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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워드는 유기화학자가 새로운 물질의 합성에 도전하는 것은 해도(海圖) 없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으로의 확장, 즉 인간 이성이 통제하는 자연 영역의 확장이었다. 그는 뉴턴 이후 근대과학의 흐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과학자였다.

우드워드(Robert Burns Woodward, 1917-1979)는 항생제인 세파로스포린의 전합성에 성공한 공로로 1965년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다. 수상 당시 우드워드는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였으며, 유명한 제약회사 시바-가이기가 자금을 지원해 스위스 바젤에 설립한 우드워드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1901년 첫 번째 노벨화학상이 반트 호프에게 주어진 이래 화학상 수상자는 수십명이 넘었지만 우드워드가 받은 찬사는 특별했다. 하버드 대학의 동료는 그를 유기화학이라는 분야의 토대를 만든 “에밀 피셔나 아구스트 케쿨레와 비견할 만하고 화학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기화학자그룹에 속한다”고 칭송했으며, 많은 이들이 우드워드의 유기합성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에 동의했다.

자연물을 실험실에서 합성

이들이 언급하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우드워드의 유기합성’이라는 것이 함축하는 의미가 단지 복잡한 합성과정을 오차 없이 정교하게 수행했다는 것만은 아니다. 우드워드가 연구주제로 선택한 대상은 천연물(natural product)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던 화학물질을 실험실에서 합성하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질의 영역에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던 금단의 문을 열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의 범위를 확장시켰다는 의미다. 자연을 통제하고 길들여서 유용함을 얻는다는 태도는 서구 근대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자 수사학이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이 그의 자연철학(자연과학)에 담은 메시지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from known to unknown)으로의 확장’, 즉 인간 이성이 통제하는 자연 영역의 확장이었다. 이같은 점에서 17세기 영국의 지식인들에게 지리상의 발견과 자연에 대한 탐구는 동일한 이미지를 가졌던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라는 이미지는 우드워드의 자신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1963년 ‘유기화합물 합성에서의 과학과 예술’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유기화학자가 새로운 물질의 합성에 도전하는 것은 “정복되지 않은 산을 오르는 것이며, 해도가 만들어지지 않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며,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행성을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했다. 이 점에서 우드워드의 성공은 뉴턴 이후의 과학의 흐름상에 정확히 위치한 것이다.

우드워드 이후, 그의 성과에 고무된 유기화학자들은 이제 새로운 물질을 발명하는 것에 도전한다. 간단한 단계의 천연물 합성에서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천연물의 합성으로, 나아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하는 과정으로 진행하는 유기합성의 발전은 인간 유전자 지도 작성계획, 생물공학, 인공지능 등과 같이 과학의 한계가 어디인가를 묻게 하며,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식인이 말한 것처럼 “과학은 멈출 수 없는 증기 기관차이며 과학의 법칙은 진보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12살에 대학생 실력

우드워드의 삶 속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한가지는 그의 천재성에 관한 부분이다. ‘노벨상 따라잡기’에서 다룬 인물 중 천재가 아닌 사람이 없겠지만, 우드워드는 교육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선정될 만큼 독특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지적 능력, 편집증이라 할 정도로 집요하게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점 등 흔히 통상적으로 천재라 분류되는 이들이 가지는 특성들을 우드워드는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우드워드는 어려서부터 화학실험에 관심이 있었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그는 집 지하실에 화학실험실을 만들고 어머니가 선물한 실험세트를 가지고 실험을 시작해서, 12살 무렵에는 독일 대학생들의 실험교과서였던 루드빅 게트만의 ‘유기화학의 실제적인 방법들’에 실린 거의 모든 실험을 다 해보았을 정도였다. 이런 식의 독학을 통해 그는 19세기 독일 유기화학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게 됐는데, 고등학교 졸업 당시 그의 수준은 이미 전문가의 단계였다고 한다.

그는 두 번의 월반을 거쳐 16세에 MIT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 입학한 우드워드는 이미 몇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수업에 참가하지 않고 실험실과 도서관에서 독학하면서 기말시험만을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퇴학을 당했지만, 그의 재능을 아낀 학과장 노리스의 배려로 1년 반 후에 재입학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정규과정을 이수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학력을 인정받아 19살에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우드워드는 천연물인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합성을 주제로 선정하고, 부분합성에 성공함으로써 20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자로서의 경력 또한 화려했다. 1941년 하버드 대학의 전임강사로 출발한 그는 놀라울 정도로 학문적인 업적을 생산해내 1950년에는 정교수로 승진을 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해인 1960년에는 하버드 대학에 4명뿐인 연구교수로 임명됐다. 이 기간 동안 우드워드와 공동 연구를 했던 하버드 대학의 연구자들 중 블로크가 1964년 생리학상을, 윌킨슨이 1973년에 화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우드워드의 연구 수준을 짐작게 해준다.


우드워드의 연구주제들은 당시 거대 제약회사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유기합성이 기본적으로 제약산업의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하루 16시간 연구

우드워드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는 그가 학생들로부터(박사과정 대학원생부터 박사후 연구원까지) 전폭적인 충성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실상 그의 천연물 합성에는 한두 명이 아닌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의 연구원이 투입됐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유능하고 헌신적인 연구원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우드워드는 그 자신이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했고, 학생들에게도 거의 혹사라 할만큼의 노동을 요구했던 사람이다.

왜 학생들은 이런 고난을 자처했을까? 첫째는 아마도 우드워드의 연구프로그램이 가지는 지적 흡인력을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드워드의 연구 프로그램은 최첨단이자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팀의 일원이었다는 점만으로도 직장을 얻는데 유리했다. 이 점은 과학의 역사에서 대학에 연구실험실을 최초로 제도화시킨 19세기 독일 기센 대학의 리비히 연구실과 비견할 만하다.

두번째는 그의 연구 프로그램 자체가 학문적으로나 산업체의 응용성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1950-60년대 우드워드가 선택한 주제들은 당시 세계적인 대 제약회사의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연구비를 지원할 준비가 돼 있었던 형편이었다. 예를 들어 폴라로이드는 거의 40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했고, 화이자와 머크 역시 30년 이상 연구비를 지원했다. 따라서 우드워드는 다수의 유능한 인적 자원, 시설과 연구비를 후원해주는 그룹을 적절히 배열해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에 집중시키는 연구구조를 만들어낸 셈이다. 더구나 이 연구 프로젝트는 과학적 중요성만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상징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점은 우드워드의 유기합성이 입자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거대과학의 특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일련의 시리즈를 통해서 살펴본 하버, 폴링, 페루츠, 캔드루, 그리고 우드워드의 삶은 성공한 화학자의 모습이 결코 자신의 전문분야에 고립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사는 괴짜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업적이 한 전문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분야들로 넘나들며, 심지어는 과학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여러 분야들과도 의미 있는 교류를 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가 과학과 과학자를 살펴보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과학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199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유지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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