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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인은 왜 SF에 매달리는가

알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류는 크게는 자연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작게는 자기 집의 헛간 속에 이르기까지 눈길이 닿지 않거나 알 수 없는 모든 영역에 이런 허구적 형상물들을 지어내고 관계를 설정하려고 시도해왔다.

많은 허구적 형상물들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의적인 성격을 갖는 형상물도 많다. 가령 우리나라의 민담에 등장하는 허구적 형상물들은 인간에 대해 비적대적이며, 공포보다는 외경(畏敬)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적절한 구획선을 넘지 않으면 (산신령을 노하게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거북을 놓아주면) 오히려 인간을 도와주기도 한다. 이때 초자연력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무엇이 된다. 따라서 민담에 등장하는 괴물의 모습은 그 문화가 자연과 맺는 관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SF는 현대의 민담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상황이 바뀌었다.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과 함께 공존하지 못하게 됐고 인간이 개발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더 이상 자연에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 남지 않고 단지 개발을 기다리는 곳만 남게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신비함을 모두 잃은 것처럼 생각됐다. 따라서 전통적인 민담이 들어설 여지도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SF, 특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SF 영화는 전통적인 민담을 대신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SF에서 ‘괴물’이나 ‘침입’이 빈번한 주제가 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외계인의 침입은 ‘화성인 침공’ 이래 단골 메뉴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도 변형을 거듭하고 있다. 침입은 문화, 또는 문명에 대한 침입, 지구에 대한 UFO와 외계인들의 침입에서 시작해서 인체에 대한 침입으로까지 발전한다.

침입 주제는 과거 전통적인 민담에서 미지의 대상으로 자연이 차지하던 위치를 외계인이나 우주가 대신하는 경우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세기말 현상과 결합해서 확산되고 있는 UFO 신드롬은 과거 자연을 대상으로한 정령신앙의 현대판인 셈이다.

침입 주제의 또하나의 측면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과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과거에 민담에서는 동물이 사람으로 변장하거나 사람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주제로 삼아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다. 현대판 민담에서는 로봇,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등이 이 역할을 대신 떠맡고 있다. SF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요소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킹콩’ ‘대괴수 용가리’ ‘고질라’ 등의 몬스터 무비, ‘에일리언’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Body Snatchers) 등의 침입주제 작품들,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연작에서 ‘블레이드 러너‘ ‘론머맨’ ‘오토매틱’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을 다룬 숱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주제의 비슷비슷한 SF 소설이나 영화들이 조금씩 줄거리를 달리하면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딱히 답을 주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나오고, 사람들은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즐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대개 알쏭달쏭한 느낌을 갖지만,우리는 다음번에도 비슷한 주제의 영화를 또 보러갈 것이다(물론 항상 표면적으로는 ‘무슨무슨 새로운 효과’ ‘새로운 배역’으로 포장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민담이 갖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디스토피아와 SF

SF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SF소설이나 영화는 왜 디스토피아의 모습만을 그리는가? 사실 유토피아를 다룬 SF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특히 최근에 발표된 작품들은 하나같이 암울하고 어두운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선 유토피아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무릉도원의 이미지는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을 꿈꾼다. 그에 비해 서양의 유토피아는 과학기술을 통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삼는다. 유명한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뉴 아틀란티스’(1627)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미래의 과학기술이 가져다줄 온갖 경이로 가득차 있다. 그중 몇가지만 예로 들자면, 하늘을 나는 기계(비행기), 먼 거리까지 소리를 전하는 관(전화), 초속성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토지, 표준보다 크거나 작게 만들어낸 동물과 과일(유전공학), 멀리까지 가는 강렬한 광선(레이저) 등이 있다. 실제로 이중 상당수는 수백년이 지나서 실현됐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은 과학기술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독가스, 원자폭탄과 같은 고성능 무기들은 그 이전의 전쟁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더구나 얼마전부터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지구적 위기로 다가오면서 과학기술이 인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가 허물어지고 유토피아의 미래는 디스토피아의 미래로 바뀌게 됐다.

‘예측 불가능’이 가장 큰 공포

오늘날 SF들이 한결같이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하는 중심적인 주제는 ‘쥐라기 공원’에서 잘 나타났듯이 과학기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던 살충제 DDT나 냉매 CFC는 당시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쥬라기 공원’에서는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공룡들이 도심으로까지 뛰어드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오늘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장담하는 과학기술이 내일 어떻게 판가름될지 모르는 불확실성, 그리고 과학기술이 없이는 한시도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사회가 통제불능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외계인보다도 무서운 공포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주제의 소설과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해 계속 경고를 받고싶어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워링’(최첨단 건물), ‘타이타닉’(최첨단 선박), ‘차이나 신드롬‘(핵발전소)을 비롯한 수많은 재난 SF영화들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첨단과학기술의 불확실성이다. 오늘날 SF는 알려지지 않음, 통제되지 않음의 가장 깊은 공포를 과학기술 자체에서 찾아내고 있다.

최근의 SF들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전혀 예상치못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며 현재의 과학기술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통제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인간스러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한 정체성 위기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의 반복은 현대판 민담으로서의 SF가 과학문화에서 맡는 중요한 기능이다.

199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박상준 SF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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