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의 역사를 지녔지만 유명무실했던 한구과학문화재단에 대한 관심이 최근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APEC 청소년 과학축전을 치러냈고, 게다가 올해부터 1천억원 대의 기술복권 사업을 맡게 됐다. 과학문화재단은 어떤 곳인지 이사장으로부터 직접 들어본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을 아느냐고 물으면 과학기술자들조차 “뭐하는 곳이냐”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최근 1천억원대의 기술복권 사업이 넘어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과학문화재단의 사업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름은 거창한데,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문화재단의 조규하 이사장(65세)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뜸 과학문화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3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명무실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학문화재단은 과학이 재미있고,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런 일을 과학대중화사업이라고 불러 왔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조 이사장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과학문화재단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어갔다.
과학대중화사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0년대 후반. 국가를 발전시키려면 과학기술을 육성해야 한다고 본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2월 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전신)를 설립하고, 이듬해 5월 정부 부처에 과학기술처를 신설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0일 재계(전경련)와 더불어 5천8백만원을 출연해 비영리 민간공익법인인 ‘과학기술후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현 한국과학문화재단의 모태다.
과학문화재단의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정부(과학기술처), 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더불어 과학대중화(과학기술후원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과학대중화의 막중한 책임을 맡을 초대 이사장으로, 초대부터 6대까지 학술원 이사장을 지냈고 6대 서울대총장을 맡았던 의학박사 윤일선씨를 임명했다. 당시 후원회는 과학기술자에 대한 복지 지원, 생활과학 아이디어 공모, 과학계몽운동 등을 펼쳤다.
과학기술후원회가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으로 바뀐 것은 1972년 1월. 전국민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라는 모토로 본격적인 대중화사업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사장은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용완씨, 이정림씨, 정주영씨 등이 겸임하다가, 1980년대부터 초대 과기처장관을 지낸 김기형씨, 11대 과기처장관을 지낸 이상희씨가 맡았다. 90년대 초반까지 진흥재단은 과학필름 라이브러리 사업, 과학차 순회 방문, 전국청소년과학경진대회, 과학문고 보급 등의 사업을 해왔다. 1996년 3월 6일 진흥재단은 한국과학문화재단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제9대 이사장으로 동아일보 정치부장 대우, 전경련 상근 부회장, 전남 도지사를 역임했던 조규하씨가 선임됐다.
어두운 과거
“쟁쟁한 인사들을 이사장으로 모셨다는 과학문화재단에 처음 왔을 때 느낀 낭패감이라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30명의 직원 중 대졸 출신은 3명에 불과했지요. 예산은 20억이었는데, 빚은 7억.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과학대중화사업은 거의 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심지어 과학사업을 한다는 곳에 컴퓨터는 386PC 한대가 고작이었습니다.” 조 이사장은 답답했던 시절이 떠올라 잠시 말을 멈췄다. 이처럼 허울 뿐인 과학문화재단으로 전락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후진국이 중진국이 될 때, 또 중진국이 선진국이 될 때 어느 나라건 과학기술의 발전을 국가적 과제로 삼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은 과학기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명치유신 때부터 1백년 동안이나 노력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는 드골이라는 강력한 대통령이 앞장서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미국은 옛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 이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강력한 과학기술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과학문화사업에서는. 조 이사장은 과학문화재단이 만들어진지 30년이 넘도록 과학기술부 장관이 다녀간 것은 딱 한차례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국·과장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장관이 다녀간 것은 진흥재단 시절에 터졌던 ‘시약사건’ 때문이었다.
과학기술부는 이름뿐인 과학기술진흥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각 연구소에서 쓰고 있는 시약의 독점납품권을 진흥재단에게 준 바 있다. 면세에다 독점이니 그 수익은 대단했지만, 그 돈은 한마디로 ‘눈먼 돈’이 돼버렸다. 직원들은 ‘염불보다 잿밥’에 신경을 썼고, 더군다나 시약을 납품하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부르는 바람에 연구소들의 원성을 샀다.
사실 과학기술부에게 그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흥재단은 민간단체이므로 정부의 통제권 밖에 있었다. 물론 감독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1996년 조 이사장이 부임했을 때 재단에는 시약독점납품권이 철회되고 빈 시약병만 창고에서 뒹굴고 있었다.
국민 가슴에 잠재된 과학마인드
조 이사장의 부임 첫일은 구조조정. 과학문화 일꾼으로 나섰다가 시약장사꾼들로 변해버린 사람들을 솎아내는 일이었다. 이미 복마전으로 변해버려 어느 인맥을 타고 들어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바꾸는 일이다.
두 번째는 경영혁신. 그는 재정이 약해서는 과학문화사업은 공염불이라고 봤다. 그래서 2년 동안 50억원의 용역예산을 확보해 전체 예산을 70억원으로 늘렸고, 부채는 말끔히 해소했다.
그 사이에 과학문화재단이 해낸 일은 적지 않다. 1997년 빈약한 예산, 전문인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제1회 대한민국 과학축전을 서울 한강시민공원에서 치렀다. 이 행사에는 40여만명이 참가해 전무후무한 과학축제의 마당이 됐다. 이듬해 8월에는 아시아태평양(APEC)지역 13개국 4백54명이 참가한 제1회 APEC 청소년 과학축전을 개최했다. 국제대회를 경험없이 처음 치러냈지만 결과는 대성공. 일반 관람객이 10만명을 넘어, 당초 국민들이 무관심하리라고 봤던 것이 기우였음을 보여줬다.
