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 속에서 8천만년이나 잠을 자던 공룡들이 깨어나고 있다. 몽골 고비사막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룡알 둥지가 발견되고, 프로토케라톱스, 오비랩터 등 수많은 공룡화석들이 잘 보존된 곳. 우리나라 학자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공룡화석 사냥터인 고비사막에서 공룡화석을 발굴하면서 겪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1900년대 초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 관장이던 헨리 오스본은 포유류가 신생대 초인 팔레오세(6천5백만년 전 - 5천5백만년 전)에 다양하게 진화했다는 사실에 기초해, 포유류는 중생대 백악기(1억4천4백만년 전 - 6천5백만년 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포유류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미국자연사박물관장 앤드루스를 팀장으로 하는 첫 아시아탐사대가 구성된 것은 1921년. 이들은 8대의 자동차와 1백50마리의 낙타를 이끌고 사막을 횡단하면서 1930년까지 몽골 고비사막지역을 탐사했다. 그러나 처음에 의도했던 중생대 포유류화석보다 공룡화석을 더 많이 발견했고,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공룡알 둥지를 발견하는 등의 개가를 올렸다. 공룡알 둥지의 발견은 공룡이 파충류나 새처럼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화석으로 입증한 것. 이때부터 몽골 고비사막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몽골지역은 1946-1949년 옛소련 과학원에 의해 공룡탐사와 더불어 상세한 지질조사가 이뤄졌고, 1963-1971년 폴란드팀에 의해 수많은 귀중한 화석들이 발견됐다. 물론 현재도 여러 국가들의 공동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1990년부터 미국자연사박물관팀이 다시 탐사를 수행하면서 매우 귀중한 발견을 했고, 이를 토대로 의미있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몽골 고비사막의 중요성은 완벽한 화석보존에 있다. 예를 들면 북미에서 중생대 포유류의 연구는 주로 낱개로 발견되는 이빨에 의존해 왔다. 반면 고비사막에서 발견되는 포유류 화석은 머리뼈뿐 아니라 전체 골격이 완전하다. 중생대 포유류의 전체길이가 10cm 미만임을 생각할 때 이렇듯 완벽하게 화석이 보존됐다는 것은 과거 이 지역이 화석 보존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발견되는 공룡화석 역시 죽음의 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고비사막은 척추고생물학자들이라면 한번쯤 가고 싶어하는 화석탐사의 낙원이다.
몽골은 면적이 한반도의 7배나 되는 큰 나라다. 북서쪽은 우랄알타이산맥의 끝자락으로 산악지대이고, 남동쪽은 사막지대이다. 중생대 후기백악기의 지층은 주로 남부고비사막에 분포하고 있는데 크게 세개의 층, 작톡하(Djactokhta)층, 바룬고욧(Barun Goyut)층, 네메겟(Nemegt)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 층들은 8천7백만년 전부터 6천5백만년 전까지 바람에 의해 강과 호수에 쌓인 퇴적물들로, 공룡과 악어, 거북, 포유류 등 다양한 육상척추동물의 화석이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1996년 6월 14일 - 7월 19일 필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비사막에서 직접 공룡탐사를 수행했다. 당시 몽골, 중국, 일본 등의 국제공동 공룡탐사팀이 결성된 것은 동북아시아의 공룡 분포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조사해 궁극적으로 아시아의 공룡 진화를 밝히자는데 있었다. 몽골팀장은 몽골자연사박물관소장 린첸 바스볼드 박사, 중국팀장은 북경 척추고생물고인류연구소의 지밍 동 교수, 일본팀장은 후쿠이현박물관장 요이치 아주마 박사였다. 필자는 아주마 박사의 요청으로 일본팀으로 참가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과학원 지질연구소에서 5일 동안 탐사준비를 한 다음, 두대의 소련제 군용지프와 세대의 군용트럭에다 50일분의 식량, 텐트와 탐사장비, 2천8백L의 경유를 실었다. 탐사팀은 세명의 몽골인 트럭운전사를 포함해 모두 17명.
