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학기술자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있는 북한 사회는 기술관료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을 움직이는 핵심 과학기술자들은 누구일까.
북한은 ‘기술가 정치’(Technocracy)라는 사회적 특성을 갖춘 사회이다. 테크노크라시란 전문기술가(테크노크라트)에게 일국의 산업적 자원의 지배와 통제를 위임하는 정치를 말한다. 북한의 테크노크라시적 특성은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내각(옛 정무원)의 조직이 금속공업성, 기계공업성, 석탄공업성 등 산업분야를 세분화해서 담당하고 있고, 부서의 장관격인 ‘상’을 대부분 공과대학 출신들이 맡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학원장과 부주석을 지낸 이종옥, 정무원 총리와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단장을 맡았던 연형묵, 그리고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 위원장을 지냈던 홍성남과 김달현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고위관료들은 모두 공대 출신들이다. 이에 비해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은 대부분 노동당이나 사찰기관, 대남공작기관 등에 몰려 있다.
이처럼 경제를 공과대학 출신들이 맡아도 되는 이유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본주의와 달리 ‘유통 및 이윤’의 개념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해당 경제년도의 수요를 파악, 그만큼의 물자를 생산해서 공급만 해주면 경제의 역할은 끝난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테크노크라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 과학자들의 학풍은 한국과 달리 기초과학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옛소련의 학풍을 이어받은 것이며, 옛소련은 독일로부터 들여온 학풍을 그대로 북한에 전수해준 것이다.
과거 독일 과학정책의 특색은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종합대학’ 숫자를 극소수로 하여 중앙정부 소재지에 설치하고,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단과대학’을 전국 지방도시마다 대거 설치했다. 현대에 들어서 과학과 기술의 간격이 좁혀지자 독일과 옛소련은 이를 시정했지만, 북한은 최근까지도 순수과학을 가르치는 종합대학은 김일성종합대학만으로 버텼다. 그러나 북한도 이제는 기술과학을 가르치는 김책공업대학 등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고 있는 중이다.
북한의 순수과학을 중시하는 풍조는 1960년대 초 중소(中蘇)이념분쟁이 시작되자 홍역을 치렀다. 선진 사회주의국가로부터 제공되는 군사무기 원조의 한계를 예감한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1967년 이후 무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기술과학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현재 이같은 기술과학정책은 국방위원회 산하에 있는 ‘제2경제위원회’가 주도하고, 순수과학의 학풍은 국가과학원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에는 국가과학원 직속 연구기관, 대학, 기업체부설연구소를 합해 약 3백개의 전문연구기관이 있다. 이들 연구기관에서는 무료교육정책에 의해 육성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최고연구기관인 과학원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중복없이 연구를 하고 있다.
80년대 초부터 인공위성 개발
북한 산업이 대부분 국방산업 위주로 가동되고 있으므로 북한의 과학수준을 말하려면 제2경제위원회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발사됐던 인공위성 ‘광명성 1호’ 또한 이곳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말 남한이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고 인공위성 개발을 검토 중임을 알고, 북한은 1980년대 초부터 인공위성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인공위성 개발을 담당했던 기관은 제2경제위원회 산하의 미사일 개발 담당부서인 제4총국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인공위성을 통해 북한을 빛낸 과학자로는 어떤 사람들을 꼽을 수 있을까. 지난해 9월 노동신문은 원사(과학발전에 크게 공헌한 원로학자에게 주는 칭호로 남한으로 치면 학술원 회원쯤 됨)이며 교수·박사인 권동화, 후보원사이며 교수·박사인 한해철과 김행경 등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해철은 인공위성 발사 후 노동신문에 3회에 걸쳐 ‘인공위성 상식’이라는 해설기사를 게재했던 것으로 보아 이 분야의 권위자인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또 11월 30일 방송을 통해 인공위성 발사 관계자들에게 표창과 칭호, 학위학직 등이 수여됐다고 발표했다. 이때 소개된 과학자는 양광복, 이철송, 김태희, 박월룡 등이다. 모두 북한연구소에서 발간한 북한인명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과학자들이다.
인공위성 발사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과학자로 인적사항이 외부에 알려진 과학자로는 서상국이 유일하다. 그는 북한에서 ‘과학천재’로 평가받는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다. 옛소련 유학 중 최우수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 귀화를 종용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그는 1966년 28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고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강좌장이 됐다. 같은 해 김일성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김정일의 과학자문역과 김일성대학 물리학부 강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김정일은 서상국에게 ‘환갑상’을 전달해 공로를 치하했다. 그런데 북한이 실제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서박사말고 물리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과학자로는 김일성대 총장인 박관오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김일성대 원자력학부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 물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후 옛소련의 유명한 핵물리학연구소인 두브나핵연합연구소에 근무했는데, 이 연구소에서도 고위직에 있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국가과학원 부원장, 원자력위원회 부위원장, 원자력연구소장,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장, 노동당 중앙위 과학교육부 부부장 등을 두루 거쳐 1987년에 김일성대 총장이 됐다. 그가 총장으로 부임한 뒤인 1989년 5월 김일성대학은 세계에서 4번째로 상온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9년은 미국 유타대학의 스탠리 폰즈박사와 영국 사우스햄프턴대학의 마틴 플레이 슈만박사가 상온에서의 핵융합에 성공한 해이다.
