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70%의 성공 확률이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죠.” 과기대 1회 졸업생이자 과학실험위성인 ‘우리별’ 1, 2, 3호 개발의 주역인 유상근(34) 사장의 말이다. 유사장은 인생을 개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아버님이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할 수 없이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한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식힐 수 없어 고3때 대입을 준비한다. 고려대 전기공학과에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울산전문대로 내려가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준비해 86년 처음 문을 연 과기대에 입학한다. 비교적 간단하게 서술했지만 이 기간 동안 유사장은 뼈를 깎는 고통을 경험했다. 학교에서 나오는 용돈으로 학원비를 내야했기 때문에 아침은 굶고, 점심은 라면, 저녁만 겨우 밥 한끼를 먹어야 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과기대에 들어와서는 앞만 봤다. 그러다 3학년 때 문득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의 발길을 잡았다. 그러다 얻은 결론.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아 왔다면 이제는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최순달 박사가 소형실험위성인 ‘우리별’ 제작 프로젝트를 알려준 것이었다. 주저할 것이 없었다. 짐을 싸 영국 서리 대학으로 떠나 외국의 기술을 하나도 빠짐없이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때 같이 출발한 팀이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유사장을 포함한 ‘위성꿈나무’였다. 유사장은 위성의 눈인 카메라시스템에 관한 일을 맡았다.
보람은 있어서 92년과 93년에 우리별 1, 2호가 모두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그 누구는 다른 나라 기술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99년에 우리별 3호가 발사되자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었다. ‘위성꿈나무’에 대한 투자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된 것일까. 이제는 소형위성 개발에 관한 노하우를 습득하기 위해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온 사람들로 인공위성센터가 북적거린다. 유사장이 배워 온 기술이 1회용이 아니었음이 입증된 셈이다.
사실 유사장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13년간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님을 치료해 드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우주를 향한 그의 마음은 가슴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건네준 ‘환희의 세계’란 책을 읽으면서 우주비행사나 우주과학자의 꿈을 품었다. 너무 재미있어 1백번도 넘게 읽었다. 읽는 동안만은 모든 것을 잊고 화성이나 목성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세계 무대로 뛰는 벤처의 주인공
유상근 사장은 최근에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에서 (주)세트렉아이의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별’ 개발을 담당했던 7명과 함께 벤처회사를 차렸다. 유사장은 해외시장 진출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평가한다. 그 동안 ‘우리별’을 만들면서 습득한 기술적 노하우 하나하나가 수십배 혹은 수백, 수천배의 황금알을 낳아줄 것으로 믿는다. 또 머지않아 또다른 위성도 만들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지금까지 실낱같은 가능성만 보고도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주저하면 어리석다는 것이 유사장의 생각이다.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유사장 앞에 남은 것은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고등학교때 썰렁한 도서실에 남아 연필로 써 놓은 글이 지금도 유사장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너를 알고, 너를 믿고, 그리고 너를 던져라.” 유사장에게 이것은 일종의 신앙과 같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말을 되뇌면면 다시 일어난다. 그는 알고 있다. 인공위성 연구가 순간적인 노력이나 재치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료들간의 신뢰와 끈질긴 노력,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 등이 어우러져 우주로 ‘우리별’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유사장은 이제 다시 한번 일을 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