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쌓인 빗물의 양을 재는 측우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과학기구다.그러나 측우기의 과학성은 장치의 발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우량을 재고 이를 통계처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더욱 중요하다.강물의 수위를 쟀던 수표와 바람의 방향을 측정한 풍기죽 또한 우리 조상들의 과학정신이 만들어낸 기구다.
기상청 전시관에서 얼마 전까지 썼던 우량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모습이 너무나 단순하다. 동그란 통에 저울하나. 눈이나 비가 통에 쌓이면 이것을 자로 재거나 저울에 달아 높이로 환산해서 우량을 측정하는 것이다. “어젯밤 서울지방에 30mm의 비가 내렸다”라는 관측보고는 어젯밤 내내 통 속에 쌓인 빗물의 깊이가 30mm였다는 뜻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측우기(測雨器), 글자 그대로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기구’이니 오늘날의 우량계이다. 안지름이 7촌(15cm) 높이가 1척5촌(32cm)인 청동으로 만든 원통에 쌓인 빗물의 깊이를 한 자가 21.27cm인 주척(周尺)이라는 구리 자로 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문화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세종 때의 ‘측우기’를 떠올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단순한 측우기를 우리민족의 과학성을 대표하는 기구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측우기가 ‘경험을 과학화’하는 과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측우기는 마치 ‘콜롬버스의 달걀’과 같다. 그릇에 빗물이 쌓인 양을 재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세종 때까지 누구도 비를 그릇에 모아 재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종 때의 학자들은 처음으로 우량을 측정해 자연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빗물을 모으는 그릇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를 때마다 측정하고 한 달 치, 일 년 치 등의 통계를 내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측우기를 만들고 이를 전국의 관청에 설치해 각지의 우량을 측정하고 이를 보고하도록 제도화했다. 말하자면 전국의 우량통계를 낼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현재 국립기상청의 우량기록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땅 파보고 우량 측정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비 온 양을 측정할 때는 비가 온 뒤에 땅을 파 보아서 물이 스며든 깊이를 재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오늘밤 비가 내려 땅속에 스며들기를 1촌 가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토양의 상태에 따라, 혹은 비가 내린 강도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져 정확할 수 없다. 때문에 1년 중 내린 비의 총량을 계산한다거나 지난 6개월 간 내린 양을 계산하고 작년의 기록과 비교하는 일 등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올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온다, 가뭄이 들었다는 등의 짐작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측우기를 발명해서 비가 온 양을 정확히 잴 수 있게 되자 한 달 치의 통계와 1년 치의 통계가 나올 수 있고, 작년의 통계와 올해의 통계를 비교해 앞으로의 강수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결국 측우기의 과학성은 그 측정 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료의 통계적인 활용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홍수가 가장 큰 자연재해였다. 조선시대를 통해 평균 5년에 2회 정도의 큰 홍수피해가 기록돼 있다. 오늘날처럼 댐을 건설해 홍수를 조절하고 예보체계가 있어 미리 준비할 수도 없었다.
강우강도도 측정
이런 상황에서 강우는 총량뿐 아니라 시간당 얼마나 많은 비가 쏟아지는지를 나타내는 강우강도가 중요하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집중호우와 지척지척 내리는 비는 강우량은 같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상감원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보슬비부터 쏟아지듯이 내리는 폭우까지 비의 강도를 8단계로 구분해서 관측하고 기록했다. 미우(微雨), 세우(細雨), 소우(小雨), 하우(下雨), 쇄우(灑雨), 취우(驟雨), 대우(大雨), 폭우(暴雨)가 이것이다. 오늘날 기상청에서 시간당 몇mm의 비가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이 강우강도를 관측한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오면 얼마나 많은 빗물이 하천에 흘러들고 범람할 위험이 있는지를 관측했다. 오늘날 하천 교각에 수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수위가 얼마나 되는가를 보기 위해 만들어놓은 측정자이다. 한강에서도 한강대교와 영동대교의 교각에서 수표를 볼 수 있다. 건설교통부 산하 한강홍수통제소가 한강의 수위를 조절하고 예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질 때 위험수위에 이르면 이를 시민들에게 알려 피해를 최소화한다.
마찬가지로 세종 때에도 청계천의 수표교를 비롯한 여러 다리에 강물의 수위를 재는 수표가 설치됐다. 처음에 나무로 표를 세웠지만, 영조 때부터는 아예 돌에 새겨 놓았다. 이것이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수표다. 돌기둥에 10척 짜리 자를 새기고, 3척, 6척, 9척 지점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서 각각 갈수기 수위, 보통 수위, 위험 수위를 나타냈다. 9척 이상이 되면 위험수위로 청계천의 범람을 예고하고 주민을 대피시켰다.
24방위로 풍향표시
수해(水害) 다음으로 큰 재해는 풍해(風害)였다. 얼핏 바람은 생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바람의 성질에 따라 농작물은 굉장히 영향을 받는다. 강희맹(1424-1483)의 ‘금양잡록’에는 수해 다음으로 풍해가 농가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다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쉽게 구름과 비가 돼 식물을 자라게 하지만, 산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건조해서 해를 끼친다는 푄현상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특히 경기지방에서는 농사철에 영동지방을 넘어 동풍이 불어오면 작물의 잎과 이삭이 말라버리는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가장 경계했다.
