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가 지닌 오묘함은 자신의 모습을 후세에 전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생명복제(증식)는 무생물과 달리 생물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생명복제의 신비는 1953년 제임스 왓슨(1928-)과 프란시스 크릭(1916-)이 DNA(디옥시리보핵산)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히기 전까지 풀리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생명복제가 피를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을 두고 ‘피를 물려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부모의 형질이 피를 통해 전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어 문화권에서 귀족을 ‘blue blood’라고 일컫는 것도 유래는 같다. 1859년 ‘종의 기원’을 썼던 진화학자 찰스 다윈(1809-1882)조차 이러한 생각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는 두마리의 동물이 짝짓기를 하면 혈액이 합쳐져, 이를 통해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물려진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19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지적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승인 그레고어 멘델(1822-1884)이었다. 그는 1856년부터 7년 동안 완두콩 교배실험을 통해 씨앗마다 어떤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경우 잡종이 나오는지를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농사꾼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체계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유전은 피가 섞이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뤄지지 않음을 증명했다.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키 큰 완두콩과 키 작은 완두콩을 교배하면 중간 크기의 완두콩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멘델의 실험에서는 중간 크기의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부모 중 한쪽의 형질만 물려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인간에게 확대해 보면 갈색 눈을 가진 아버지와 푸른 눈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는 중간색의 눈을 가진 자녀가 나오지 않음을 알려준다.
멘델은 부모로부터 각각 유전자(gene, 그리스어로 ‘자손을 낳는다’는 뜻)의 절반을 받기 때문에 자손은 부모와 같은 유전자수를 갖게 되며, 유전자의 우열에 따라 유전형질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멘델의 제1법칙). 그렇다면 유전자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이뤄졌을까. 또 유전자는 어떤 방법으로 자손에게 유전형질을 전달할까. 이러한 비밀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멘델 이후 1백여년에 걸친 긴 탐구여행을 떠난다.
단백질이냐 핵산이냐
유전을 결정하는 것이 세포핵 속에 들어있는 염색체라는 것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독일의 발생학자 바이스만(1834-1914)이었다. 그는 1880년대에 현미경을 통해 요충의 세포가 분열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 과정에서 세포 내에 있는 작은 실(염색질)들이 뭉치면서 염색체가 되고, 이 염색체들은 두배로 증식한 다음 다시 둘로 나뉘어 새로운 두개의 세포(딸세포)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10년 미국의 유전학자 토머스 모건(1866-1945)도 흰색눈을 가진 초파리 돌연변이를 연구해 염색체가 유전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모건은 이 공로로 193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모건의 제자인 허먼 멀러(1890-1967)는 1927년 초파리 염색체에 X선을 쬐어 인공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써 스승의 연구를 뒷받침했다. 그 역시 1946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1924년 염색체가 단백질과 핵산(DNA와 RNA)이란 두 물질로 이뤄졌음이 밝혀지면서 유전연구는 다시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유전자가 단백질과 핵산 중 어디에 들어있는지를 가려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단백질 쪽에 손을 들었다. 복잡한 유전형질을 전달하려면 단순한 핵산보다 수천종에 이르는 단백질이 더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1944년 록펠러의학연구소의 오스왈드 에이버리(1877-1955)가 DNA가 유전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1920년대부터 당시 최대의 질병이었던 폐렴을 연구해왔는데, 이를 옮기는 감염성 박테리아(S형)가 비감염성 박테리아(R형)를 변환시켜 감염성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DNA가 관여함을 밝혀낸 것이다. 같은 무렵 영국의 유기화학자 알렉산더 토드(1907-1997, 1957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DNA가 인, 염기, 당(디옥시리보)으로 이뤄졌으며, 염기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으로 이뤄졌음을 밝혔다.
유전자가 DNA 안에 들어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바이러스에서 발견됐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증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살아있는 다른 세포 안에 들어가 증식한다. 이때 바이러스를 이루고 있는 단백질과 핵산(DNA) 중 어느 것이 다른 생물의 세포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연구한 학자가 있었다. 바로 롱아일랜드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의 앨프리드 허시(1908-1997)였다.
허시는 1952년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인 파지(박테리오파지)가 박테리아에 감염될 때 핵산인 DNA만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단백질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핵산인 DNA가 유전물질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처럼 핵산인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연구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여전히 DNA처럼 단순한 물질이 어떻게 복잡한 유전형질을 전하겠느냐며 반신반의했다. 결국 DNA의 구조를 밝혀 복제 메커니즘을 설명할 도리밖에 없게 됐다.
1백년만에 풀린 생명복제의 신비
2차대전 이후 미국 생물학계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과학자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인디애나대학의 살바도르 루리아(1912-1991)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막스 델브뤼크(1906-1981)도 그런 사람들이다. 루리아의 고향은 이탈리아 토리노. 유대인이었던 그는 일찍 고향을 떠났다. 델브뤼크의 고향은 독일. 양자역학을 전공한 후 카이저빌 헬름연구소에서 연구하다가 나치스의 횡포를 보다못해 미국으로 왔다. 두 사람은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는데 뜻을 모았다(이 결과로 두 사람은 1969년 허시와 함께 노밸생리의학상을 수상함).
