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나라의 지도자를 내려준다고 믿으며 하늘을 소중하게 섬긴 사람들이 신화에 등장하는 우리의 겨례 조상이다.유형의 증거가 없기에 이들이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알 수 없다.다만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영혼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와 다르다.
‘잘돼도 조상탓, 못 돼도 조상탓’이라는 말이 있다. 조상은 오늘 당장 다급한 현실에서도 길흉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요 동기라는 느낌을 준다. 무당의 온갖 굿에는 으레 ‘조상 거리’가 껴들어 있어 조상에게 빌지 않고서는 나머지 어떤 신령에게 빌고 울고 해봐야 소용없다고 느껴진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조상이란 언제든 ‘살아 있는 존재’다.
개인이나 가족에게 조상이 이와 같거니와 하물며 겨레 조상쯤 되면 더 말할게 못된다. 특히 그것이 신화를 통해 탐구될 때, 위엄과 영광 그리고 무엇보다 성스러움에 넘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태초의 얘기
하지만 겨레 조상이면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시절에 한반도와 그 북부의 대륙, 예컨대 아무르강 주변 땅은 물론이고 조금 더 멀리는 바이칼 호수 언저리까지 뻗칠 수도 있을 시베리아 동북부의 대륙에 살던 분들이다. 철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지나고도 모자라 아스라이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는 온전히 겨레 조상의 영상을 떠올릴 수 없다. 연어의 모천 회귀는 쉬워도 우리들의 조상 회귀는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의 ‘자기증명’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이 난감한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반드시 우리 문화의 원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화가 조상회귀를 위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신화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시작에 관해서는 큰소리 칠만하다. 왜냐하면 신화는 ‘시작의 시작’에 대해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동화가 “옛날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에…” 라고 시작하면서 우쭐댄다면 그것을 사뭇 귀엽게 내려다보게 될지도 모를 것, 그게 곧 신화다. 신화는 자그마치 “옛날도 아주 옛날, 시간 있기 이전의 까마득한 옛날에…” 라고 말머리를 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신화를 ‘태초의 얘기’ 또는 ‘역사 비롯하기 이전의 얘기’라고 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상상할 수 있을 조상의 모습이 우리와 전혀 다른 별종의 것인 양 미리 짐작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사뭇 오래전 분들이라서 그 겉치레며 겉치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생활에 걸쳐서 오늘의 우리와 엄청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 방식, 행동양식 그리고 이들의 바탕에 있을 정신이며 정서의 상태까지도 영영 별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먼저 고조선신화에서 겨레 조상들의 삶의 터전을 짚어보자. 고조선에서는 무엇보다 ‘신시’(神市)가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하늘에서 천신이 내리는 높은 나무가 솟은 산언덕이 있고, 바로 그곳을 에워서 고조선 사람들은 신시를 이룩했다. 그 나무를 신단수라고 했는데 이를테면 신내림의 나무인 셈이다.
신시는 후세의 마을에서 서낭나무 아래 당집을 짓고 거기를 마을 굿터나 광장, 나아가서 지리적, 정신적 중심지로 삼은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오늘날 농촌 사람들이 굿터에서 신내림을 받아 굿을 올리고 이어서 온마을 안을 판굿의 현장으로 삼을 경우, 그것이 단군신화에서 벌어졌을 신시의 광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다.
하늘을 으뜸으로 섬기고 산 사람들,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다스릴 사람이 하늘이 내려보내리라 믿고서 그것을 신앙이며 우주관, 그리고 윤리관의 요체로 삼은 사람들이 곧 고조선 신화가 그리는 우리의 겨레 조상이다.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왕
이 점은 ‘가락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가락신화에서 가락의 백성들은 고조선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을 위해서 나라를 열고 다스릴 분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준비했다. 한데 이 맞이굿을 하는 자리에서 백성들은 “거북아 거북아, 모가지를 내어라, 아니 내면 구워 먹어버리겠다” 라는 좀 으시시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거북이 목이 나타나듯 신이여 나타나소서’ 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같이 인간의 어떤 의도의 실천을 노리는 행동을 주술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결과를 빚어내리라’ 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것을 ‘유사법칙의 주술’이라고 한다.
이 유사법칙의 주술이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으니, 바로 대학입시 현장에서다. 남의 대학 대문에다 엿이며 떡을 붙여대는 학부모로서는 자식의 대학붙기나 떡이며 엿의 대학붙기가 마찬가지다. 자! 이 정도면 우리는 구지가를 부른 신화적 조상과 오늘의 학부모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하늘과의 내왕, 이를테면 우주여행을 한국신화는 현실이듯이 그려내고 있다. 고구려의 둘째 왕인 유리는 한국 역사상 우주왕복 여행을 한 ‘최초의 우주비행사’다. 그는 나무 창틀을 타고는 하늘에 날아오르되, 자그마치 해와 맞닿기까지 올랐다가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고려의 문인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널리 알려진 ‘영혼의 우주여행’과 직접 관련된다.
하늘의 뜻을 받아 와서 지상에 전하고 실천하는 자가 곧 샤먼(무당)이자 왕이라고 당대 우리네 조상들은 믿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유리왕의 아버지 동명왕과 할아버지인 해모수도 각기 우주여행을 한 것으로 고구려 신화에는 언급돼 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늘과 인간의 직접 거래가 능히 실천될 수 있다고 믿고서 그에 맞추어 통치자인 왕의 성격이며 소임을 생각해낸 사람들, 그리고 역시 그에 맞추어 종교며 신앙체계를 빚어낸 사람들, 아울러 그에 적응할 수 있게 이념이며 윤리의식, 그리고 가치관들을 창조한 사람들. 이들이 바로 우리네의 신화적인 겨레 조상이다.
이들에게 우주는 커다랗게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는 공간이다. 하늘 따로 땅 따로가 아니다. 자연 별도고 인간 생활 별도인 방식의 ‘조각난 공간 의식’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우주나 대자연은 거대한 유기적 조직체였다. 무엇보다 인간 영혼에 의해서 그 유기성이 지켜진다고 믿었다. 엄청난 영혼관이 여기 있다. 오늘 우리의 영혼과 신화적 조상의 영혼은 결코 같지 않다. 우리네 영혼은 우리 육신 속에 가두어져 있지만, 겨레 조상의 영혼은 우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우리들의 영혼이 육체영혼이라면 조상들의 영혼은 우주영혼이다.
물증보다 정신이 중요
또다른 예로 울주 암벽화에 그려져 있는 ‘날으는 새 사람’(鳥人)을 살펴보자. 이 어마어마한 암벽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청동기시대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이 바위 그림에는 사지를 날개처럼 편 사람 모양이 그려져 있다. 자신의 몸통을 한마리 새처럼 날려서 하늘을 내왕할 수 있는 모습이다.
신화를 통해 우리의 조상을 회고할 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물증이 아니다. 유물이나 물리적 유적이 신화에서 찾아질 턱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이같은 정신의 흔적을 두고서 유물처럼 가령 청동기시대라든가 석기시대라든가 하는 식으로 시대를 못박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제든 현대에 되살아나서 우리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