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15일 미국의 백화점마다 신소재 스타킹을 사려는 여성 고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이 신소재는 나일론으로, 실크(비단)보다 질기고 면보다 가벼우며 신축성이 뛰어났다. 당시 나일론 스타킹의 값은 1.15 - 1.35달러. 실크 제품보다 2배나 비쌌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듀폰사는 나일론 스타킹을 팔아 그해 9백만달러, 이듬해 2천5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여성이라면 한 켤레 이상 산 셈이다.
흔히 비단은 황하문명을, 면은 산업혁명을, 그리고 나일론은 20세기 문명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나일론의 발명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발명한 사람은 월리 스 흄 캐로더스(1896-1937)였다.
1926년 독일 화학자인 슈타우딩거(1881-1965)는 “섬유질인 셀룰로오스의 분자는 고분자로 구성돼 있으며, 저분자 물질을 합성하면 고분자의 합성섬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각국에서는 합성섬유에 대한 연구가 촉발됐는데, 미국의 듀폰사도 그 중의 한 곳이다.
1928년 듀폰사는 하버드대학에 합성섬유를 개발할 유능한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의뢰했는데, 이때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웃된 과학자가 바로 캐로더스다. 그는 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다가, 듀폰중앙연구소 유기화학부장이라는 직함과 강사봉급의 2배에 가까운 월급을 준다는 말에 현혹됐다. 듀폰사에 온 캐로더스는 한동안 별다른 연구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공황이 닥쳐와 듀폰사는 투자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듀폰사는 캐로더스가 하는 일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4년 캐로더스실험실의 연구원들은 캐로더스가 외출한 틈을 타서 모처럼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장난이란 그동안 합성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재료들을 가지고 누구 길게 실을 뽑는지를 내기하는 것. 연구원인 줄리언 힐도 참가했다. 힐이 병 속에 들어있는 폴리에스테르를 유리막대로 찍어 허공으로 휘젖자 마치 거미줄같은 실들이 길게 늘어뜨려졌다.
이러한 장난을 뒤늦게 전해들은 캐로더스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녹는점이 낮아 섬유를 만들 수 없는 폴리에스테르에 이런 성질이 있다면, 녹는점이 매우 높은 폴리아미드에도 같은 성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동안 방치해둔 폴리아미드를 꺼내 줄리언 힐이 상온에서 실시한 똑같은 장난을 쳐보았다. 그랬더니 폴리아미드가 긴 실을 내뿜는 것이 아닌가. 5월 24일, 나일론은 이같은 장난으로 탄생했다.
듀폰사는 캐로더스의 발명품을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선보였다.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합성실크’라는 타이틀과 함께. 그리고 이듬해 판매를 시작했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캐로더스는 이를 지켜보지 못했다. 평소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37년 4월 19일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던 것이다.
1939년 나일론이 만국박람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일본에서는 동양 최초로 합성섬유 1호가 만들어졌다. 이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조선인 이승기박사(1905-1996).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교토대학을 졸업한 그는 1932년 다카츠키(高槻)화학연구소에 들어가 줄곧 합성섬유를 연구해왔다.
해방 후 이승기박사는 잠시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낸 후 월북해 북한의 의복혁명을 일으켰다. 석회석과 무연탄을 원료로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새로 개발한 것이다. 비날론은 가볍고, 질기고, 빛과 화학약품에 강하고, 자연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를 ‘주체섬유’라고 부르며, 그 생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61년 함흥에는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는 2·8비날론공장이 들어섰다.
그런데 비날론은 화학약품에 강하다보니 염색이 잘 안되고, 생산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흠을 지녔다. 당시 이승기박사와 쌍벽을 이뤘던 화학자 여경구박사(여운형의 아들)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비날론 생산을 막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여박사는 결국 사상검토를 받고 자살하고 말았다.
숨쉬는 옷감, 테플론의 발명
듀폰사는 큰 별이었던 캐로더스를 잃었지만 또 하나의 스타를 발굴해냈다. 바로 오하이오 주립대학 출신의 신출내기 과학자 로이 플런킷(1910-1994)이다. 그는 1938년 4월 6일 우연히 테플론을 발명했다.
플런킷은 냉장고에 사용하는 암모니아를 대체할 무독성 냉매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실험을 하려고 특별히 만든 프레온 가스통을 열어보니 전혀 기체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플런킷은 톱으로 가스통을 잘라 그 안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미끈미끈한 백색가루가 눈에 띄었다. 그는 여러가지 실험 끝에 이 물질이 열과 전기는 물론 산에도 매우 안정적임을 알아냈다.
당시 맨해튼계획에 따라 비밀리에 원자폭탄을 만들던 과학자들은 부식에 강한 패킹이 필요했다. 그런데 운좋게도 테플론(Teflon)이 발명된 것이다. 듀폰사는 테플론의 값으로 백지수표를 받는 대신 비밀리에 군에만 납품했다.
2차대전이 끝나 테플론에 대한 보안이 풀리자 테플론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선보였다. 1956년 프랑스에서는 빵이 눌지 않는 테플론 코팅 프라이팬이 나왔고, 1970년대 중반에는 공기는 통하는데 물은 통과할 수 없는 숨쉬는 옷감이 개발됐다. 이것은 스키복과 방한캠핑복에 널리 활용됐다.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존 글렌이 입었던 우주복에도 테플론이 코팅됐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부식되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도 알고보면 테플론 코팅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