과학문화재단이 치러낸 행사 중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지난해 11월 18일 경기도 덕평수련원에서 있었던 유성우 관측행사다. 충분한 준비없이 치른 행사였지만 1천5백여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물론 전국적으로 수만명의 사람들이 유성우를 보기 위해 밤을 설쳐야 했다. 과학문화재단 사람들은 이날을 두고“국민들 가슴에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잠재돼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곤 한다.
무엇보다도 과학문화재단의 야심작은 오는 4월에 선보일 ‘한국과학문화종합정보망’. 지금껏 소개한 과학문화재단의 사업들이 주로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이벤트였다면, 인터넷 가상공간에 세워진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사이버 테마파크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서울 대치동에 자리잡고 있는 과학문화재단의 4층 건물에는 밤이 깊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올 1월 DB전문가를 모시고 종합정보망 시연회를 갖는데 모두 놀라더군요. 원래 관공서의 일이란 엿가락 늘어지듯 세월만 보내는데 불과 1년 만에 엄청난 사이버 테마마크를 만든 것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사실 재단의 일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지요. 그런데 재계 출신의 조 이사장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밤을 세우더라도 목표를 달성하도록 만든 거죠. 이사장 자신도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자리를 지켰고, 심지어 설 연휴에도 나와 일을 했습니다.” 정보망을 개발했던 정광철 팀장의 말이다. 지난 겨울, 재단 건물은 컴퓨터와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열 때문에 별도의 난방이 필요없을 만큼 후끈했다.
지혜를 국민에게 구한다
“과학기술문화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50억원을 들이면 5천억원의 효과를 내는 것이 이 운동입니다. 성수대교를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시공하고 관리했다면 붕괴되는 일이 없었겠지요. IMF사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사회는 과학기술 마인드가 부족해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큽니다.” 조 이사장은 과학기술문화운동은 경제적으로 보면 이런 사회적 비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말뿐이지 과학기술문화운동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과학기술문화재단이 성공적인 사업을 펼치자 태도가 달라졌다. 대표적으로 한국종합기술금융(KTB)에서 운용하던 기술복권사업을 과학문화재단에게 넘겨준 것이다.
기술복권(과거 기술개발복권)은 1993년 3월 25일, 2000년대 과학기술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이를 뒷받침할 1조원의 과학기술진흥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발행됐다. 현재는 주택복권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그런데 과학기술부의 위탁으로 운영을 맡아오던 한국종합기술금융이 민영화되면서 그 운용권이 한국과학문화재단으로 넘어왔다.
“영국과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경마나 경륜에서 들어오는 수익을 과학기술진흥에 쓰고 있습니다. 기술복권의 운용권이 과학문화재단으로 넘어온 것은 과학문화운동에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과거의 시약사건처럼 재단이 과학문화진흥보다 기술복권에 더 신경쓰는 일을 재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조 이사장은 이제야 과학기술문화운동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아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본말이 전도돼 그게 ‘쥐약’이 될 수 있음을 직원들에 상기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과학관이 과학문화재단 산하기관으로 된다는 풍문이 있다. 서울과학관의 운영을 과학문화재단에 맡기자는 의견은 조 이사장의 경영능력과 변화하는 과학문화재단의 쇄신된 분위기를 믿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조 이사장은 선뜻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다. “미국의 스미소니언과 같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과학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예산 등 건너야 할 강이 많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결정돼야 서울과학관의 운영을 맡게 될 것입니다.” 욕심이 많으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듯하다.
과학문화재단은 올해부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인터넷 과학기술문화종합정보망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과학기술자와 국민들이 자유롭고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또 지난해 발굴한 SBS의 ‘호기심천국’을 비롯해 다양한 과학 프로그램을 지원해 국민들의 과학 마인드를 다지는 일도 중요하다. 이밖에도 매년 서울에서만 개최해온 과학축전을 전국적으로 넓히는 숙제도 있다.
그래서 과학문화재단은 ‘사이언스 21’이라는 21세기 비전을 세워놓고, 과학축전과 같은 다양한 과학기술문화 이벤트, 과학기술방송국 설립과 같은 과학기술영상사업, 과학문화회원 확산과 같은 과학기술문화 프로그램 개발 등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안고 있는 문제점은 여전히 많다. 당장 시급한 것은 과학기술 문화인력을 양성하는 일. 현재 과학문화재단 내에는 대졸 출신이 16명(박사 2명, 석사 4명, 학사 10명)으로 늘었지만, 정예화된 전문인력은 더욱 필요하다. 또 과학문화재단과 더불어 과학문화운동에 참여할 과학기술자, 일반인 회원들을 늘리는 일도 있다.
“과학문화재단은 이제 시작입니다. 기술복권으로 예산의 숨통이 트였다고 하더라도, 겨우 과학문화운동의 뱃길이 잡혔다고 해서 앞으로 닥쳐올 파고가 결코 낮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조 이사장은 파고를 극복하는 지혜를 국민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요즘 별보기에 흠뻑 빠져있다. 별이 뜨면 부인과 함께 밤하늘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과학문화운동을 몸소 체험해보려고 한 것이 아마추어가 돼버린 것이다. 언론계, 재계, 정치판을 누볐던 호랑이가 해가 지면 떠오르는 금성, 목성, 시리우스를 가리키며 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