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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 엔지니어 우리기술을 세계에 팔며

사막의 나라 사우디에서 벤츠 도요타 GM 등 세계유수의 차종과 겨뤄 기술과 신념으로 당당히 이겨낸 세일즈엔지니어의 성공담

88년 10월1일 사우디 리야드로 향하는 비향기내에서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모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고 가족을 떠난 혼자 1년을 지내야할 생각을 하면 착잡하기도 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내 어느 영업소의 소장으로 있다가 사우디 파견근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우디의 전(前)중앙은행 총재가 우리회사 자동차 대리점을 하기 위하여 신규법인을 설립하였다는 것과 현지 도착 후 쇼룸(show room)을 만들고 정비공장을 짓고 부품창고를 설치해야 되며, 차량판매 및 애프터서비스가 원활히 될 수 있도록 조직원을 훈련 시키고 지도한다는 것이었다.

직책이 영업소장이고 대학에서의 전공이 기계공학이고 말한다면 아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현재는 공학도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 자신이 정확히 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우디에 도착한 것은 이틍날인10월2일 새벽 2시였다. 현지 대리점에서 미리 정해준 숙소에 여장을 풀고 대리점 사장으로부터 그때까지의 친척 상황을 들었다. 리야드 젯다 담맘 3지역의 지역책임자가 채용되어 있었고 경리 관리부서가 부서장을 포함하여 근무에 임하고 있었다.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인력송출회사에 의뢰하여 정비 및 부품요원도 모집중에 있었다.

간부진과 함께 시장분석에 착수하여 조직의 힘과 운영력을 리야드 40%, 젯다 40%, 담맘 20%로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정비공장용 기계 장비 공구 등을 발주하는 한편 부품창고용 건물을 3개 지역에 확보하였다. 부품 저장용선반을 구매설치한 후 정비공장 장비설치를 위한 레이아웃(layout)을 하면서 애프터서비스용 부품발주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무척 바쁘게 모든 것이 움직였다. 아침 8시에 출근하면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여 밥을 지어 먹고 나면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계속됐다. 다른 나라에서 채용되어 온 직원들이 오후 1시부터 4시까지의 휴식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오후 7시에 퇴근을 하루 8시간 근무를 지키고 있어 속으로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우디의 리야드에서 열린 자동차국제박람회에 르망을 출품해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 오일왕국에 자동차를

그러던 어느날 본사로부터 텔렉스가 날아왔다. 1차 완성차 주문분 중 1백50대가 선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정비공장의 장비들은 현지에서 구매하여 설치하였으나 쇼룸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고 부품창고의 선반설치도 완료하지 못한 채 11월을 맞게 되었다. 11월5일이면 담맘항구에 완성차가 도착한다. 리야드 젯다 담맘을 돌며 점검하고 독려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에 서울에 있는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침식엔 불편이 없느냐는 걱정이 우선이었고 그리고는 도착했으면 잘 도착했다고 전화라도 해줬어야 되지 않았겠느냐는 질책과 아울러 집안일이 궁금하지도 않느냐는 원망이었다. 듣고 보니 두고온 아내와 부모님에게 죄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이하랴 전화나 편지 한번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그러나 이 전화받을 때까지 집 떠나온지 한달이 넘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일에 미쳐 있었다고나 할까? 따로 어떻게 변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 "미안하오. 자주 전화할께"로만 대답하였으나 그 약속은 이후에도 2개월 정도는 역시 지켜지질 못했다.

그 당시 사우디에시 벌려놓았던 일들은 전에 내가 해본 경험이 없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는 분명 도전이었으며 이에 따라는 약간의 두려움―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몹시도 일에 골몰하게 만들었다.

1차 주문한 부품이 도착하였고 부품창고도 3군데에 모두 완성되었다. 인도 및 파키스탄에서 부품요원들이 도착하였는데 경력이라고는 부품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모아 놓고 부품의 저장관리방법에 대한 교육을 마친 후 3개소로 나눠 배치시켰다. 필리핀에서 30여명의 기능직 정비사들이 도착하여 이들에게 우선 장비사용법에 대한 교육을 하고 본사로부터 지원받은 직장급 정비사원에게 실제 정비업무를 교육받도록 하였다.