죽음으로 몰고간 공룡 싸움
길도 없는 초원지대를 이틀 동안 계속 달려 도착한 첫번째 야영지는 투그리크. 몽골의 화폐단위인 ‘투그리크’와 이름이 같은 이곳은 지형적으로도 동전처럼 둥그런 분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바람에 의해 형성된(eolian) 퇴적층인 작톡하층이 분포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화석들이 산출된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화석들은 약 8천만년 전 모래폭풍에 의해 갑자기 묻혀 화석화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대부분의 화석들은 산출상태가 완벽하고, 죽었을 때 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프로토케라톱스와 벨로시랩터가 서로 죽기살기로 싸움을 벌이다 화석화된 것이다. 벨로시랩터는 날카로운 앞발톱으로 프로토케라톱스의 배를 찢고 있고, 프로토케라톱스는 필사의 몸부림으로 벨로시랩터의 앞발을 물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화석은 현재 몽골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화석을 가진 지층이 해변의 모래처럼 부드러워 간단한 손도구만으로도 쉽게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암석의 고화도는 그 지역이 어떤 지질사(地質史)를 겪어왔는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백악기 지층인 경상누층군의 암석들은 단단하게 고화돼 암석용 망치, 끌, 다이아몬드 톱, 심지어 크레인이나 굴착기 같은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조건에 비하면 이곳은 발굴하기가 너무 쉬운 곳이었다.
메리 맨텔이 1822년 우연히 이구아노돈의 이빨을 발견하면서 공룡화석의 발견은 시작됐지만 지금까지도 공룡화석을 찾는 방법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화석의 발견은 전적으로 암석표면을 조사하는 지루한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층 속에 묻혀있는 화석은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지층이 자연적인 풍화나 도로 건설과 같이 인위적으로 암석을 지표로 노출시켰을 때만 발견이 가능하다. 탄성파 등의 지구물리학적 방법을 이용해 땅속에 묻힌 뼈의 존재 유무를 알아내려는 노력과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나 실제로 화석탐사에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지층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뼈화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훌륭한 공룡탐사가가 되기 위해선 세심한 관찰력, 많은 야외탐사 경험, 공룡뼈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꼭 필요하다.
지표를 빠진 부분 없이 관찰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계곡을 훑어 내려가는 것으로 탐사는 시작된다. 공룡을 묻어버린 지층들이 바람과 비에 의해 조금씩 풍화돼 8천만년의 시간을 깨고 지표로 노출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화석들이 8천만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잠시 거쳐가는 우리의 눈에 발견된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만약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귀중한 화석들은 풍화되고 있는 지층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투그리크의 한 계곡을 따라 뼈의 잔해를 찾아 헤매다 프로토케라톱스의 아래턱 부분이 반쯤 노출돼 지표 위로 삐죽이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뼈의 색깔은 하얀색으로 모래 색깔의 지층과 쉽게 구별됐다. 8천만년인 지층의 나이를 생각할 때 지층의 고화도나 뼈의 상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일반적으로 중생대 공룡뼈의 색깔은 오랜 기간 지층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화석화작용을 받아 색이 변하고 단단한 암석처럼 고화되기 마련이다. 화석화작용이란 뼛속으로 광물질이 침전되거나 뼈성분이 다른 물질로 치환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화석은 본래의 무게보다 무겁고 단단해져 현생의 뼈와 쉽게 구별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서 발견된 뼈들은 현생의 뼈처럼 가볍고 심지어 색깔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발견된 뼈는 주위부터 조심스레 파서 묻혀있는 전체 뼈의 크기를 확인한다. 발견된 프로토케라톱스의 머리뼈는 뒤집혀 지층 속에 박혀있는 상태였다. 주위에 몸뼈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은 후 머리뼈가 분리돼 이곳에 묻힌 것으로 판단됐다. 아래턱 주위를 조금씩 파들어 가자 아래턱과 굳게 물려있는 위턱의 이빨들이 보였다. 프로토케라톱스의 머리뼈가 가진 특징인 얇은 프릴(머리뼈 뒤에 확장된 판 모양의 뼈) 부분은 일반적으로 파손되기 쉬운데 이것은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었다. 그 완벽한 보존상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발견된 머리뼈의 길이는 63cm, 폭은 50cm였다.
