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의 앨런 맥디아미드 교수는 플라스틱 전지(배터리)를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플라스틱은 누가 뭐라 해도 절연체라는 특징을 지닌 고분자다. 20세기 초 처음 발명된 이래 위험한 전기를 안전하게 공장과 가정으로 송전해주는 역할을 플라스틱이 맡았던 것은 바로 절연체라는 특징 때문이었다. 그런데 플라스틱이 전기가 통한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또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은 빛을 흡수하면 색이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용하면 스마트 윈도(smart window)를 만들 수 있다. 스마트 윈도란 여름철 맑은 날에는 창문을 어둡게 해서 실내에 들어오는 빛을 차단함으로써 냉방효과를 거두고, 겨울철 흐린 날에는 창문을 투명하게 해서 실내온도를 높이고 방안을 밝게 하는 창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현재 제너럴일렉트릭(GE)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 즉 전도성 고분자를 이용해 고급 스피커를 만들어 팔고 있다. 이 스피커는 PET 필름 위에 2백nm의 얇은 전도성 고분자를 코팅해 박막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전기신호에 따라 박막이 진동해 소리를 내는데, 이는 무기금속으로 만든 박막보다 만들기 쉽고 견디는 힘이 강했다. 특히 고음을 생생하게 재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도성 고분자에 대한 국내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몇 군데에서 연구하고 있으나 상품으로 만들어낼 단계는 아니다. KAIST 화학공학과 정인재 교수는 “전도성 고분자는 21세기 신기술로 연구가치가 매우 크지만,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연구수준은 초보단계”라고 말했다. 플라스틱 전지나 스마트 윈도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고분자의 특성을 연구하는 응용레올로지실험실
전도성 고분자의 비밀은 분자 안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전자에 있다. 맥디아미드 교수가 플라스틱 전지를 만들 때 사용한 폴리아세틸렌은 4개의 손을 가진 탄소원자가 다른 2개의 탄소와 1개의 수소와 결합하고 있다. 즉 1개의 손(전자)이 놀고 있는 것이다. 이 전자를 파이(π)전자라고 부르는데, 금속의 자유전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전도성 고분자의 원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77년 일본 도쿄기술연구소의 시라카와 박사다. 그는 폴리아세틸렌에 요오드를 도핑하면 전도도가 무려 10억배나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에서 전도성 고분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전지, 스마트 윈도, 정전기 방지용 액정, 센서, 광전지, 전자부품 등 그 응용분야는 매우 넓다고 본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도 가공할 수 있고, 가루나 페인트 형태로도 사용할 수 있다. 또 가볍고, 색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비쳤다.
요즘 휴대폰의 무게는 1백g 미만이다. 그 무게의 대부분을 전지가 차지하고 있다. 만일 전도성 고분자를 이용한다면 더욱 가벼운 전지를 만들 수 있고 아예 케이스 자체를 충전용 전지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전도성 고분자는 그 꿈을 실현하기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메커니즘을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에 수율이 좋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도성이 떨어진다는 점. 그러한 과제를 풀고 있는 곳이 있다.
KAIST 화학공학과 응용레올로지실험실은 정인재 교수를 중심으로 1982년부터 전도성 고분자를 비롯해 다양한 고분자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레올로지(rheology)는 ‘유변학’(流變學)이란 뜻으로 고분자의 흐름과 변형을 연구하는 학문. 정교수는 지금까지 90여명의 석·박사를 배출했으며, 현재는 5명이 석사과정을, 7명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