그런데 루리아는 바이러스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화학적 구조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51년 제자인 제임스 왓슨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캐번디시연구소로 보냈다. 자신이 직접 화학공부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화학구조를 연구할 때 만능도구로 사용되고 있던X선 회절법 분야에서 세계 제일이었다. 특히 캐번디시연구소는 X선 회절법을 이용해 결정구조를 연구하는 방법을 찾아내 191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던 로렌스 브래그(1890-1971)가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왓슨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막스 페루츠(1914-, 1962년 노벨화학상 수상)가 X선 회절법을 이용해 고분자 단백질인 헤모글로빈 결정을 연구하는 팀에 소속됐다. 그곳에서 그는 12살 위인 프란시스 크릭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크릭은 원래 양자역학을 공부했던 물리학자다. 그런데 2차대전에 참가하던 중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슈뢰딩거(1887-1961,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 (1944)를 읽고 감명받아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꿨다. 생명의 본질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슈뢰딩거의 저서는 당시 생물학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왓슨 역시 슈뢰딩거의 저서를 읽고 유전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던 터라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게다가 유전자는 DNA 안에 있을 거라는 크릭의 생각은 왓슨에게도 공감되는 바가 컸다.
이들보다 앞서 DNA를 연구했던 선구자는 뉴질랜드 출신의 모리스 윌킨스(1916-)였다. 그는 맨해튼계획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로, 전쟁이 끝나자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서 바이러스와 핵산을 연구했다. 그리고 윌킨스 곁에는 로절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라는 뛰어난 여성 물리화학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DNA의 X선사진을 찍어 DNA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었다.
왓슨과 크릭의 관심은 DNA가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을까 하는 것. 그런데 두사람을 결정적으로 돕는 두가지 연구결과가 나왔다. 하나는 DNA의 염기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였다. 1950년 오스트리아 생화학자인 에르빈 샤가프(1905-)는 각종 DNA 염기를 조사한 결과 아데닌분자의 수는 티민 분자의 수와 같고, 구아닌분자의 수는 시토신분자의 수와 같음을 알아냈다. 이 사실은 아데닌과 티민이, 구아닌과 시토신이 짝을 이룸을 뜻한다.
또 하나의 연구결과는 DNA의 구조를 알려줄 수 있는 상세한 X선회절 사진이었다. 이것은 1952년 프랭클린이 제공했다. 그동안 왓슨과 크릭은 DNA의 구조가 3중나선 구조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도 DNA를 복제하기엔 이가 맞지 않았다. 프랭클린이 제공한 X선회절사진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여기서 두사람은 DNA가 이중나선구조일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보이지 않는 행운도 따랐다. 경쟁자였던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 프랭클린의 X선회절사진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폴링은 당시 이온구조화학 분야에서 1인자였다. 양자이론을 화학에 적용시켜 오비탈이론을 세웟으며, 1950년에는 단백질의 나선구조를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DNA 구조가 나선모양일 것이라는 확신 속에 상당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1952년 프랭클린의 X선회절사진이 공개된 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1953년 DNA가 3중나선구조라는 잘못된 논문을 쓰고 말았다. 당시 미국 정부는 사회주의자이자 반핵주의자였던 폴링이 영국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1953년 4월 25일, 폴링이 잘못된 논문을 발표한지 두달 후 왓슨과 크릭은 DNA 이중나선구조에 관한 논문을 완성해 영국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실었다. 왓슨은 이 논문에서 "DNA 구조가 이중나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로제타스톤(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단서가 됐던 돌)을 발견한 바와 같다"고 말했다. DNA이중나선구조는 멘델 이후 1백여년 동안 풀려고 노력했던 생명복제의 신비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이후 DNA 염기들의 배열순서에 따라 유전자가 결정되며, 1조 분의 6g밖에 되지 않는 DNA에 10만개에 이르는 유전정보가 들어있다는 것이 연구결과 밝혀졌다. 멘델이 예언했던 유전자는 DNA라는 목걸이에 진주처럼 박혀 있었다.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연구를 위해 X선회절사진이란 결정적이 자료를 제공했던 프랭클린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백혈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한편 살았어도 노벨상 수상자의 수를 3명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여성인 그가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왓슨은 자신의 자서전인 '이중나선'(1968)에서 프랭클린을 이렇게 애도했다. "여성은 심오한 이론에 지쳤을 때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존재로만 생각하기 쉬운 과학의 세계에서, 그녀와 같이 고도의 지성을 갖춘 여성이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가 불치의 병을 알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고차적인 연구에 헌신적인 정열을 기울였음을 우리는 너무도 늦게 알았다."
한편 왓슨, 크릭과 경쟁을 벌였던 폴링은 1954년 분자구조와 화학결합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1962년 반전(反戰)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