발견된 화석 골격은 묻혀있는 상태와 규모에 따라 발굴부터 운반까지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먼저 노출된 뼈들은 쉽게 부서지므로 PVA(폴리비닐 아세테이트를 아세톤에 섞은 접착제)를 뼈표면에 바른다. 이 접착제는 아세톤으로 인해 쉽게 뼛속으로 스며들고, 아세톤이 증발하면 PVA가 뼛속에서 굳어 뼈를 강화하게 된다.
다음 일은 화석의 위치를 지형도와 야외노트에 기재하는 것. 화석의 상태, 방향, 그리고 화석을 함유하고 있는 지층의 여러가지 지질학적 내용을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나중에 실험실에서 화석을 처리하고 복원할 때 이용되는 매우 귀중한 정보들이다.
일단 기재가 끝나면 안전하게 화석을 운반하고 보관하기 위해 석고를 씌운다. 팔이 부러졌을 때 병원에서 석고로 팔을 씌워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이치와 똑같다. 뼈를 포함한 암석 덩어리를 석고로 씌우기 전에 중요한 것은 화석 표면을 물에 적신 두루말이 화장지로 덮어 뼈와 석고가 직접 붙는 걸 방지하는 일이다. 석고를 씌울 때 석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종종 두꺼운 천이나 마대자루를 잘라 길게 띠를 만들어 석고 속에 넣기도 한다. 이는 석고붕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야외에서 만들어진 표본은 실험실로 옮겨진다. 우리가 작업한 표본은 1백50kg 이상의 무게를 지닌 채 계곡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야영지로 옮기기 위해 두꺼운 밧줄로 표본을 묶어 트럭으로 계곡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려야 했다. 석고 표본의 크기는 화석의 크기에 비례하므로 커다란 화석을 발굴할 경우 크레인과 같은 중장비를 동원하기도 한다.
사막의 모래폭풍
드디어 탐사팀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작업 도중 모래폭풍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의 모래폭풍은 보통 시속 60-80km의 속도로 휘몰아친다. 캠프로 강타하는 모래폭풍을 피하기 위해 차량으로 텐트 주위를 둘러쌌지만 강한 바람에 텐트가 국기처럼 펄럭거렸고, 점점 모래 속에 묻혀 갔다. 결국 텐트를 빠져나와 찻속으로 피신해야 했다. 자칫하면 공룡들처럼 모래에 묻힐 판이었다.
모래폭풍은 점점 더 심해져 거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모진 바람은 3일간 계속됐다. 먹는 음식에서 모래가 버석버석 씹히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를 털어내기 바빴다. 눈뜨기조차 힘들자 한 친구는 재빠르게 자기 안경에 테이프를 감싸 사막용 안경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우리들은 나흘동안 총 8개의 거의 완전한 프로토케라톱스 골격을 발견했다. 프로토케라톱스는 북미지역에 잘 알려진 트리케라톱스의 조상으로 가장 원시적인 뿔공룡이다. 뿔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지만 이 그룹의 특징인 머리 뒤의 프릴이 잘 발달돼 있다.
며칠 후 필자를 포함한 5명의 대원은 트럭 한대에 몸을 실고 투그리크 베이스캠프로부터 남서쪽으로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자민혼드를 탐사했다. 그곳에서는 부서진 많은 공룡알 파편들이 발견됐다.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걷어내자 이미 풍화돼 반쯤 깎여 나간 지름이 약 60cm인 공룡알 둥지가 나타났다. 세어보니 12개의 타원형 공룡알이 동심원상으로 배열돼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표에 노출된 둥지의 윗부분은 이미 풍화됐지만 지층 속에 박혀있는 나머지 부분들은 완전하게 보존돼 있었다. 둥지의 완전한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일단 가장 잘 보존된 공룡알 한개를 조심스레 둥지에서 분리해 보니 그 아래에 깨어지지 않은 완전한 알들이 촘촘히 묻혀있는 것이 보였다. 공룡알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앤드루스가 처음 고비사막에서 발견한 공룡둥지의 알과 같은 것이었다. 과거 이러한 형태의 알들은 프로토케라톱스의 알로 생각됐으나 최근 같은 형태의 알들을 품고 있는 오비랩터가 발견됨에 따라 알의 주인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다.
