. 반면 배출하는 산소의 양은 1천6백만t이다. 5천8백만명의 사람이 1년간 숨쉴 양이다. 남한의 인구 4천6백만이 실컷 마시고도 남는다. 그뿐 아니다. 논의 홍수조절 능력은 물 23억t으로 국내 6개 홍수조절용댐 용량의 1.5배다. 논밑의 지하수 함량도 1백58억t으로 국민연간 수돗물 사용량의 2.7배다.
쌀소비량이 줄고 농산물 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논의 면적이 매년 줄고 있다. 쌀의 진가가 더 널리 알려지고 다양한 기능성 쌀이 개발된다면 이런 경향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