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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에서 빛은 관측자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속도를 갖는다. 잘 알려져있듯 초속 30만km다. 하지만 진공이 아닌 다른 매질, 광자의 전진을 방해하는 어떤 물질 속으로 들어가면 빛의 속도도 느려진다. 예컨대 물속에서는 1.5배 느려지고, 반도체에서는 3배 정도 속도가 느려진다. 반도체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물질 중 가장 굴절률이 큰 물질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느린 빛의 속도는 초속 10만km 정도인 셈이다. 느려졌지만, 인류가 쏜 가장 빠른 우주선인 뉴호라이즌 호보다 여전히 500배 이상 빠른 속도다.

빛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양자(광)메모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빠른 속도는 큰 골칫거리다. 전통적인 디지털처리방식은 0과 1을 나누기 위해 전압, 위상, 극성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양자메모리는 연속적인 빛을 시간대 별로 짧게 토막을 낸 ‘펄스’라는 디지털 정보를 만든다. 그런데 너무 빠른 속도가 문제다. 대화를 할 때 상대가 자신보다 수천, 수만 배 더 빨리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인위적으로 빛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투명한 빛은 느리다

1999년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공동연구진은 파장이 780nm인 근적외선 레이저를 매질에 통과시켜 초속 17m까지 늦추는 데 성공했다. 진공에서 잰 속도보다 천만 배나 느렸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 빛을 ‘느린 빛(slow light)’이라고 불렀다. 연구팀이 빛을 느리게 하는 데 사용한 매질은 루비듐 냉각원자였다. 일반적인 루비듐 원자 사이로 빛을 쏘면 거의 원래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데, 연구팀은 어떻게 빛을 한없이 느리게 만들 수 있었던 걸까.

복잡한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굴절률부터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고교 과정에서 굴절률(n)은 광속(c)을 특정 매질 안에서 빛의 속도(v)로 나눈 값이라고 설명한다. 굴절은 빛이 방향을 꺾는 것인데, 이것은 매질에 따른 빛의 속도 차이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광속과 매질에서의 빛의 속도를 비교함으로써 꺾이는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완벽한 정의는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은 사실 수많은 파장(λ)의 집합이고, 파장이 다른 빛은 매질에서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 단순히 광속을 매질에서의 속도로 나누기보다는 파장에 따라 달라지는 속도의 함수로 굴절률을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굴절률의 정의다. 이것은 보통 군속도(Vg) 나타내고, 이것을 추가한 굴절률을 집단 굴절률(ng)이라고 부른다(아래 식 참고). 평소에는 파장 별로 속도 차이가 작기 때문에 군속도를 무시할 수 있다.


다시 루비듐으로 돌아와서, 파장에 따른 루비듐의 빛 흡수 그래프를 살펴보자. 루비듐은 다른 파장의 빛을 거의 흡수하지 않고 유독 780nm 주위에서만 아주 날카로운 선폭으로 빛을 흡수한다(2번 그림 점선). 그런데 원래 빛에 또 다른 강한 빛을 추가하면 거꾸로 780nm만 흡수하지 않는 형태로 그래프가 달라진다(2번 그림 실선). 780nm를 주위로 마치 깊은 계곡이 생긴 것 같은 모양이다. 원래 100% 가까이 흡수되던 780nm가 이제는 100% 투과되는 투명한 상태로 변한다.

파장에 따른 빛의 흡수율 그래프가 두 개의 날카로운 봉우리 모양으로 바뀌면, 흡수율 그래프의 선폭이 좁아지고 군속도가 매우 느려진다. 그결과 집단굴절률이 매우 커진다. 이 현상을 ‘전자기유도투과(EIT, Electromagnetically Induced Transparency)’라고 부른다. 루비듐 이후에는 고체, 반도체, 광섬유에서도 EIT로 빛의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했다.


‘느림’과 ‘정지’는 다르다

빛 정보는 결국 펄스라는 불연속적인 파동의 모임이다. 알파벳에 비유하면 C, A, T에 해당하는 파동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펄스다. 그런데 이 펄스가 너무 빠를 때는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커진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들을 생각해보자. 시속 100km로 100m 간격을 두고 달리는 11대의 차량 행렬은 공간적으로 1km다. 그런데 톨게이트 부근에서 선두 차량의 속도가 느려져 뒤의 차들도 서행을 한다면 간격이 좁아져 전체 행렬이 10m 이내로 줄어들 수 있다(차량 길이를 무시한다고 가정하자). 마찬가지로 원래라면 수 km에 달하던 펄스가 느린 빛으로 변하면 수 mm가 된다. 정보가 압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보를 저장했다고 부를 수는 없다. C-A-T를 아무리 늘리고 줄여봤자, 시간이 지나면 C-A-T는 사라진다. 자고로 정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장했던 정보를 원할 때 그대로 꺼내볼 수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아예 빛을 멈추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기로 결정했다.

