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세계시장을 장악한 벤처기업이 많다.그 중에서도 인터넷 검색서비스를 하는 야휴는 벤처기업가라면 한번쯤 그려보는 꿈의 신화다.야휴는 어떻게 세계적인 기업이 됐으며,그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새 천년은 바야흐로 벤처기업의 시대다.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은 더 이상 대기업에 취직해 샐러리맨으로 안주하지 않는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벤처기업을 창업해 단숨에 억만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꿈꾸는 기업 모델은 마이크로소프트, 휴렛팩커드, 인텔, 제너럴일렉트릭 등 무수히 많지만, 요즘 가장 인기있는 기업을 꼽으라면 역시 야후(YAHOO!)다. 인터넷이 대중화된 1990년대 후반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등장한 야후는 매년 수백배씩 기업가치를 높이며 인터넷시대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성공스토리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야후의 창업자는 중국계 미국인 제리 양(31, 중국이름은 梁致遠)과 데이빗 파일로(33). 실리콘밸리의 중심에 위치한 스탠퍼드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들은 1994년 재미삼아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이트를 찾아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것이 인기를 끌자 본격 사업에 나서 6년만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인터넷 사용자라면 야후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대부분은 야후의 검색서비스를 애용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1999년 12월 7일, 미국 나스닥에서 야후의 주식가격은 주당 3백48달러. 3차례나 주식을 액면분할한 것을 감안하면 1995년 나스닥에 처음 상장했을 때보다 1만배 이상 주가가 치솟았다. 야후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서점인 아마존과 함께 미국 증시에서 인터넷 주가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다. 야후의 시가총액은 9백16억달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20% 수준이다. 국내 최대의 재벌인 삼성그룹의 상장사 전체 시가총액이 63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야후로 삼성그룹 전체를 사고 남는다는 얘기다. 이런 야후의 직원은 수백명에 불과하다.
찰떡궁합 친구
먼저 야후를 창업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대만에서 태어난 제리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실리콘밸리의 남부에 위치한 산호세로 이민을 간다.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낸 제리는 어렸을 때 자신을 ‘게으르고 집중력 없는 아이’로 기억한다. 그러나 머리가 무척 좋았던지 들어가기 어려운 스탠퍼드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4년만에 학사과정과 석사과정을 마친다. 졸업 후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취직할 곳을 알아보았지만 겨우 21살이었고,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는 야후의 창업 파트너가 된 데이빗을 친구로 사귀게 된다.
제리보다 2살이 많은 데이빗은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튜레인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으로 왔다. 그는 한때 제리의 조교였지만 제리가 4년 만에 석사까지 마치는 바람에 박사과정을 같이 다니게 됐다. 둘은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수업도 듣고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그런데 데이빗이 혼자서 모든 프로그래밍을 하는 바람에 제리는 쉽게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제리는 ‘앞으로 인생을 쉽게 살려면 데이빗과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는 약삭빠른 계산을 하게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성격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지만 죽이 잘 맞았다. 제리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언제나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자청하는 반면, 조용한 성격의 데이빗은 한구석에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일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둘은 1년간 낯설기만 한 일본에서 조교생활을 하면서 함께 먹고 자고, 함께 경험을 쌓는 동안 동지애를 느끼게 됐다.
1994년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스탠퍼드대학으로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은 어느날 그들의 운명을 바꾸게 될 인터넷을 본격 접했다. 제리와 데이빗은 당시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인터넷에 심취했고 자신들이 가본 사이트들의 주소를 서로 주고받았다. 모으기 시작한 사이트 주소가 점차 늘어나자 이것을 몇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었고, 그 카테고리가 더 복잡해지자 다시 하위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오늘날 야후의 기본틀이 된 ‘제리의 월드와이드웹 가이드’(Jerry’s Guide to the World Wide Web)는 이렇게 탄생했다.