드디어 11월21일 개어식을 가졌다. 본사로부터 사장님이 오셨고 사우디대사였던 최호중대사(현외무부장관)께서도 참석하여 주셨다. 이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생한 것에 대한 보람도 있었지만 우리 회사만의 차량판매를 위한 쇼룸이 세계 유수의 벤츠 도요타 GM 등의 쇼룸에 못지 않게 넓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니 흡족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은 지금부터다'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품시장을 조사하고 부품판매 가격을 책정해야 되고 각종 정비료율을 만들어야 한다.

●― 벤츠와 르망의 대결

자동차 판매가 시작되었다. 신문과 TV광고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쇼룸을 찾아왔다. 그러나 판매는 예상외로 부진하였다. 판매사원들의 말로는 고객들이 "한국차가 왜 이렇게 비싸냐?"는 말만 남기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판매부장 및 지역책임자들이 나에게 찾아와 "대우에서 수출가격을 대폭 낮추어야 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한국제품인 H사의 1천6백cc급은 2만2천 사우디리얄인데 르망(현지에는 레이서로 불리고 있음) 1천5백cc급은 3만4천 사우디리얄이니 도저히 팔 수 없는 가격이라는 것이었다. 사우디에서의 차량 판매가격은 정부에서 15% 이내의 마진을 포함하여 결정하여 주고 있다. 마진을 포함하여 결정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대리점 마진을 0%로 하여도 도저히 H사의 가격에는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동급 차종인 도요타의 코롤라 가격 역시 추가조건(옵션)에 따라 3만3천∼3만5천리얄까지로 되어 있고 실제 판매에서는 르망보다 싸게 팔고 있는 실정이었다. 본사로부터 더이상 수출가격을 낮출 수 없다는 통고는 이미 받은 바 있다. 이런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될까? 포기할까? 문득 국내 영업소 직원들과의 일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얼어붙은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겨울의 밤 12시에 의욕과 신념에 차 있던 그들…. 그들이 이곳에 함께 왔다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사우디대리점의 직원들은 11개국에서 모여든 외인부대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 팔 수 있다는 신념이다. 판매는 전쟁과도 비교되지만 신념이 없이는 판매할 수가 없다. 내가 파는 상품이 내가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팔 수 있겠는가? 가격은 품질에 비례하는 것이다. 국내 영업소장으로 일하면서 느꼈던 체험을 바탕으로 영업사원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벤츠와 시보레는 어떤 차가 더 큰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왜 소형인 벤츠 200이 18만리얄인데 차체도 크고 엔진 용량도 큰 시보레의 가격은 6만4천리얄이겠는가? 품질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르망의 품질은 일본 차종과는 비교될 수 없이 높고 일부 품목들은 벤츠보다 품질이 높다고 포인트를 맞추었다.

차체의 도장방법, 도장 후 시험방법, 시험결과치 비교 등을 설명하고 우리가 판매하는 차종의 차체도장이 벤츠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강조헸다.

교류발전기는 35년전 GM이 개발하여 전세계 기술을 보급해 왔는데 이제는 우리가 GM에 기술을 역수출하고 있으니 우리가 세계 최고이고 벤츠도 우리로부터 이 기술을 사가게 될 것이란 점 등등.

이외에 몇가지를 더 예를 들어 교육하였다. 나의 결론은 르망이 고품질이므로 더 비싸게 받아야 되는데 사우디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낮게 책정된 가격이라는 것이었다.

예상은 적중하였다. 영웝사원들이 고객에게 자신감을 갖고 끈질기게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판매량은 이에 비례해서 늘어났다. 3차로 선적되어온 차량까지 순조로이 판매가 되어가 있었으나 88년 12월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 4차 선적분이 들어오지 않은 채 금년 5월까지는 판매할 차가 없었다. 본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사우디 TV뉴스에 방영되는 것을 몇번 보았다. 여유가 생겨 부품판매가격 정비요금 등을 시장에 맞게 조정할 수 있었지만 이때 같이 노조가 미운 적이 없었다.
 

세일즈 엔지니어
 

●― 몰랐던 것이 오히려 행운

왜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판매를 하게 되었으며 사우디까지 가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회가 주여졌으니 공학도들의 인생설계에 대해 나름대로 겪었던 과정을 소개해본다.

