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6대 진평왕의 선왕인 진지왕은 죽은 후 혼령이 돼 생전에 좋아하던 도화녀(桃花女)와 관계해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비형이 15세에 이르자 밤마다 귀신들과 놀러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진평왕은 비형의 기행을 듣고 그에게 신원사 북쪽에 다리를 놓게 했다. 비형은 귀신 무리를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완성했다. 어느 날 귀신들 중 하나가 여우로 변해 달아나버리자 비형은 이를 잡아 죽였다. 이때부터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됐다. 또한 민가에서는 비형이 귀신을 꾸짖는 글을 붙여놓고 귀신을 쫓았다.
‘삼국유사’의 비형 이야기는 우리나라 도깨비 이야기의 원조로 꼽힌다. 도깨비는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뚝딱 놓는 신통력이 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 도깨비는 나쁜 귀신을 쫓아주는 고맙고 친근한 존재다. 조상들은 문고리 장식을 비롯한 각종의 생활도구에 도깨비 문양을 새겨 악귀를 쫓았다. 절이나 궁궐의 석물이나 난간, 자물쇠, 문고리 등에서는 무섭고도 익살스러운 모습을 한 도깨비를 많이 볼 수있다. 또한 도깨비를 따라가 도깨비 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이며, 욕심 많은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를 속이려다가 혹을 하나 더 붙였다는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나 친근하다.
인화수소의 자연발화
도깨비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깨비 불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도깨비불 이야기가 나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더니 동쪽에서 불이 비치고 떠들썩하여 사냥꾼들이 사냥하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좌우를 삥 두른 것이 5리나 되는데 모두 도깨비 불이 었다. 하늘은 흐려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살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도깨비불이 나타난다. 하나가 여럿으로 흩어졌다. 빙 돌다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다시 합쳐졌다가 쫓아가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도깨비에 홀려 씨름을 하다 깨어보니 빗자루를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며, 도깨비를 넘어뜨렸더니 부지깽이였다는 이야기에도 도깨비불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으스스한 도깨비불을 과학에서는 어떻게 볼까.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이 인화설이다. 인(P)의 자연발화를 도깨비불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인 화합물인 인화수소류(PH3, P2H4 등)는 공기중에서 쉽게 자연발화된다. 숭문고의 전석천 교사는 도깨비불은 더운 여름날 상한 고기나 썩은 수풀에서 순간적으로 인 화합물이 피어올라 불이 붙는 현상이 아닐까 설명한다. 액체로 된 인화수소는 보통 온도에서도 저절로 불이 붙는다. 어둠 속에서 인화수소 수용액을 스프레이로 뿌려주면 흡사 도깨비불 같다. 사람의 시체가 썩었을 때도 인화수소가 생기는데, 이것이 무덤 주변에 도깨비불이 나타나는 이유일 수 있다.
오줌 끓이다 발견
인은 1669년 독일의 브란트가 연금술을 시험하는 도중 발견했다. 그는 오줌을 증발시키고 난 걸쭉한 액체에 모래와 숯을 넣고 강하게 가열했다. 그러자 바닥에 남은 물질은 공기중에서 흰 연기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또한 이 물질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을 내 책을 읽을 수있을 정도였다. 브란트는 인의 자연발화와 인광 현상을 관찰한 것이다.
인광 현상은 인 원자 속의 전자가 빛과 열을 받아 들뜬 상태가 된 후 매우 천천히 원래의 궤도로 돌아오기 때문에 생긴다. 형광과 인광이 다른 것은 빛의 지속시간이다. 형광물질은 전자가 들뜬 상태가 된 후 곧바로 떨어져 주변의 빛이 없어지면 더 이상 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광물질은 전자가 매우 천천히 떨어지므로 주변의 빛이 사라져도 오랫동안 빛을 낼 수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야광시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인광을 내는 물질이 발라져 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인의 제조법을 비밀로 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인광을 보여주어 부자가 됐다. 자연발화와 인광 현상이 널리 알려지기 전, 인은 많은 사기꾼과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이용됐다. 밀납이나 파라핀에 인을 섞어 글을 써 놓고 밤중에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신의 계시라거나 지도자의 신통력이라고 속이는 일이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도깨비에 흘린 기분이었다. 1742년 마르그라프라는 사람이 좀더 완성된 인 제조법을 발견해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인으로 돈벌이하는 일은 없어졌다.
푸르스름한 차가운 빛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도깨비불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인의 자연발화보다는 인광 현상에 무게를 둔다. 도깨비불은 한 번 나타난 곳에서 자주 출몰한다. 이는 인 가루가 타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으면서 밤에 인광을 내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광은 온도가 올라가지 않으면서도 빛이 나는 차가운 빛(냉광)이다. 민속학자 김종대 박사가 채록한 도깨비불 목격담에서도 많은 목격자들이 도깨비불이 푸르스름한 빛깔의 차가운 불이라고 했다. 일본의 민요에서도 “도깨비불의 창백한 기미가…”하며 도깨비불을 차가운 불로 묘사했다. 도깨비불은 무엇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차갑게 빛나는 인광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도깨비불은 하나가 여럿이 되고 다시 합쳐지는 등 변화를 보이는 일이 많은데, 이것도 인 가루가 바람에 날리면서 섞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생선을 건조시키는 과정에서도 때에 따라 인광이 나는 수가 있다고 한다. 홍어, 오징어 등을 삭혀 말리면 표면에서 인이 생겨 밤에 윤곽이 보일 정도로 인광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세포 자체가 인 성분으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의 뼈에 인이 많이 함유돼 있는데 이장한 무덤이나 공동묘지에서 도깨비불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관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때 묻은 부지깽이
인광설 외에도 지금까지 도깨비불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럿 제시됐다. 어떤 사람은 인화보다는 메탄에 의한 발화설을 제시한다. 시체나 식물이 썩어서 생긴 메탄이 땅 속에서 솟아오르면서 자연적으로 불이 붙어 음산한 빛을 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동식물이 부패하기 쉬운 늪지대에서 볼 수 있다. 정전기 현상도 원인으로 거론된다. 상태가 다른 공기층이 겹치면서 고압의 정전기 스파크가 일어날 때 도깨비불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이 여럿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변화 무쌍한 도깨비불을 정전기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 하나의 설명이 빛의 이상굴절에 의한 신기루 현상이다. 빛은 밀도가 다른 공기층을 통과하면서 이상굴절 현상이 일어나 여러 가지 이상한 모양으로 찌그러지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한다. 먼 곳의 불빛이 밀도가 다른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불규칙하게 굴절돼 도깨비불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직 어느 이론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도깨비불의 정체는 미구에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도깨비까지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손때 묻은 물건이 도깨비로 변하는 즐거운 상상을 과학의 시대라고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물이 오래된 것은 그 기도 오랜 것이므로 귀신의 기와 감응하기 쉽다…. 도깨비도 아마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빗자루, 부지깽이, 멍석, 절구, 메주, 주걱, 짚신, 도리깨 등이 모두 도깨비가 될 수 있는 오래도록 손때 묻은 물건들이다. 헌데, 지금 내 주변에 도깨비가 될 만한 물건은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