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모 대학원 피해학생 심층인터뷰
대학원 실험실(랩)을 고르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학부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박사과정 선배들은 한사코 자기 랩에 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어떤 랩이 좋은지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마침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하는 랩에서 인턴을 뽑아 지원했다. 인턴기간 동안 선배들은 좋은 이야기만 해줬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교수와 친한 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지도교수님은 밥도 종종 사주시며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일부 선배들이 교수님께 혼나고 주눅 들어있는 모습을 봤지만, 그건 그 선배들이 일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만 잘하면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턴이 끝나고 석사에 지원했을 때도 교수님은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4~5년 더 연구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고, 교수님의 권유로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전환했다.
“잘해주시다가 돌변…나중엔 학위로 협박”
석박통합이 확정된 뒤로 교수님은 달라졌다. 하루 석박통합이 확정된 뒤로 교수님은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실적압박의 강도가 세졌다. 작업을 서두르다보니 실수가 늘었고, 교수님의 화도 잦아졌다. 내게 “ADHD 환자”라며 “정신병원에 가봐라”는 욕도 서슴없이 퍼부었다. 일도 많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9시30분에 출근해 밤 8~10시에 퇴근했다. 토요일 오후에 일을 시키고 “월요일 아침에 보자”고 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꼼짝없이 일요일에 나와야 했다.
하루에 많으면 4~5번씩 회의를 했다. 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위장이 쫄렸다. 소화가 안 되고, 위장이 주먹 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 가보니 만성출혈성위염이라고 했다. 술을 끊고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다. 마침 공포기억에 대한 논문을 읽었는데, 논문에 나오는 쥐가 꼭 내 꼴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이 늘 주눅 들어있던 이유도 그제야 보였다. 일단 대체로 생계유지가 안 되고 있었다. 교수님은 입학할 때 100만 원씩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50만 원밖에 주지 않았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사람은 괜찮았지만, 아닌 선배들은 상당한 빚을 지고 있있었다. 학위를 받는 시간도 다른 랩보다 오래 걸렸다. 한 선배는 박사과정만 8년째 하고 있었다. 특수기계를 다루는 사람인데, 손재주가 좋아서인지 교수가 내보내기 싫어하는 듯했다. 논문을 수십 번 수정하는 동안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고 선배는 탈모에 시달렸다. 선배들을 보니 랩에 계속 남아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랩을 졸업하고 취직이 잘 안 된다는 사실도, 그동안 랩을 다니다 그만둔 사람이 절반을 넘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폭언과 압박에 시달리며 1년 넘게 버틴 끝에, 지도교수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교수님 입에서 당장 “배신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연구실을 옮기면 내가 뭐가 되냐”고 했다. 연구실을 옮기는 게 그렇게 큰 죄인지 모르겠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 석사만 하고 졸업하겠다고 했다. 교수님은 집요하게 박사까지 하라고 강요했다. 나중에는 석사학위를 인질로 잡고 협박을 했다. 제1저자로 진행하고 있던 논문에서 내 이름을 빼고 동시에 학위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박사 진학을 거부하자 “극단주의자”, “인간말종” 등 험악한 말들이 쏟아졌다.
내가 연구를 하는 이유를 곱씹어봤다. 과학을 정말하고 싶었던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난 행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행복하기 힘들 것 같다. 석사도, 과학도 포기하고 그만두려 한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11/18839707395653c77e401f8.jpg)
0대학원은 인권의 사각지대인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1209개 대학원의 학생 1906명을 조사해 11월 13일 발표한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교수로부터 폭언․욕설에 시달리거나(10%), 구타를 당하는(1.2%) 학생이 있었다. 성차별(6.1%), 성희롱(3.7%), 성추행(2.0%)을 당하는 학생도 있었다.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가 14개 대학원 총학생회와 함께 전국 대학원생 23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뒤 2014년 10월 29일 발표한 ‘대학원생 연구환경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언어․신체․성적 폭력을 당한 학생이 총 31.8%에 이른다. 학생들은 왜 이런 ‘지옥의 실험실’에 제발로 들어간 걸까.