돌아오는 길에 트럭이 고장나 우리는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시간이 저녁 6시 30분.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구조대가 우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트럭 주위에 불을 피웠다.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7시간, 마침내 새벽 1시경에 우리는 구조돼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투그리크 베이스캠프에서 북쪽으로 약 5km에 위치한 알락테그는 투그리크와 달리 다양한 공룡들이 산출됐다. 이곳에서는 갑옷공룡 피나코사우루스(Pinacosaurus), 오리주둥이공룡, 목긴공룡이 발견됐다. 1982년에는 7마리의 새끼 피나코사우루스가 캐나다-중국 공룡탐사팀에 의해 발견된 적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목긴공룡의 발견이었다. 지금까지 몽골에서는 두 종류의 목긴공룡이 네메겟층에서 보고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톡하층에서 발견한 것은 몽골에서 세번째로 발견되는 목긴공룡이며, 또한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도 오래된 것이었다. 발견의 시작은 지표에 노출된 3개의 척추뼈였는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두마리의 새끼 목긴공룡이 함께 묻혀있음이 확인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머리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전갈과 흡혈 진드기
투그리크 베이스캠프를 떠나 네메겟 분지로 향했다. 1920년대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팀이 고비사막 탐사에서 사용한 주요 운반수단은 낙타였다. 깊은 모래 때문에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이런 곳에서는 무용지물로 느껴지게 된다. 네메겟으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러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사막은 더 많아지고 이동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만큼 트럭이 지프를 끌고 가야 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네메겟층에서 잘 알려진 공룡화석은 타보로사우루스(Tarborosaurus)이다. 최근 이것은 북미의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속임이 판명돼 티라노사우루스 바타르(Tyrannosaurus baa-tar)라는 새로운 종으로 이름지어졌다.
네메겟 지역에서는 갑작스레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소나기가 지나간 계곡은 금세 강으로 변하고 계곡에서 쏟아지는 흙탕물은 텐트를 덮쳤다. 투그리크 캠프에서는 모래폭풍을 맞더니 네메겟 캠프에서는 물난리를 겪었다. 또 이곳에는 전갈들이 텐트 주위를 돌아다녔고 수박씨만한 흡혈 진드기가 대원들을 괴롭혔다.
두말할 필요없이 사막지역에서 물은 생명수다. 12개의 커다란 물통을 싣고 차로 6시간 이상 걸리는 인근 유목민 마을에서 물을 길어왔는데, 그나마 휴대용 정수기로 걸러 꼭 필요할 때만 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워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음식은 유목민들에게서 구한 염소와 양을 잡아 아무 양념 없이 물에 삶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 사막에서 신선한 야채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비위생적인 음식과 비타민 부족으로 대원들은 늘 배탈과 설사에 시달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긴 꼬리의 거북, 오비랩터의 머리뼈, 악어, 티라노사우루스의 골격 등 많은 화석을 찾아냈다. 특히 오비랩터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기 때문에 완전한 머리뼈를 찾은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이번 탐사에서 발굴한 화석들은 현재 중국의 척추고생물고인류연구소에서 뼈를 추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뼈의 처리가 끝나면 본격적인 학술 연구가 시행되어 흥미로운 결과가 밝혀질 것임에 틀림없다.
몽골 국제공룡탐사는 필자에게 아쉬움 또한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지 못하고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대학이나 자연사박물관에서 국제공룡탐사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지원해 우리가 연구한 공룡을 국립자연사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