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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주시대를 개막한 아마추어위성 우리별

지금은 이름이 잊혔지만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이 있었다. 1985년에 설립됐다가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사과정으로 통합된 대학이다.

원래 이 대학의 설립을 추진했던 곳은 노동부.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은 공고를 졸업한 산업계의 기능공들이 계속해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산업기술대학을 설립하라고 노동부에 지시했다. 공고 출신인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공고 졸업생들의 학력 콤플렉스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서독 정부로부터 9백만마르크(약 45억원)의 원조가 들어와 설립자본 마련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1984년 대덕단지에서 한참 땅을 다지고 있던 산업기술대학은 날벼락을 맞았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추진하던 한국과학기술대학과 중복투자라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통합된 한국과학기술원에는 원래 석·박사과정은 있어도 학사과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병역 혜택이라는 꿀사탕을 보고 서울대 등에서 학사과정을 마친 우수한 인재들이 늘 모여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각 대학에 석사장교제도가 도입되자 과학기술원에 오려는 학생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이때 과학기술원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학사과정을 만들어 과학영재를 흡수한 다음 이들을 고스란히 넘겨받는 안이었다. 그런데 이 후발 과학기술대학이 선발 산업기술대학을 삼키고 만 것이다. 우여곡절 속에 설립된 과학기술대학에는 과학고에서 조기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이 특차로 진학했고, 새로운 영재교육의 요람으로 발전했다.

1985년 한국과학기술대학의 초대학장으로 부임한 사람은 최순달 박사. 그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81년 대구공고 동창인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소장,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장관,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일해재단 초대이사장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과학기술대학 학장 이후에는 과학계의 돈줄을 쥐고 흔든다는 한국과학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최순달 박사가 과학기술대학 교수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89년. 그에게는 남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포부와 뚝심이 있었다. 아마추어의 힘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겠다는 것.

최순달 박사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던 1969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트추진연구소(현재 미항공우주국(NASA)의 주요 연구기관임)에 들어가 6년 동안 인공위성 개발에 참여한 바 있었다. 그러기에 인공위성 개발에 관해 조금은 안다고 할까. 그런데 1989년 초 체신부가 방송통신위성(훗날 무궁화위성이 됨)을 쏘아올린다는 소식이 들리자 최 박사는 걱정이 앞섰다. 외국에서 인공위성을 구입해 쓰면 쌓이는 노하우가 없고, 우리 기술로 개발하기엔 연구개발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최박사는 과학기술대학에서 그가 해야할 일은 인공위성 개발 꿈나무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순달 박사에게는 수완이 있었고 과학기술대학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있었다. 1989년 9월, 그는 1차로 과학기술대학 조기졸업생 5명을 선발해 영국 서리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인공위성에 관련된 기술을 기초부터 배워오자는 뜻이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서리대학인공위성(UOSAT) 5호를 준비하고 있어 위성기술을 습득하는데는 절호의 기회였다. 유학비는 이듬해부터 3년 동안 영국회사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30만달러. 당시에는 그 돈이 없었기 때문에 외상유학이었던 셈이다.


인공위성연구센터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우주개발 분야에서 연구 인력을 개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90년 최순달 박사가 한국과학기술원 내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하자, 과거 그와 인연을 맺었던 체신부, 과학기술처, 그리고 과학재단 등이 1백억원에 가까운 돈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젊고 우수한 인공위성 개발인력을 기른다는데 그보다 반가운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인공위성센터에서 서리대학으로 보낸 유학생이 12명에 이르렀다.

1991년 과학기술대학(1989년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통합됨) 출신의 유학생들은 서리대학의 기술을 지원받아 인공위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크기는 50×50×80cm3, 무게는 50kg 밖에 안되는 작고 아담한 위성이었다. 이 위성은 1992년 8월 11일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기지(아리안로켓 발사기지로 유명한 곳)에서 발사됐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우리별 1호’는 1천3백km 상공의 태양동기궤도(항상 인공위성이 태양을 바라보는 궤도로 태양전지의 발전에 도움을 줌)를 돌기 시작했다.

막상 우리별 1호가 지구궤도를 돌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의외의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기술, 우리 부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우리별이라니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별 1호는 ‘남의 별’이란 웃지못할 별명을 달고 다녔다. 이는 우리별을 쏘아올린, 약관을 겨우 넘긴 연구원들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은 곧바로 우리별 2호의 개발에 착수했다. 비록 모델은 우리별 1호와 같았지만, 그것을 설계하고 조립하는 일을 우리 힘으로 이뤄냈다. 그러나 남이 하는 것을 볼 때는 쉬웠지만 직접 해볼 때는 어려움이 많은 법. 우리별 2호를 개발하는데 부품을 국산화하는 일이 커다란 장애로 다가왔다. 외국에서 사오는 것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가, 채산성이 맞지 않아 국내 기업들이 선뜻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뜻있는 기업들이 나서 일부 부품을 국산화하는데 겨우 성공했다. 두번째 우리별은 1993년 9월 26일 우리별 1호가 탔던 아리안로켓을 타고 다시 지구궤도로 올라갔다.

우리별 2호가 올라간 다음 인공위성연구센터에는 길고 긴 가뭄이 닥쳤다. 무궁화위성과 같은 실용위성은 우주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별 3호가 웬말이냐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소형위성은 개발해봤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예산이 끊어져 우리별 3호의 개발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인공위성연구센터가 활기를 띤 것은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항공우주연구소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을 수립할 때 우리별 3호의 개발 필요성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2015년까지 19기(우리별 1,2호 제외)의 위성을 쏘아올리자면 인력개발이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무궁화위성 1호(1995년 8월 5일 발사)와 2호(1996년 1월 14일)의 발사를 앞두고 있어 국내기술에 의한 인공위성 개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인공위성연구센터는 그동안 통합문제로 관계가 서먹했던 항공우주연구소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가며 1, 2호와는 전혀 다른 우리별 3호를 개발해냈다. 우선 위성의 무게가 50kg에서 1백10kg으로 커졌고, 설계, 부품제작, 조립 등을 거의 국내기술로 이뤄냈다. 마침내 우리별 3호는 1999년 5월 26일 인도 남동부에 있는 샤르기지에서 인도 PLSV로켓에 의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그리고 현재 한반도 구석구석의 사진들을 찍어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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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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