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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부는 토네이도를 잡는다

‘삐~~’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응급 환자의 심박동계가 일직선을 그린다. 환자를 살피던 안중근(이범수 분)이 다급하게 ‘심실제세동기’(defibrillator)를 움켜 쥔다. “150줄! 차지! 물러서! 샷!” 갑작스러운 전기 충격에 환자의 몸이 크게 요동친다. 여전히 일직선을 그리는 심박동계를 쳐다보던 그가 다시 외친다. “200줄! 차지! 물러서! 샷!”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주무대는 응급실이다. 시도 때도 없이 실려오는 심장마비 환자, 급박하게 움직이는 의료진, 전기 충격을 방출하는 심실제세동기는 ‘외과의사 봉달희’가 메디컬 드라마로 주목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구에서 사과 한 개 정도(1kg중=1N)의 무게를 200m 들어 올리는 에너지인 200줄(J)의 충격은 극중 환자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방송 기간에 심실제세동기에 대한 질문이 인터넷 지식공유 게시판을 가득 메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가슴 속에 부는 토네이도를 잡는다


심장을 ‘재부팅’하라

심실제세동기(心室除細動機)를 알려면 심장의 박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심장은 우심방 근처에 있는 박동원(pacemaker), 즉 동방결절이라는 근육이 만든 전기 자극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박동원의 전기 자극은 잔잔한 수면 위에 돌 하나를 던진 것 같은 파장을 만들며 심장 전체로 퍼진다. 심장마비 환자는 얘기가 다르다. 박동원 외에도 또 다른 전기 자극이 심장근육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수면 위에 돌을 여러 개 던진 격이다.

심장마비 환자의 전기 자극은 1초에 10번이나 회전한다. 1초에 평균 한 번 움직이는 박동원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자극은 여러 개로 늘어나 심실 표면을 헤집고 돌아 다닌다. 심장은 결국 파르르 떨며 ‘녹다운’된다. 심실세동, 즉 심장마비다.

‘빠른 회전’과 ‘이동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 덕분에 이 전기 자극은 ‘토네이도’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심실제세동기는 이 토네이도를 제거해 박동원이 심장을 다시 주관하도록 돕는 장비다. 심장을 ‘재부팅’하는 셈이다.

신경망동력학연구단을 이끄는 고려대 물리학과 이경진 교수는 이 토네이도의 발생과 확산 과정을 밝혀낸 인물이다. 이 교수는 지난 2004년 토네이도의 운동 패턴을 세계 최초로 분석한 논문을 물리학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게재했다. 최근 심장마비로 돌연사하는 장년층이 급증하면서 그의 연구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토네이도를 보려면 형광 염료를 사용해야 했다. 영상을 또렷이 볼 수 없었고 관찰할 시간도 부족했다. 게다가 형광 염료의 독성은 생체조직을 손상시키기까지 했다.

이 교수 연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건 토네이도를 또렷이 찍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험용 쥐의 심장조직을 얇게 펴서 막처럼 만들었다. 세포 조직은 몇 주간 생명이 지속되기 때문에 토네이도의 모습과 움직임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었다.

또 생체를 찍는 일종의 사진기인 ‘위상차 광학계’를 이용해 형광 염료가 없어도 토네이도의 움직임을 또렷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앞으로 박동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부정맥 치료제를 찾는 데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응급구조학회 자료에 따르면 한 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람은 2만5000~3만 명에 이른다. 이 교수 연구의 의미가 커 보이는 대목이다.

가슴속에 부는 토네이도를 잡는다


복잡계 이론으로 뇌까지 정복할 터

한 연구원이 심장세포 배양장비에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 농도 조건을 설정하고 있다.


이경진 교수가 토네이도 연구에 뛰어든 계기는 1995년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후연구원 시절 진행했던 ‘아메바 군집 연구’다. 일정한 규모의 아메바 군집은 상호 작용하며 슬러그(slug)라는 다세포 생물체를 형성한다. 이 교수가 연구하는 심실세동도 박동원이 토네이도의 회전에 밀려 자기 페이스를 잃는 상호 작용의 결과다. 두 연구 사이에 ‘상호 작용’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는 ‘복잡계 이론’이 상호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라고 말했다. 복잡계는 비선형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개체의 집단이다. 쉽게 말하면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물질이나 사람, 현상이 모인 세계다. 다양한 패턴을 갖는 집단이 나타나고 패턴은 주변 환경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한다. 이 때문에 복잡계 이론은 물리학과 의학, 심지어 경제학에도 적용된다.

물리학 관점에서 생물체 내부의 상호 작용을 보려 한 이 교수에게 복잡계 이론은 ‘맞춤형 이론’에 가까웠던 셈이다.

아메바 군집에서 심장의 토네이도로 이어진 연구는 최근 뇌까지 이르렀다. 복잡계 이론의 확대 적용이다. 이 교수는 신경세포망과 아교세포망의 상호 작용 메커니즘, 신경세포의 집합체인 생체 시계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원인을 밝힐 계획이다.

‘토네이도’로 심장 분야에서 한바탕 돌풍을 일으킨 이경진 교수가 뇌 분야에서 또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궁금해진다.

박동원이 만든 정상적인 전기자극이 심장을 움직인다(01).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심실 표면에‘토네이도’가 일어나 박동원을 교란시킨다(02). 심장이 부정맥에 빠지면서 기능을 멈춘다(03). 토네이도의 발생과 확산 과정을 분석하면 효과가 가장 좋은 부정맥 치료제를 찾을 수 있다(04).



물리-생물 ‘하이브리드’ 인재 급하다

이경진 교수


“한번쯤 물리의 눈으로 생물을 관찰해 봅시다” 신경망동력학연구단장 이경진 교수는 ‘바이오피직스’, 다시 말해 생물물리학에 몸담고 있다. 물리학의 관점으로 생물학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DNA가 이중 나선 형태라는 사실을 발견한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생물물리학의 시초다. 생물물리학은 생물체 안의 물질 흐름을 열역학으로 분석하거나 근육 수축을 분자 단위에서 탐구하는 영역까지 넓어졌다.

20세기 초 발달했던 양자물리학이 오늘날 전자통신산업의 기초가 됐듯이 생물물리학은 21세기 생명공학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밝은 전망에도 불구하고 생물물리학은 학과 경계가 명확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하다. 그만큼 인재를 찾기도 어렵다.

이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며 “특히 실험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물리학만 하던 대학원생들이 생물학 실험을 능수능란하게 할 리 없었던 것. 그는 “간단한 세포배양도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 놨다.

지금은 생물학을 전공한 박사급 연구원들이 있어 별 문제 없이 연구가 진행된다. 그러나 학과를 뛰어넘어 공부하는 이런 사례가 대학에서 흔하지 않은 게 걱정이다.

그는 “지도교수를 다른 과에서 선택해도 대학원생이 부담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며 “아직은 이런 문화가 자연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학제간 연구가 세계적인 추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근 우리 정부와 대학에서도 지원책이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의 조짐이다. 이경진 교수는 이젠 젊은 학생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21세기의 ‘산업 기관차’ 생물물리학이 미래 과학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신경망동력학연구단 연구원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단장인 이경진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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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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