직접 선택? 대학원 정보가 없다.
먼저 학생들은 랩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올해 7월 발표한 ‘2014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제도개선 조사보고서(아래 서울대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대학원생 중 입학 전에 졸업평균연한, 장학금·일자리,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정보를 공식적인 통로(홈페이지 등)로 충분히 얻은 비율은 20% 이하였다(Plus 참조). 대부분의 랩은 연구주제·연구실적·구성원 등 연구와 관련된 정보만 공개하고 있다. 학생의 처우나 대우와 관련한 정보가 있을 리 없다. 서울대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서울대 대학원은 학생들에게 대학원 교육내용, 학위취득 소요기간, 재정조달 방법, 졸업 후 진로 정보를 공식적으로 제공하고 있지 않다. 보고서는 “정보부족은 학생들에게 불만족과 불필요한 경제적․시간적 손실을 일으킨다”면서 “대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와 사회에도 문제가 되므로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일부 대학과 일부 학과에서 실시하고 있는 랩 로테이션(연구실을 돌아가며 체험하는 제도)이나 인턴제도도 정보공개 효과가 있긴 하다. 하지만 랩을 제대로알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있다. 구태완 포스텍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포스텍 일부 학과에도 랩 로테이션이 있지만, 기간이 짧아서 랩의 속사정을 알기 어렵다”며 “랩 로테이션 기간에는 주로 연구주제와 실적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더 알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 정보 제공하는 미국 대학들
미국 UC데이비스에는 ‘대학원생 권리 및 의무장전’ 이 있다. 첫 조항이 ‘알 권리(Right to Know)’다. 대학원생은 학위 취득까지 걸리는 시간, 학생 중도이탈률 및 사유, 학위종료 후 채용기록 등의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지닌다. 존스홉킨스대, 예일대, 남캘리포니아대(USC), 위스콘신대 밀워키캠퍼스(UWM) 등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다. 존스홉킨스대 대학원 총학생회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학생의 알 권리는 대학원생 오리엔테이션 때 반드시 인쇄해 제공하도록 돼 있다”고 했다.
미국 코넬대는 홈페이지에 대학원 모든 학과의 중퇴·졸업 비율, 학위수여기간을 공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항공우주공학과는 2010년 박사과정에 8명이 입학해 2명이 1년 만에 그만뒀다. 1명은 5년 만에 졸업했고, 3명은 6년 만에 졸업했으며, 2명은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이런 식으로 재학생·졸업생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특별히 학생이 많이 그만두거나, 졸업기간이 긴 학과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코넬대 대학원 교무처장인 바바라 누스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학과장은 30여 가지 정보를 종합해 교수진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학과 발전방향을 제시한다”면서 “우리는 ‘투명성’이 대학원 과정을 건강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고 말했다. 스탠포드대, 캘리포니아대, 프린스턴대, 미시간주립대, 듀크대 등도 이런 정보를 공개한다. 미국 대학원들은 2008년부터 박사과정의 중퇴율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미국 대학원협의회(CGS)의 역할이 크다. CGS에선 미국 전체 대학원의 정보를 분석한 책을 매년 발간하고 있다.
