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입해 밀레니엄 버그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진다면 대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의 결말에 대해 갖가지 시나리오들이 범람하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2000년 1월 1일, 컴퓨터 연도표시 문제인 밀레니엄 버그(Y2K) 때문에 지구촌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시나리오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쏟아지고 있다. 그 시나리오가 많은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미국인 중 17%가 Y2K로 인한 정전에 대비해 가정용 발전기나 장작난로를 구입하겠다는 미국의 갤럽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대변한다.
사실 이러한 시나리오들은 Y2K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정들이다. 그러기에 캐나다에서는 Y2K와 이 때문에 발생하는 파장을 막기 위해 ‘Y2K 비상사태령’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표된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을까. 만약 그중 일부라도 실현된다면 올 연말에 Y2K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미리 생필품 등을 확보하도록 계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릇됐다면 유언비어날포죄를 적용해 국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죄를 물어야 한다.
시나리오1-전력 공급 이상
Y2K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발생한다. 따라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에너지이고, 그 중에서도 전력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한국전산원이 발표한 Y2K 시나리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Y2K 문제로 시설통제장치가 엉뚱한 배출밸브를 열 수 있어 엄청난 방사능 누출사태가 예상된다. 또 안전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하거나 기능 이상으로 잠시 발전소를 폐쇄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상당한 전력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양초와 손전등으로 겨울을 나야 한다.”
Y2K 때문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라도 누출된다면 이보다 큰 일은 없다. 설령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원자력발전소를 임시나마 폐쇄한다면 40%의 전력을 원자력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큰 문제가 생긴다. 지금까지의 모의실험 결과 원자력발전소는 안전한 편. 나머지는 영향평가(3. Y2K 어떻게 해결하나 참조)를 끝내고 문제가 되는 것들을 변환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1월 7일 감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수자원공사에서 관리하는 10개 댐 등 18개 발전시설이 중점관리대상에서 누락되는 등 영향평가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즉 아직까지는 전력 공급에 대해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감사원은 한국가스공사와 한국통신도 한국전력과 더불어 Y2K 해결실적을 허위·과장 보고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가스 보급과 통신도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약속한 대로 올 8월까지 Y2K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전력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에 대비해야 한다. 손전등과 초는 필수이고, 전기를 이용하지 않는 난방장비도 준비해야 한다.
시나리오2-신용카드와 은행의 마비
2000년 신년 연휴가 끝난 후 은행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헛걸음을 할 수 있다. 만약 은행이 Y2K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짧게는 몇일, 길게는 몇주 이상 폐쇄되기 때문이다.
한국전산원의 시나리오. “Y2K 때문에 증시를 포함한 전체 금융시스템이 뒤엉킬 수 있다. 예금기록과 거래기록 등이 사라질 수 있으며, 이자를 계산하고 고객잔고 파악하는데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입출금이 일시 정지된다. 또한 온라인 전송시스템에 혼란이 야기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말 이러한 시나리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한미은행에서 발생했다. 1800년대에 태어난 노인이 노후생활연금신탁통장을 만들려고 했으나 컴퓨터가 노인의 기록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노후생활연금신탁은 가입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컴퓨터가 계산한 노인의 연령은 18세에 미치지 못했다.
사실 Y2K로부터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곳은 금융분야다. 대부분의 자료와 프로그램들이 연도표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금융분야의 Y2K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컴퓨터 오류의 특성상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더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더기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올해 말 Y2K 때문에 대규모 현금인출사태가 빚어질 것이라고 보고, 현재 유통되고 있는 현금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5백억달러를 추가로 발행한다. 뉴욕타임스가 “Y2K는 컴퓨터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일본 금융감독청은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기관이 Y2K로 거래고객에 피해를 입힐 경우 일정한 기간 동안 업무정지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1-2주 정도의 생활비는 미리 찾아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정부도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두어야 할 것이다.
시나리오3-병원이 사람 잡는다
Y2K 때문에 가장 난감한 곳은 의료분야다. 여기에는 정보기술(IT) 분야의 Y2K와 마이크로칩으로 대표되는 비정보기술 분야의 Y2K가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산원의 시나리오. “초침이 2000년을 알리는 순간, 정맥주사 장치, 심장박동 모니터 등 병원 기계장치들이 돌연 정지된다(비정보기술 부문). 결국 환자들은 2000년 새해를 보지 못한다. 병원의 서류, 청구서, 환자기록 등이 뒤죽박죽 된다(정보기술 부문). 만약 공급업체들이 기록을 잃어버리면 의료용품 조달조차 어려워진다(간접적인 피해).”
올해 1월 발표된 서울대병원 시나리오. “종합병원 응급실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중년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왔지만 심장충격기가 작동되지 않아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또 같은 시간 중환자실에서는 심장안정기 안에 들어있는 칩이 오류를 일으켜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
정말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해외조사기관인 가트너그룹은 의료기관이 보유한 수천종의 의료장비 가운데 0.2-2.5%는 Y2K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려했던 일이 1월 1일 스위스 바트주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병원에서 발생했다. 결국 이 병원들은 환자기록에 대한 접근을 이틀 동안 통제했다.
2월 초 서울대병원의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내의 의료장비 중 10% 정도가 Y2K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나이 계산 착오, 성별 착오, 의약품 남용 및 방사선 과다노출, 의약품 보관기간 혼란 등의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다. 다른 병원에서는 아직 문제조차 파악하지 못한 형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보건복지부 장관은 Y2K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친필 편지를 각 종합병원에 발송했다.