때문에 관상감에서는 풍향을 매우 주의 깊게 관측했다. 측정도구는 풍기죽이었다. 긴 대나무 끝에 바람에 날릴 수 있는 총을 매단 아주 간단한 기구였다. 풍기죽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세종 때부터는 관상감에서 풍기죽을 이용해 공식적으로 바람을 관측했다.
풍향은 풍기죽 끝의 총이 날리는 방향을 보고 24방향으로 매우 정확히 측정하고 기록했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 6개의 작은 방위를 둔 셈이다. 현재 기상청의 풍향계가 16방향으로 측정하는 것과 비교하면 방향을 매우 세분해서 측정했음을 알 수 있다.
나무가 뽑히면 큰바람(大風)
풍속은 어떻게 측정했을까. 기상학에서는 풍속 측정도구가 없을 때 주변사물의 움직임으로 풍속을 측정하는 이론이 쓰인다. 뷰퍼트(Beaufort) 풍력계급은 12단계로 풍속을 분류하는 예이다. 1단계는 바람이 거의 없어 연기가 연직으로 상승한다. 2단계는 바람이 얼굴에 느껴지고 나뭇잎이 살랑거리고 풍향계가 바람에 움직인다(풍속 1.6-3.3m/초). 3단계는 깃발이 가볍게 흔들린다( 3.4-5.4m/초). 4단계는 먼지가 일어나고 종이가 흐트러지며 작은 가지가 움직인다(5.5-7.9m/초). 5단계는 호수에 물마루가 있는 작은 물결이 생긴다(8.0-10.7m/초). 6단계는 전깃줄에 ‘휭’ 소리가 나고, 우산을 쓰기 힘들다(10.8-13.8m/초). 7단계는 나무 전체가 휘어지고 바람을 맞서 걷기가 힘들다(13.9-17.1m/초). 8단계는 나무의 잔가지가 꺾이고, 걷기가 힘들다(17.2-20.7m/초). 9단계는 굴뚝 뚜껑이나 슬레이트가 날아간다(20.8-24.4m/초). 10단계는 나무가 뽑히고 건물이 파괴된다(24.4-28.4m/초). 11단계는 넓은 지역에 걸쳐 피해가 발생한다(28.5-32.6m/초). 12단계는 허리케인에 해당한다(32.7m/초 이상). 10단계 이상은 일상 생활에서 거의 경험하기 힘들며 태풍이나 허리케인 등 강력한 열대성 저기압이 있을 때 돌발적으로 발생한다.
역사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들도 뷰퍼트 풍력계급과 유사한 풍속측정법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 단계로 구분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다만 과학사학자 전상운 박사(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강우강도를 8단계로 나눈 것과 마찬가지로 풍속도 8단계로 나누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에는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大風),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폭풍(暴風)이라고 불렀다.
삭신 쑤시면 비가 온다?
현재 기상관측소에 가면 풍향풍속계와 우량계를 쉽게 볼 수 있다. 길다란 난간 꼭대기에 작은 모형비행기처럼 생긴 풍향계가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풍속계에서는 숟가락처럼 붙은 프로펠러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양동이처럼 생긴 우량계가 설치돼 있다. 풍향계가 가리키는 방향이 바람의 방향을 나타내며 프로펠러가 도는 속도를 통해 풍속을 측정한다. 또한 우량계는 안지름 20cm 지면에서 높이 20cm의 원통에 쌓인 빗물의 양을 잰다. 지금은 우량계에 자동측정장치가 돼 있어 사람이 직접 재보지 않아도 우량 수치가 통제센터에 들어온다. 이를 보면 기계 장치가 조금 더 정교해졌을 뿐 비와 바람을 측정해서 기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과학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지구 위를 돌고있는 기상위성들이 수시로 보내오는 위성사진과 레이더로 관측한 상층대기의 상태, 그리고 구름의 이동과 변화를 종합해서 얻은 자료를 슈퍼컴퓨터로 분석해 기상예측을 한다. 하지만 이런 첨단 장비들이 없다면 경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정밀한 관측과 기록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는 비가 오거나 맑은지, 폭우가 오거나 약한 비가 오는지를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에는 비가 얼마나 왔으니까 올해는 어떻게 되겠다는 예측을 할 수 있고, 동남풍이 분 다음에는 꼭 비가 온다는 경험을 통해 날씨를 예측할 수가 있다. 사실 “삭신이 쑤시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했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씀도 오랜 경험에서 배운 날씨 예측법이다. 저기압이 되면서 관절의 신경계가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그 밖에도 햇무리가 있으면 비가 온다, 노을이 맑으면 날씨가 맑다, 달무리가 지면 바람이 있다, 월색이 붉으면 가물고 달 옆의 구름이 검으면 비가 온다 등 거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법칙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바탕에는 우리 조상들의 기상을 측정하고 통계를 내서 경험을 과학화하려고 했던 과학적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