학창시절에 전공과목 중의 하나가 자동차공학이었던 것이 자동차회사를 선택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기회가 있다면 내연기관에 대하여 연구하고 싶었고 설계도 하고 싶었다. 강의시간에 엔진동역학실험 배기가스분석 등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대학 4년을 마치고 회사업무 대해서는 까막눈인 채로 이사시험을 거쳐 부서배치를 위한 면접에까지 이르렀다. 면접에서 희망부서를 물어와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본사 기술부서로 배치하여 주십시오"라고 대답한 것이 서비스부(현재는 정비부)로 발령을 받게 됐고 이것으로 직장에서의 역할이 결정되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일순간의 말 한마디가 인생행로의 갈림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부서배치를 받았을 때 "나는 기계공학도이지 무엇을 서비스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리숙한 나였다. 당시 본사(서울)에 있는 기술부서는 판매분야에 속해 있는 서비스부 한군데 뿐이었으므로 나의 희망대로 된 것도 모르고 큰소리쳤던 것이다. 회사의 조직에 대해서 부서배치 이전에 상세히 문의하였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설계부서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생각하면 당시 자동차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선배가 있어 부서배치에 대해 상담하였더라면 역시 나는 정비분야를 희망하였으리라 추측된다. 1973년 입사하여 한 회사에서 16년 이상을 근무하여 오면서 아직 한번도 후회해본적 없고 일에 싫증이 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재미까지 느끼면서 근무해왔다. 그러니 부서배치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 나에게는 새옹지마의 결과가 되었다고나 할까?

●― 기술과 신념을 무기로

자동차를 생산 판매하고 있는 회사에서 그동안 설계부서 정비 수출 그리고 국내판매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 같이 일하면서 여러가지로 관찰할 기회를 충분히 가져왔다.

설계부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그곳에서 쇽업소버(shock absorber, 충격완충장치)를 담당하게 되었다면 아마, 과장이 될 때까지는 쇽업소버만 설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설계를 변경하고 또 다른 차종의 것을 설계하는 데 모든 정력과 인내를 솓아넣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속업소버에 관해서는 내가 1인자다"라고. 그러나 지금의 내 안목으로는 그것은 비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쇽업소버인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비분야와 판매분야는 틀리다. 정비분야에서는 때로 문제된 품목에 대하여 깊숙히 설계분야까지 파고들기도 하고, 포괄적으로 자동차 전체구성품에 대하여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일하고 배울 수 있다. 판매분야는 더 넓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회 각 분야의 어둡고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으므로 인간을 통해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는 판단력이 빠르게 몸에 익혀진다. 물론 상품이 자동차이니 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항상 유리한 위치에서 상품을 다룰 수가 있는 이점이 있다. 수출이든 내수판매든 상품을 정확히 설명하고 변경을 요구할 때 명쾌히 대답할 수 있으므로 판매분야에서 엔지니어들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고객들이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폭넓게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세일즈맨은 더욱 피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점에서 자동자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대단히 유리하다. 더구나 해외에서 외국의 자동차와 경쟁을 할 때는 우리 기술을 정확하게 바이어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제품의 신뢰도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 서비스부에 배치된 후 정비기술업무를 맡았는데 주로 취급설명서와 정비지침서를 만드는 일이었고 새로운 정비기술을 개발 보급하는 업무였다. 이후 보증업무와 정비교육 등을 맡아서 일하다가 수출이 시작되면서 해외 대리점에서 요청하는 정비공장 레이아웃 및 시설설계 등을 하게 된 것이 해외 플랜트 수출에 연관되어 자동차 조립공장 수출을 위한 일에도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맡는 동안 타당성검토를 위해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지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았다. 자타가 인정하는 세일즈엔니어로서 외국에서든 국내에서든 자동차에 관련된 것이면 모든 것을―그것이 완성차이든 녹다운(knkckdown, 반제품형식의 수출)방식이든. 정비공장이든 조립공장이든―자신있게 판매하기 위해서 고된 수련을 해왔다. 이러한 자신감의 근저에는 대학졸업 후 자동차회사를 직장으로 선택하고 오로지 한우물만 파기 시작한 것이 좋은 방향으로 결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해 연말 송년회에서 대학은사인 노(老)교수께 응석어린 투로 "교수님 말씀만 믿고 한우물만 파는데 파도파도 물은 나오지 않고 힘만 듭니다. 이젠 회사를 옮겨봐야 할까봐요"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의 대답이 "그래도 계속 더 파봐.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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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병근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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