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우리나라 SF는 서구에 비하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각국의 SF 시장 규모가 그 나라의 경제 수준을 반영한다는 SF계의 속설에 비춰보면, 한국은 아직도 후진국인 셈이다. 대중 문학에 대한 편협한 시선과 미미한 투자로 인해 한국 SF는 다소 기형적으로 자라났다. 전업작가도, 전문 비평가나 편집인도 없는 상황에서, 국내의 창작 SF는 영세한 출판사가 단발성 작품을 내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작자들은 대개 공대생이나 연구원, 혹은 저널리스트들로, SF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과학적.사회적 통찰력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과 아마추어 수준의 구성력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는 SF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하드 SF(엄밀한 과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한 SF)보다는 그 하부 장르인 테크노 스릴러, 가상전쟁 시나리오 등의 소위 인기 장르에서 해외의 베스트셀러들을 답습한 것들이 상당수였다.
90년대에 양적 팽창
이 글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의 창작 SF를 분류하고, 간단히 정리했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이러한 분류는 순전히 편의적인 것이고, 작품 수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각 장르의 구분도 모호한 데가 많다. SF의 정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는 ‘과학적 상상력과 형식논리를 토대로 한 문학’이라고 넓게 정의했다.
90년대 중반 들어 전반적인 사회 개방과, 환타지 소설의 상업적 성공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SF 출판도 양적으로 팽창한다. 우선 ‘퇴마록’이나 ‘드래곤 라자’는 비록 수백만부가 팔리긴 했지만, 과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작품이 아니므로, SF라고 볼 수 없다. SF에서도 초능력이나 심령학을 소재로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관점은 과학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환타지와 SF의 경계는 그다지 뚜렷하지는 않다. 외국에서도 두 장르를 넘나들며 글을 쓰고 있는 작가들이 많고, 권위 있는 SF상인 네뷸러상을 환타지 소설이 수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에 출판된 김상현씨의 ‘탐그루’(1999)와 현재 3권까지 출판된 이경영 씨의 ‘가즈나이트’(1999)가 이 경계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내용상으로는 ‘탐그루’가 보다 SF 쪽에 가깝고, ‘가즈나이트’가 보다 환타지 쪽에 가까우나, 흥미롭게도 ‘탐그루’와 ‘가즈나이트’의 저자는 그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SF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가즈나이트’와 같은 경우는, 평행우주(parallel world)를 다룬 SF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평행우주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는 다른 고유의 물리법칙을 지니고 있는 우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 가상전쟁 소설
한편 일반 독자들이 SF라고 생각지 않지만 실상은 엄연히 SF인 소설들이 있다. 대체역사소설(alternative history novel)도 그 중 하나인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설정 하에서 역사를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복거일 씨의 ‘비명을 찾아서’(1987)가 대표적인 예이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계속되고 있다고 가정한다. 최근에는 고원정 씨가 ‘대한제국 일본침략사’(1994)라는 출판연재소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뒤집어놓은 내용이다. ‘대한제국 일본침략사’는 10권까지 나온 뒤 중단되었다가 ‘횃불‘이라는 제목으로 재집필돼 출판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SF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상 전쟁 혹은 가상 정치 시나리오들이다. 이러한 소설들도 SF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가상전쟁 소설은 예측불허의 한반도 정세라는 훌륭한 소재, 톰 클랜시의 ‘붉은 폭풍’과 같은 작품의 성공,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다 군사전문가(?)가 되는 우리나라 현실 등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 가상전쟁·정치 소설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선 직전의 특수(特需)를 노리거나, 한일간의 무력충돌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이렇다할 문학적, 대중적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주목할만한 작품으로는 고원정 씨의 ‘마지막 대권’(1997), ‘최후의 계엄령’과 윤종석 씨의 ‘파이어 데이’(1995) 등이 있다.
작가들 전문가 지식 갖춰야
다음으로 90년대 초반부터 마이클 크라이튼과 로빈 쿡 등 소위 테크노 스릴러 붐에 편승해 쏟아진 한국적 테크노 스릴러들이 있다. 테크노 스릴러 역시 SF의 가장자리 쯤에 위치한 장르이다. 이를테면 로빈 쿡의 ‘코마’, ‘아웃브레이크’,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 톰 클랜시의 많은 소설 등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SF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돌연변이’, ‘쥬라기 공원’ 등은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기술을 상상해 쓰여졌으므로 SF이다. 우리나라의 테크노 스릴러들은 주로 유전공학이나 해킹 등의 첨단분야를 소재로 했다. 그러나 이 장르에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전문가적 지식이 부족해 어설픈 흉내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최근의 삼양 제넥스 생명공학연구의 정년철씨가 쓴 ‘헤테로’(사계절)는 탄탄한 구성력과 해박한 전문지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종호씨의 ‘피라미드’(1999) 같은 소설은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이런 소설들은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는 ‘우주 활극’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SF의 하위 장르이다. 자세하고 엄밀한 과학적 고증이나 설정보다는 오락성, 스토리 전개에 치중하는 장르이다. ‘은하영웅전설’이나 ‘스타워즈’를 떠올려보면 금방 감이 잡힐 것이다. 사실 이 장르는 과학소설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현실 등을 다룬 소설들은 사이버펑크로 분류할 수 있다. 최근 인터넷과 사이버 스페이스에 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면서 소설들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들이 많아졌다. 원래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로서, 1983년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이후 나타난 SF의 새로운 경향을 말한다. 사이버펑크 소설들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기술이 발달한 근미래의 사회상과 문제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사이버펑크라고 해서 모두 가상현실이나 사이버스페이스를 다루는 것은 아니고, 그 역도 참이 아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SF 중에서 해킹과, 근미래의 테크놀로지를 다룬 소설들을 이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소설 푸대접하는 국민정서
그러나 우리나라 SF들은 브루스 스털링이나 윌리엄 깁슨 등의 ‘원조’ 사이버펑크 작품들과는 정서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아직까지 인간소외 문제 등 사이버펑크 고유의 혼돈스럽고 암울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이것은 사이버펑크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히피, 펑크 문화가 우리나라에는 한번도 제대로 도입된 적이 없다는 점과, 지난 30여년간 엄격한 과학기술만을 인정해온 국민적 정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나라에서 과학소설이 이토록 푸대접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출판대국이자 비정상적으로 많은 문학동인이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SF 잡지는 한권도 없으며, SF가 분명한데도 책 광고에는 “이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다. 10년 안에 다가올 우리의 현실이다” 따위의 모순적인 문구가 들어가기도 한다.
소설을 포함한 모든 문화상품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별안간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있고,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SF는 다른 대중문학 장르보다 더 수준 높은 독자를 요구하며, 독자와 작가 간의 피드백이 빠른 장르이다. 작가의 자기 계발도 중요하지만 독자의 수준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한 면에서 출판시장보다는 오히려 주목해야 할 움직임이 인터넷과 PC 통신망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4대 통신망에서 약 5천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그룹과 웹진들이 있다. 창작과 비평분야에서 외국 못지 않게 많은 글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특히 아마추어 모임인 ‘한국 SF 협회’에서 내년 2월을 예정으로 ‘제1회 한국 SF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http://www.koreacon.org). 이 대회가 SF에 대한 인식 변화와 동호인의 저변 확대는 물론 우리나라 SF의 수준을 한단계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