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 뉴질랜드의 한 신문은 두살 난 남자 아기가 부모를 3명이나 두게 됐다고 보도했다. 레즈비언 부부 중 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정액을 기증받아 아기를 출산한 것이다. 뉴질랜드 법정은 레즈비언 부부에게는 공동 양육권을, 정액을 기증한 남성에게 공동 후견인 지위를 부여해 결국 한 아기에 3명의 부모가 탄생한 것이다.
2개의 난자로 수정란 만들어
그러나 이제 이런 법정 공방은 옛날 일이 될지도 모른다. 레즈비언 커플이 남성의 도움없이도 자신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 그것도 복제양 돌리와 같은 인간복제가 아니라 두 여성의 힘만으로 가능한 방법이다.
최근 한국과 일본 공동연구진은 실험용 쥐에서 정자 없이 난자만으로 건강한 새끼 쥐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본 도쿄농대의 고노 도모히로 교수와 한국 생명공학벤처기업인 마크로젠의 박은성 연구원, 이 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인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 공동연구팀이 난자로 자라날 미성숙 난자에 유전자조작을 가해 정자의 역할을 대신시킴으로써 결국 난자 2개로 정상적인 쥐를 탄생시킨 것이다.
‘네이처’ 4월 22일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연구팀은 유전자 조작을 한 난자의 핵을 다른 쥐의 난자에 이식하고 화학물질로 융합시켜 정상적인 수정란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배아를 대리모의 자궁에 이식해 최종적으로 2마리의 새끼 쥐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 가운데 1마리는 유전자의 발현을 조사하기 위해 희생시켰으나, 나머지 1마리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지난해 1월 태어난 이 쥐는 12마리의 새끼를 낳기도 했다.
수컷의 정자 없이 암컷의 난자만으로 새끼가 태어나는 일은 자연계에서도 일어난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수정없이 이뤄지는 이른바 단성생식은 벌이나 진딧물, 물벼룩과 같은 곤충이나 일부 어류, 그리고 닭에서도 일어난다. 예를 들어 여왕개미는 수개미와 교미를 해 일벌이 될 암컷을 낳지만, 수컷은 모두 교미를 하지 않은채 낳은 알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상위동물인 포유류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포유류의 난자와 정자는 모두 1벌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 이 둘이 만나 2벌의 염색체를 가진 개체가 태어나는 것이다. 드물게 난자의 염색체가 2벌로 분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발생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배아가 죽기 때문에 정자의 자극없이는 정상적인 발생이 불가능하다는게 정설이었다.
정자로 탈바꿈한 난자
이것은 염색체 1벌을 가진 난자 둘이 결합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바로 각인 유전자(imprinted gene)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2벌의 염색체는 정자나 난자로부터 1벌씩 받은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가 부모 양쪽에서 받은 염색체에서 모두 발현되면 유전적 이상이 발생하는 수십종의 유전자군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 유전자군은 어느 한쪽의 유전자만이 발현되도록 조절해야 하는데, 이를 유전자 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 한다. 해당 유전자는 각인 유전자라고 부른다. 정자에서 발현이 억제되는 유전자는 부계 각인 유전자, 난자에서 억제되는 경우는 모계 각인 유전자가 된다. 예를 들어 태반을 형성하는 유전자는 정자나 난자에 모두 있지만 실제로는 오직 정자의 유전자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난자의 태반 형성 유전자는 모계 각인 유전자인 것이다.
고노 교수 연구팀은 갓 태어난 새끼 쥐에서 미성숙 난자를 채취했다. 미성숙 난자에서는 아직 유전자 각인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러므로 여기에 정자에 나타나는 부계 각인 유전자를 만들어주면 난자로 정자를 대신할 수 있는 셈이다.
연구팀이 부계 각인 유전자로 지목한 것은 H19 유전자. 난자에서 H19 유전자가 발현되면 Igf2 유전자에 메틸기가 달라붙어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 반대로 정자에서는 H19 유전자의 발현은 억제되고 Igf2 유전자가 태아의 성장을 조절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난자끼리 결합시키면 결국 정자에서 온 유전자가 만드는 태아 성장 조절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아 정상적인 발생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H19는 정자의 부계 각인 유전자인 것.