북한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부서는 제2경제위원회 산하 제5총국이다. 북한은 원시적 형태의 핵무기를 2-4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시 강동군에 자리잡고 있는 제2경제위원회는 7개의 총국을 두고 있는데, 각각 보병화기, 기갑장비, 포병화기, 미사일, 핵무기, 함정, 항공기 및 통신장비 등의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삼 생육기간 반으로 단축
그렇다면 민수 분야에는 어떤 과학기술자들이 있을까. 북한에서 식량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구기관은 농업과학연구원이다. 농과대학(북한식 명칭은 농업대학)으로는 원산농업대학, 사리원농업대학 등이 명문이다. 북한이 개발해낸 특이한 농작물로는 기름골, 비타민나무, 조생종 인삼 등이 있다.
기름골(Cyperus Esculentus)은 한국식물학회에서는 그 뿌리줄기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식물이다. 그런데 북한 식물학자인 백설희박사가 이 식물의 뿌리줄기에 땅콩과 비슷한 것이 열리도록 개발해 식용유 공급원으로 삼게 했다. 백박사는 이 공로로 북한에서 가장 출세한 여성 가운데 한사람이 됐다.
비타민나무는 보리수나무과의 활엽수로 그 열매를 건강식품이나 우주비행사 및 운동선수용 식품제조에 쓴다. 껍질은 만성기관지염, 심장병, 녹내장 등 30여가지의 질병치료에 쓴다.
조생종 인삼은 농업과학연구원 개성인삼연구소 연구실장인 임광야가 개발했다. 그녀가 육종해낸 인삼은 생육기간을 절반으로 단축, 조기에 대량생산해낼 수 있는 길을 텄다. 임광야는 조생종 인삼을 1992년 세계 발명 및 저작권 기구에 출품해 금메달을 받았다.
북한은 1986년 독일(동독) 라이프치히 봄철 국제시장에서 금메달을 받은 적이 있다. 수상작은 ‘초고압 프레스’로 김길연박사가 발명했다. 김박사는 이 프레스를 개발했을 뿐 아니라 프레스를 이용해 인조 다이아몬드를 합성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 공로로 준박사(석사)에서 박사가 됐고,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 유압공학연구실장이 됐으며 노령영웅 칭호와 함께 국가훈장 1급을 받았다. 1994년에는 과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국가과학원 원장으로 임명됐다.
북한에는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많고 이에 따라 자원공학이 발달돼 있다. 이용암박사는 와세다대학 자원공학과를 졸업했으며 북한 최고의 자원공학자다. 그의 전공은 지압(地壓)이론. 지압이란 지하에 터널이나 갱도 등을 건설하기 위해 굴착할 때 그 주위에 생기는 압력으로 인해 붕괴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박사는 지압을 정확히 계산, 응용해 광석을 알뜰히 캐내는 공법인 ‘무잔주채광법’을 개발했다. 그는 지압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지압이론은 북한이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주목된다.
북한의 조선공학은 한국처럼 큰 배를 만드는 것보다는 특수선박을 제작하는 쪽으로 발달했다. 최고의 조선공학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의 김동신박사. 그는 작년으로 설립 50돐을 맞은 김책공대를 대표해 노동신문에 장문의 글을 썼을 만큼 김책공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이다. 그는 현재 김일성상을 받은 계관인이며 과학기술통보중앙연구소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김동신박사의 제자인 정종근박사는 노력영웅·박사·인민과학자로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을 듣고 있다. 정박사의 대표작은 ‘뜬 도크’. 뜬 도크는 해상에서 고장을 일으킨 배를 수리도크가 있는 항구로 끌고 오지 않고 바다 위에서 직접 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리(修理)용 선박이다. 이 도크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수리대상 선박 밑으로 들어간 뒤 적당한 위치에서 그 선박을 도크 위로 올려놓고 떠올라 수리를 시작하는 명물이다.
남한보다 4년 먼저 지문열쇠 등장
1998년 한국의 한 기업은 컴퓨터로 지문을 감별해 출입이 허용된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지문 열쇠’를 개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보다 4년이나 앞선 1994년에 ‘지문호출조종체계’(지문열쇠의 북한식 이름)를 발명해 제22차 제네바 ‘국제발명 및 새기술 새제품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발명자는 함흥전자계산기단과대학을 졸업한 33세의 이승국이었다. 함흥전자계산기단과대학은 평양전산대학과 함께 10년 전 설립된 대학으로 북한에서 컴퓨터공학 분야의 인재를 양성해내는 명문이다.
북한 전산학의 오늘을 있게 한 개척자는 김책공업대학 전자계산기학부 학부장인 류순열 박사다. 금년 50세인 류박사는 산학(産學) 모든 분야에서 북한 전산학의 문을 연 과학자인 동시에 교육자이다. 북한당국은 지난해 인공위성이 발사됐을 때쯤 평양에 평양집적회로공장을 준공, 집적회로(IC)의 상업적 생산을 개시했다. 이전에는 평양에 있는 인민군 반도체공장에서만 소량의 반도체를 생산해 군수품으로 조달해왔다.
이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예우는 신통치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예산부족. 군인과 당료(黨僚)들, 예술인들에 대한 김정일 총비서의 편애는 과학자들에게 햇볕을 비춰줄 여력을 남기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의욕을 상실한 과학자들이 제대로 연구를 하지 않아 경제도 타격을 입었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김정일은 1997년부터 과학자들에 대한 예우 향상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북한 과학을 평가하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북한 과학에는 주체과학으로서의 특성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주체과학이란 남의 나라 기술에 대한 모방이 아닌 자체개발, 즉 창작정신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