의료기관의 Y2K 문제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의료기기가 수입품이고, 의료기록을 관리하는 프로그램 역시 외부에서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을 주고 Y2K 문제가 없는 새로운 의료기기나 소프트웨어들을 구입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앞으로 9개월 동안 모든 병원이 Y2K 문제를 해결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병원이 완전히 마비되는 것은 아니다. 첨단의료장비를 쓰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전산화된 환자기록을 보지 못할 뿐이다.
시나리오4-비행기는 추락할까
“1월 1일 0시, 항공관제시스템이 정지되고 일부 비행기는 운항능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한국전산원의 시나리오. 이뿐이 아니다. 예약과 탑승자를 관리하는 프로그램도 엉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네덜란드 제일의 항공사인 KLM사는 12월 31일부터 며칠 간 비행기 운항을 전면 중단하는 극약처방을 검토 중이다. KLM의 전산시스템이 Y2K에 완벽하게 대비하고 있더라도 다른 나라의 컴퓨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 1월 미국 국무부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Y2K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재난을 막기 위해 자국민들에게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외국여행을 자제하도록 당부한 것. 또 신용카드, 자동현금인출기(ATM), 의료시설 등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행할 경우 Y2K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는 보험에 가입했는지를 확인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건설교통부 간부들은 Y2K로부터 항공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 1월 12일 탑승 예약을 마쳤다. 장관은 1월 1일 아침 대한항공을 타고 서울에서 대구로, 차관은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서울에서 제주로 떠난다. Y2K를 몸으로 때우겠다는 것인가. 그만큼 Y2K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인데, 그렇게 100% 안심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1월 말 김포, 김해, 제주 등 3개의 국제공항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로부터 Y2K 대처상황을 점검 받은 결과 3등급인 ‘옐로’의 평가를 받았다. 국제항공운송협회는 대응조직, 비상계획, 문제해결능력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블루(완전), 그린(양호), 옐로(보통), 레드(지체), 블랙(전무) 등 5개 등급의 판정을 내린다.
그러나 나라마다 일찍부터 Y2K 대비책을 마련해온 항공분야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영향평가를 통해 미리 문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5-미친 미사일이 날아온다
Y2K 때문에 국가방위체제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보고. 1993년 북미(北美) 미사일 경보시스템을 다루는 일부 기술자들이 장난으로 컴퓨터 시계를 2000년 1월 1일로 맞추자 모든 시스템이 중단돼 미국의 핵방위망에 구멍이 뚫린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를 거울 삼아 미국, 영국 등은 군사정보를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나머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전혀 대비가 안돼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군사전문가들은 Y2K 때문에 요격기를 출동시키거나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발칸반도나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일어난다면 제3차 세계대전도 일어날 수 있다. 이곳은 미국과 러시아처럼 실수나 오작동으로 탄두미사일이 발사될 경우, 즉각 이를 상대국에 통보해 오해로 인한 불상사를 막는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최근 국방부는 Y2K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잠수함 구축함 초계함 등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를 장착한 군 장비에 중대 결함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장비를 올해 안으로 전량 교체할 예정이다. 한편 얼마전 유엔연합사와 북한 간의 고위 장성급 회담에서 북한의 Y2K 문제를 공동해결하자는 의견이 나와 화제. 북한군은 Y2K에 대해 전혀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를 남북이 공동 해결한다면 미친 미사일 걱정을 덜 수 있다.
국가방위체제에서 중요한 결정은 인간이 하게끔 되어있다. 즉 Y2K 때문에 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미사일이 스스로 발사되는 일이 있더라도 영향평가만으로 미리 파악해 막을 수 있다.
Y2K 시나리오의 허구
Y2K는 태생적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를 100%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결국 Y2K에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소위 ‘Y2K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100% 완벽한 프로그램도 없다. 어느 프로그램이든 버그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게 눈에 띄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그대로 사용된다. Y2K 역시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즉 현재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Y2K는 해결해야 하겠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버그까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신에게 맡겨야 한다.
Y2K는 알면 알수록 더 위험해 보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컴퓨터와 마이크로 칩이 안쓰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Y2K 시나리오들이 말하는 것처럼 컴퓨터와 마이크로 칩에서 반드시 Y2K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Y2K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더 많다. 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Y2K 문제도 많다.
엘리베이터는 대부분의 Y2K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단골 사례. “마이크로 칩이 엘리베이터의 정기검사 시한이 만료된 것으로 판단해 운행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갇혀 꼼짝 못할 수도 있다.”(한국전산원)
인텔리전트 빌딩과 같은 고급건물에서는 가능한 얘기일지 모르나, 대부분의 아파트나 건물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연도표시를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든 Y2K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 역시 처음부터 탑승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Y2K 때문에 사람이 갇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Y2K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조금만 조작하면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영향평가만으로 Y2K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알려주는 일은 사재기와 같은 Y2K 폭동을 막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향평가는 프로그램을 고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Y2K를 올 연말까지 모두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차피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의료기관에 대해 손쓰지 못하는 구석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부는 시일을 늦춰 Y2K를 해결하는 방법과 그로 인해 국민에게 닥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Y2K 해결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도 금물이다. 영국의 경우 국민들에게 Y2K로 인해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식량부족 사태에 대비해 최소 2주일 분의 비상식량을 미리 비축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미국 적십자사도 국민들에게 2000년 1월에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에 대해 준비할 사항을 공지하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Y2K를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국민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