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여성 천문학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빙켈만. 여성을 교육시키는 사회 제도가 전무하던 시절이었기에, 뛰어난 재능을 갖춘 여성은 '능력껏 알아서' 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빙켈만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천문학자로 성장했으며, 남편과 아들의 조수역을 수행하면서 뛰어난 업적 을 쌓은 인물이다.
빙켈만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마을 천문학자로부터 천체관측 훈련을 받았다. 빙켈만의 꿈은 위대한 천문학자가 되는 것. 하지만 당시로서는 여성 혼자서 이런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빙켈만은 배우자를 통해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녀가 선택한 남성은 마을 천문학자의 수업 장소에서 만난 독일의 천문학자 고트프리트 키르히(G. Kirch)다. 그녀보다 무려 30살이나 연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라면 천문학의 열정을 평생 추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만족스러워 했다.
결혼 후 남편은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의 천문학자 지위에 임명됐다. 빙켈만은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늘 곁에서 함께 일했다. 밤새도록 번갈아가며 하늘을 관측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빙켈만은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급히 남편을 깨워 이 사실을 알렸고, 남편은 왕에게 이를 보고했다. 당시 혜성을 발견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남편도 20여년 전 혜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경력을 인정받아 천문학자로 임명됐다. 천문학의 대가 티코 브라헤(T. Brache, 1546-1601)의 명성 역시 1577년 혜성을 발견함으로써 크게 부상됐다.
하지만 빙켈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발견자의 이름이 빙켈만이 아니라 남편 이름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평소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던 아카데미 회원들로서는 빙켈만이 유명해지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년 뒤 보고서가 재발간됐을 때에 이르러서야 남편은 아내가 발견자임을 밝힐 수 있었다.
1710년 남편이 사망하자 천문학자 자리가 비었다. 빙켈만은 달력을 제작하는 작업의 조수 자리라도 좋으니 자신과 아들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아카데미에 청원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냉정하게 거부했다. 단지 그녀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카데미는 경험없는 다른 남성을 천문학자로 임명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이번에는 빙켈만 의 아들이 그 자리를 맡게 됐다. 그녀로서는 또한번의 기회가 다가온 셈이었다. 그녀는 다시 비공 식 조수로 일하며 아들의 작업을 도왔다. 물론 전처럼 무보수였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아카데미의 적대감은 더욱 심해졌다. 빙켈만은 참다 못해 이들에 대항했다. 예 를 들어 관측소에 방문객이 들어닥쳐도 이전처럼 뒷전에 물러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모습을 보 여줬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그녀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압력에 못이겨 관측소를 떠나게 됐다. 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천문학자로서의 경력은 끝이었다. 부당한 성차별로 인해 과학의 역사에서 뛰어난 여성 과학자가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