야후 이름의 기원
두 사람은 이 웹 가이드를 알려주면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공개했다. 이것이 시발점이 돼 이들의 사이트는 입에서 입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PC에서 PC로 빠르게 확산됐다. 이 가이드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러가지 제안을 하는 사람,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e메일 때문에 제리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제리는 “내 이름을 내건 사이트에 들어오는 불평을 혼자 듣는 것이 억울하다”며 데이빗의 이름을 같이 넣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데이빗의 반대는 의외로 결사적이었다. 그래서 타협책으로 둘은 사전 하나를 들고 새로운 이름을 찾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다.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 중에 ‘YA’로 시작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무언가 ‘YA’로 시작한다는데에 둘은 합의했다. 마침 제리의 성도 양(YAng)이었다. ‘YAnkee, YAmmer, YAtaghan, Y-Axis’ 등 별별 이름을 다 시도해보다 불쑥 ‘야후’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야후는 알다시피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야만인을 뜻하는 것으로 아직 덜 성숙되고 세련되지 못한 그들의 사업에도 걸맞는 이름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또 하나의 굳이 참견해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Yet Another Hierarchical Officious Oracle)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하여간 이것저것 갖다붙여 이름을 짓고 마지막에 느낌표를 넣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그해 여름 ‘야후’라는 조금 생소하고 코믹한 이름의 검색 서비스를 만든 제리와 데이빗은 이를 보완하는데 그야말로 풀타임 시간을 보냈다. 박사학위논문 준비는 내팽개친지 오래였다. ‘새로운 사이트’(What’s New)나 ‘추천 사이트’(What’s Cool) 같은 버튼을 추가하면서 야후는 이용자들로부터 더욱 인기를 얻어 두 사람은 집에도 가지 못한 채 임시연구실로 사용하는 트레일러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은 밤을 새우며 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쌓이고 e메일과 전화가 빗발쳤다.
어느날 제리와 데이빗은 지도교수인 죠반니 데미켈리로부터 “더이상 스탠퍼드의 서버가 야후의 트래픽을 감당할 수 없으니 너희들의 취미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 야후의 집을 찾는 것이 이들에게 새로운 지상과제가 됐다. 뭔가 새로운 도약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무렵 언론에서는 인터넷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실렸고, 인터넷의 대중화에 기여한 넷스케이프의 시험판이 공개됐다. 이른바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리는 학교 동창이자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학생인 티모시 브레이디를 찾아갔다. 티모시는 제리의 부탁으로 겨울방학을 이용해 야후의 사업계획서를 만든 다음, 학교 근처 벤처캐피털회사와 마이크로소프트, MCI 등의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야후에 투자해주기를 요구했다. 결국 클라이너란 벤처캐피털회사, 아메리카 온라인(AOL), 넷스케이프 등 3곳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클라이너는 자신들이 투자한 서치엔진회사와 합병할 것을 투자조건으로 내세웠고, AOL은 제리와 데이빗이 자기 회사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스톡옵션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넷스케이프에서도 자기 회사에 들어와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야후는 모든 제안을 사양하고 독립노선을 걷기로 결심했다. 밤을 새워 일하더라도 어떤 일을 끝내고 맛보는 성취감이 무엇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이때 야후에게 세콰이어 캐피털의 마이클 모리츠의 제안이 들어왔다. 야후의 기획안을 받아본 마이클이 “1백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들일건지 아닌지에 대한 답을 24시간 안에 해달라”고 전해온 것이다. 제리는 “24시간이면 다음날 아침 10시인데 밤새고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무리라며 2시간의 여유를 더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제리와 데이빗은 마이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이클은 원래 약속했던 1백만달러보다 4배나 많은 4백만달러를 창업자금으로 내놓았다.