이우창 서울대 대학원 총학생회 고등교육 전문위원은 “정보공개가 되면 문제 있는 연구환경을 학생들이 피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랩에 대한 교수진의 책임감이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11/5980951325653ca61d574c.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11/10763811785653ca9470e05.jpg)
부당해도 억울해도 탈출은 어려워
지옥의 랩을 피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탈출할 방법이 없어서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지도교수를 바꾸기 힘들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대학원에 “군사부일체라는 전통적·유교적 가치관과 도제식 교육과정의 특수성이 결합돼 있다”고 말한다. 심층인터뷰를 한 피해학생도 “지도교수 교체는 교수의 명성에 상당한 흠집을 낸다”며 “행정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지도교수를 바꾸는 학생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중립적인 위치에서 개입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우창 전문위원은 “‘인분교수’ 사태에서 장기간에 걸친 착취와 학대에도 불구하고 피해학생이 권리침해상황을 호소할 기구가 없었다”면서 “현재 대다수 대학원 행정기구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룰 권한과 역량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는 이렇게 대학․연구기관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해주는 사람이 있다. ‘옴부즈퍼슨’이다. 옴부즈퍼슨은 교수․연구자․학생에게 상담을 받고, 상담자가 원하면 문제해결에 도움을 준다. 보통 상위직급의 교수·연구자가 맡으며, 상담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우리나라에도 옴부즈퍼슨 제도를 도입한 대학이 있다. 포스텍(2012년 7월 도입)과 KAIST(2013년 9월 도입) 두 군데다.
옴부즈퍼슨을 우리나라에도 도입하자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건 최근이다. 황은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도입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교수 입장에서는, 제3자인 옴부즈퍼슨이 연구실의 문제를 지적하면 ‘당신이 뭔데’라는 생각부터 들 수 있습니다. 학생들 역시 ‘교수는 교수 편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죠. 옴부즈퍼슨은 대학과 사생활에서 허물이 없고 연구와 교육 두 측면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정중하고 사려 깊게 대화하는 기술도 있어야 하고요. 이런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KAIST에서는 현재 명예교수 2명이 옴부즈퍼슨을 맡고 있다. 그 중 한 명인 구자경 수학과 명예교수는 “옴부즈퍼슨이 일선 교수와 직접 충돌할 일은 없다”고 했다. “옴부즈퍼슨은 총장 직속기구로, 부총장이나 학장보다 서열이 높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옴부즈퍼슨은 각 부서에서 책임급 직원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구 교수에게 심층인터뷰 사례를 제시하며, 옴부즈퍼슨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문의했다. 구 교수는 “실제 비슷한 일이 학내에서 있었다”고 했다. “교수가 부당하게 논문에서 제자의 이름을 뺀 사례가 있었습니다. 피해학생의 동의를 얻어 연구윤리위원회에 제소하고 학교가 해당교수와 재계약을 하지 않게 했습니다. 학생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끝까지 추적해 보호합니다. 개중엔 지도교수를 변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11/8995492645653ce52ea9ee.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11/4332690405653ce98f086c.jpg)
중재자 둬서 지옥의 랩 벗어날 길 마련하자
옴부즈퍼슨은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다룬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교수에게도 도움이 되는 제도”라고 했다. “꼭 지도교수가 나빠서만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소통방식의 차이,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교수와 학생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교수와 교수 사이도 마찬가지 갈등이 있고요. 어떻게 갈등을 풀어야할지 모를 때, 교수도 옴부즈퍼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황은성 교수는 “옴부즈퍼슨은 대학의 연구진실성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를 할 것”이라며 “수십 년 동안 지속되면 신뢰가 쌓이고 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도입 초기부터 큰 역할을 기대하지 말고 길게 보자는 말이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옴부즈퍼슨 제도를 도입해 현재 대학과 연구기관의 핵심부서로 자리 잡았다.
옴부즈퍼슨이란 이름을 쓰진 않지만, 서울대 인권센터도 올해 7월 중재자 제도를 대학에 권고했다. 단과대학별로 교수 1~2명, 대학원 1~2명으로 이뤄진 조정위원 제도다. 서울대 인권센터는 “서울대 대학원생 76.9%가 제도 도입에 찬성했으며, 학생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학생 조정위원을 권고안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과도한 업무로 고통받는 이공계 대학원생을 찾습니다.
장시간 노동, 최저임금 미지급, 사적인 지시 등 부당한 처우를 겪은 경우 here@donga.com으로 연락주세요. 제보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