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4일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됐다. 농구공 크기에 무게가 83kg 정도인 이 위성은 이듬해인 1958년 1월 4일까지 3개월 동안 96분마다 지구의 9백km 상공에서 타원궤도를 돌면서 일정한 신호음을 지구로 보냈다.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은 ‘기술 최강국’이라는 체면을 구겼고, 공산국가인 소련에 대한 경계심과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또한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기술력이라면 핵폭탄을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발사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자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 때와 같은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들었다.
사실 스푸트니크 발사 당시 미국도 위성 발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태양 활동과 지구에 대한 관측을 실시하고 지구표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준비중이었다. 이런 계획에 따라 1955년 9월에 미해군연구소의 ‘뱅가드 프로젝트’가 채택돼 위성개발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소련에서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뱅가드 팀도 계획을 앞당겨 1957년 12월 6일 언론을 모아놓고 로켓을 발사하지만 1m 정도 뜨고난 뒤 폭발하는 참담한 결과만 얻었다. 첫 발사가 실패하자 미국은 독일 출신의 저명한 로켓과학자인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익스플로러 프로젝트’를 결성해 1958년 1월 31일에 ‘익스플로러 1호’ 위성 발사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소련은 1957년 11월 3일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 발사에 성공한 뒤였다.
이처럼 스푸트니크의 발사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미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인간의 우주탐사를 첫번째 과업으로 지시하게 된다.그 뒤 미국과 소련은 군사와 정치 분야에 이어 우주개발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