야후의 성공요인
전문가들은 “벤처기업이 성공할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벤처창업에 뛰어들지만 빌 게이츠나 제리 양처럼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후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먼저 인터넷이 대중화되는 시점에 인터넷 사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적시에 제공한 절묘한 타이밍을 들 수 있겠다. 제리는 “우리가 1995년 사업을 시작할 때 인터넷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매체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우리는 인터넷이 조만간 새 테크놀러지로 자리잡을 거라고 굳게 확신했다”고 말한다.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 이미지도 야후의 성공에 큰 몫을 했다. 우스꽝스럽고 장난기 섞인 야후의 상표를 보면서 네티즌들은 친근함을 느낀다. 야후는 설립된지 5년밖에 안됐지만 지구촌 경제인구의 50% 이상이 알고 있다. 코카콜라나 맥도날드가 ‘메가브랜드’로 자리잡는데 20년 이상 걸린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제리와 데이빗이 사업을 시작한 시점에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쟁자들이 있었다. 워싱턴주립대학에서 ‘웹크롤러’를, 카네기멜론대학에서 ‘라이코스’라는 검색엔진을 제작했고, ‘인포시크’라는 회사는 자사 웹사이트를 유료화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 검색엔진이 결코 야후보다 성능이 못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라이코스 외에는 야후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이렇다. 이들 검색엔진은 1개의 키워드만 입력하면 수십만개의 검색 결과 사이트를 찾아주는 막강한 기능을 갖고 있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많은 양의 정보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확한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검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후는 처음부터 “아무리 웹을 기술적으로 운영한다고 해도 마지막 손질은 인간이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야후는 지금도 디렉토리를 정리할 때 야후 서퍼를 고용해 이들이 각각의 웹사이트 내용을 검토한 후 적절한 카테고리로 분류해 정리한다. 첨단 인터넷산업이지만 그 사이트를 야후에 소개할 것인지의 마지막 판단은 인간의 머리와 손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불필요한 사이트는 제외됐다. 이는 “야후에 접속하면 빨리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용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많은 인터넷 회사들이 앞다투어 복잡한 홈페이지를 만들 때 야후는 거꾸로 접속이 빠른 단순한 홈페이지를 꾸민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야후는 자유분방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야후코리아 염진섭사장이 해외지사장 모임에 갔을 때였다. 염사장은 ‘한국적 관행’을 떠올리고 깨끗하게 다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 나갔지만 그 자리에 정장을 입고 온 사람은 염사장 뿐이었다. 미국 야후에서는 영업사원조차 청바지를 입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한다.
야후는 회사이름 만큼 직원들의 호칭도 자유스럽다. 제리의 회사내 호칭은 ‘추장(Chief) 야후’이고 데이빗의 호칭은 ‘싸구려(Cheap) 야후’이다. 홍보담당자는 ‘PR 디버’(오페라 주연 여가수의 이름), 엔지니어는 ‘테크니컬 야후’, 정보검색을 하는 사람은 ‘야후 서퍼’ 하는 식이다. 직원들은 모두 ‘과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계급적인 호칭을 쓰지 않고 저마다 외부 고객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스스로 만든다.
이처럼 자유스런 분위기가 야후에 창의력을 불어넣고 있다. 직원들이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재미있게 일하니까 업계 1인자로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야후의 성공에는 운도 따랐다. 인터넷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넷스케이프의 인터넷 디렉토리 버튼에 야후가 곧바로 연결돼 있어, 넷스케이프 사용자는 자연스럽게 야후 이용자로 넘어올 수 있었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가 1980년대 초 IBM PC의 운영체제로 채택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업계 표준이 된 것처럼.
그러나 1996년 겨울 넷스케이프는 “인터넷 디렉토리 버튼을 더 이상 야후에게 할애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야후가 넷스케이프에 무임승차해 성장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야후에 들어오는 사용자의 20% 이상이 넷스케이프를 통해 들어왔기에 이 소식은 호흡이 곤란한 환자에게 인공호흡을 중지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후는 넷스케이프에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사정했으나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야후는 자력갱생의 길을 걷게 됐는데,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이것도 야후에 행운으로 작용했다. 당시 인터넷 웹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넷스케이프는 이제 마이크로소프트의 익스플로러에 밀려 더 이상 야후의 후원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제리와 데이빗이 창업했지만 현재 야후를 이끌고 있는 인물은 이들만이 아니다. 야후의 최초 사업계획서를 써준 티모시 브레이디, 엔지니어인 도날드 로보, 제리와 데이빗이 일본에 머물 때 사귄 스리나자 스리니바산도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버지니아대학을 수석졸업하고 모토롤라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은 티모시 쿠글은 최고경영자(회장)로서 뒤늦게 합류했다. 쿠글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사내에서는 이름의 앞자를 딴 ‘TK’(탱크같은 사람)로 불린다. 사장은 제프 맬럿.
제리는 회사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야후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전략을 짜고 있다. 이처럼 창업자가 회사경영에 시시콜콜 관여하지 않고, 회사규모가 확대되면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기술은 엔지니어에게, 마케팅은 마케팅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미국식 벤처기업의 성공모델이다.
또하나 야후의 성공에서 부러운 점은 야후를 창업한 제리 양이 대만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제리의 부인은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에 만난 일본계 코스타리카인 아키코이다.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동양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한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라면 이처럼 인종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벤처기업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세계 어느 민족이나 자유스럽게 기업활동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