연구팀은 미성숙 난자에서 H19 유전자를 포함한 1만3천여개의 염기를 떼냈다. 그 결과 정자를 대신하게 된 미성숙 난자는 다 자란 난자와 결합해 정상적으로 수정란을 형성했다. 또한 태아가 자라는 동안에는 정자를 대신한 미성숙 난자에서 유래한 Igf2 유전자가 태아 성장을 조절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냈다.
각인 유전자 탐색과 유전자 발현 추적에는 마크로젠의 고밀도 DNA칩이 활용됐다. 마크로젠의 박현석 사장은 “이는 한국의 유전자 분석 기술이 이미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 라며 “국내에서도 DNA칩을 이용한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될 것” 이라고 기대했다.
줄기세포 연구에 이용 가능성
그러나 엄밀히 말해 정자 역할을 대신한 미성숙 난자는 정자와 완전히 똑같은 각인 유전자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5백98개의 수정란을 만들었지만 태아로 자라난 것은 28마리뿐이었으며, 이것도 18마리는 대부분 미숙아로 사산했다. 결국 정상적으로 태어난 것은 단 2마리로 성공률이 0.3%에 불과하다. 게다가 단성생식을 위해선 여성 한명이 평생 만들어내는 수에 육박하는 수백개의 난자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번 연구결과를 성급하게 인간 불임치료나 레즈비언 부부의 임신에 결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고노 교수도 “포유류의 발생에 왜 암컷과 수컷의 존재가 필수적인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며 “이것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잘라 말했다. 이번 연구는 각인 유전자가 포유류에서 단성생식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는 의미만 가진다는 것.
일부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응용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고노 교수팀이 만들어낸 수정란을 배반포기 단계까지 분화시키면 여기서 줄기세포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인 유전자 연구의 권위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아짐 수라니 교수는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포유류의 단성생식을 인위적으로 유도해 여기서 줄기세포를 얻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고노 교수팀의 방법은 너무나 복잡한 것이어서 줄기세포를 얻는데 불필요하다” 고 일축했다.
최근 국내외 과학자들은 난자 자체를 수정란으로 분화시키는 단성생식법을 이용해 줄기세포를 얻는데 성공하고 있다.
불임시술 뒤 남은 냉동배아에서 얻은 줄기세포는 환자와 유전자가 달라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핵을 제거한 난자와 융합시키는 이른바 배아복제가 시도되고 있는 것도 이런 면역거부반응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복제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하면 바로 복제 아기가 태어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다. 단성생식은 이런 윤리적 문제가 없어 줄기세포를 얻는 새로운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미국의 생명공학기업인 어드밴스트셀테크놀러지(ACT)는 원숭이의 미수정란을 마치 수정된 난자처럼 세포분화시킨 다음, 4-5일 된 배반포기 단계에서 줄기세포를 분리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같은 해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소장도 정자와 수정하지 않은 쥐의 난자를 분화시켜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박 소장은 이 줄기세포를 심근세포로 분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미수정란을 배아로 분화시킬 때는 전기자극이나 화학물질을 가하는 방법들이 이용되는데, 박세필 소장 연구팀은 쥐의 난자에 일정 농도의 에탄올 자극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레즈비언 부부의 꿈
그렇다면 레즈비언 부부가 정자없이 자신들의 아기를 가질 수는 없을까. 실현 가능성이나 윤리적 논쟁을 접어두고 이제까지 나온 연구결과만을 두고 생각해보자.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론 인간복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윤리적 논란을 제쳐두고서라도 한사람의 체세포를 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원하는 경우엔 의미가 없다. 고노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레즈비언 부부 중 한사람의 체세포로 정자를 만드는 방법이다. 2001년 호주 모나시대의 오를리 라참카플란 박사 연구팀은 체세포가 가진 염색체 절반을 화학적인 방법으로 제거해 정자와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이것을 파트너인 여성의 난자와 융합시키면 여성들끼리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둘 다 난자를 생산할 수 없다면 아예 난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같은 해 미국 코넬대 잔피에로 팔레르모 박사는 다른 여성에게서 제공받은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다음, 난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성의 체세포를 융합시켰다. 여기서 다시 절반의 염색체를 뽑아내 최종적으로 난자를 만들어냈다. 박세필 소장도 같은 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다른 사람의 난자를 이용하는 것이 꺼림칙하면 아예 자신의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뽑아 난자로 분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경우 염색체가 여성에게서만 온 것이기 때문에 태어날 후손도 딸이 된다. 전설상의 아마조네스 여성 전사들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