빛을 멈추기 위해 EIT의 원리를 한 번 더 응용한다. EIT에 사용되는 루비듐은 에너지 준위가 세 개인 3준위 원자계 물질이다(87쪽 3 참조). 3준위 원자계는 두 개의 바닥 준위와 한 개의 들뜬 준위가 있다. 일반적인 루비듐은 780nm 파장의 빛에 광자를 흡수하고, 이때 얻은 에너지로 전자가 1번 준위에서 2번 준위로 이동한 뒤 다시 1번 준위로 바로 되돌아오거나, 2번에서 3번을 거쳐 1번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원래 빛(조사 빛)보다 강한 새로운 빛(제어 빛)을 쬐면 제어 빛과 매질의 상쇄간섭 효과로 전자는 빛을 흡수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780nm 파장의 조사 빛은 매질을 그대로 통과한다.

2000년 하버드대 연구팀은 여기서 한 번 더 의문을 던졌다. 만약 빛을 느리게 만든 뒤에 제어 빛을 끄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방해꾼이 사라지자 이미 속
도가 느려져 충분히 압축된 조사 빛이 뒤늦게 루비듐 전자에 흡수된다. 이 경우 전자의 에너지 흡수 경로는 1번에서 2번을 거쳐 3번에 안착한다. 이로 인
해 1번과 3번 사이에 새로운 굴절률을 만들고 이것이 전자에 새로운 스핀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C-A-T 모양의 펄스가 사라지고 전자의 스핀으로 정보의 형태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흡수된 상태의 빛을 ‘멈춘 빛’이라고 부른다. 이 상태에서 다시 제어 빛을 쏴주면 전자의 스핀에 저장돼 있던 C-A-T 펄스가 튀어나오는데, 이는 3번에 있던 전자가 2번을 거쳐 1번으로 돌아오는 가역적인 결과다.

하지만 아직까지 펄스에서 전자 스핀으로, 전자의 스핀에서 펄스로 다시 돌아온 빛의 정보 재현률은 10% 내외로 턱없이 낮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저
장시간이다. 펄스로 만들어진 전자 스핀의 보존 시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팽이를 굴렸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팽이를 굴려도(스핀이 생겨도), 이내 불규칙하게 돌거나 쓰러져 버릴 것이다. 전자의 스핀도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인 위상전이시간이 있다. 이는 매질의 고유 특성이기 때문에 만약 위상전이시간이 무한대인 매질을 찾는다면 빛을 멈춰 정보를 영원히 저장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고체매질의 위상전이시간은 1000분의 1초 미만이다. 최근에는 핵자기공명(NMR)의 원리를 차용해 프라세오디뮴(Pr)에서 위상전이시간을 100초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실효성은 낮다.




이제는 메아리 빛이다

과학자들은 ‘광자 울림(photon echoes)’이라는 방법을 대안으로 준비 중이다. 각기 다른 속도로 뛰는 선수들이 400m 원형 트랙에서 달리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출발선에 맞춰 정렬된 선수들이(정보를 저장한 초기상태) 신호가 울린 뒤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뛰어 정렬이 금세 흐트러진다(정보가 사라진다).

그런데 출발 T초 후에 이 선수들에게 ‘뒤돌아 뛰어!’라는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선수들이 각각의 트랙을 각자 일정한 속도로 뛴다고 가정한다면 2T초 후에는 모두 처음 출발선에 다시 도착하게 될 것이다. 광자들도 처음에 진동시킨 뒤 T초가 지나고 다시 돌아오게 하면 처음과 똑같은 파장의 형태를 띤다. 2T초마다 정보를 열어 볼 수 있는 일종의 메모리인 셈이다. 광자 울림은 정지 빛보다 오래된 기술이다. 1960년대 처음 등장한 광자 울림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고 고속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한때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낮은 재생효율과 극저온에서만 가능하다는 제약 때문에 1990년대 후반에는 자취를 감췄다. 2000년대 들어 정지 빛을 포함한 여러 양자메모리 방식들의 약점이 드러나자 극적으로 다시 부활했다.
 
 
느린 빛을 이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는 양자컴퓨터와 양자통신이다.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광주과학기술원 광양자센터가 주목하는 것은 느린 빛과 소리의 결합이다. 전자기파와 반응하는 기존의 빠른 빛과 달리, 느린 빛은 음파에 특이적으로 반응한다. 초음파와 연동하면 영화 ‘엘리시움’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빛진단치료’가 가능해진다. 현재 초음파 의술은 해상도와 대조도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어 암 진단에 한계가 있을뿐더러 치료는 아예 불가능하다. 같은 이유로 음파를 이용한 수중물체 식별도 제한적이다. 최근 북한 잠수함 50여 대가 사라졌을 때 속수무책이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느린 빛과 음파의 상호작용으로 수중 광영상통신 장비를 개발하면 잠수함이나 해저자원의 위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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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함병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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