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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미국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양자전기역학의 성립은 현대물리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47년 셀터섬 학회는 미국과학자들이 양자전기역학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1961년의 솔베이 회의에 모인 과학자들. 양자전기역학을 성립시킨 젊은 과학자들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원안의 인물은 좌로부터 도모나가, 다이슨, 파인만, 슈윙거.
 

노벨상이 1901년에 시작됐으니 그 역사도 어느덧 1백년이 다 됐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 두 인류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인물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노벨상 수상자 선정이 과연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계속 말이 많았다. 가령 특정한 연구 분야에 수상자가 몰렸다거나 비슷한 연구 성과에 대해 누구는 상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1965년에 세 명의 이론 물리학자, 미국의 파인만(1918-1991)과 슈윙거(1918-), 일본의 도모나가 (1906-1979)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 세 사람의 수상 업적은 1948-1949에 걸쳐 독자적으 로 양자전기역학을 새로이 공식화해 상대론과 부합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양자전기역학의 공식화에서 이들 못지 않게, 어쩌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다이슨(Freeman Dyson, 1923-)은 노벨 상 수상에서 제외됐는데, 이 때문에 그 해의 노벨상 위원회에 보내진 과학자들의 시선은 그리 반 갑지 못했다.

걸음마 수준의 미국물리학

수상자들도 깨닫지 못할 만큼 같은 문제에 대한 세 사람의 접근법과 수학 방법은 서로 달랐다. 다이슨은 이 세 이론이 궁극적으로는 동등하다는 점을 보이고, 새로운 양자전기역학의 방법을 쓰 면 핵 현상에도 장이론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1965년의 노벨상 위원회가 무엇 때문에 다이슨만 제외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수상자 선정과 관련한 기록을 남 기지 않는다는 노벨상 위원회의 규정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파인만, 슈윙거, 다이슨, 그리고 도모 나가가 중요한 업적을 세울 당시의 사정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미국이 부상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는 있다.

사실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새로운 이론 물리학에서 미국은 불모 지나 다름없었다. 유명한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 이론물리학의 주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유럽 출신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런 내용을 연구하는 학자도 없었 고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교수도 없었다. 오펜하이머 같은 야심있고 이론물리학에 관심 있는 미국 대학생은 대학 졸업 후, 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토종 물리학자의 성장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에서도 자생적인 이론물리학자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 어졌다. 유럽에서 연구 경험을 쌓고 돌아온 과학자들과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일류 과학자들이 대학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 저명한 유럽 과학자들 이 미국 대학을 방문해 강연을 하는 일도 잦았다. 이제 미국 학생들은 새로운 이론물리학을 배우 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학 오는 일도 생기는 등 미국의 학계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자전기역학 확립의 주역인 파인만과 슈윙거는 모두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토종' 미국 이론 물리학자 세대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았으며 연구를 위 해 유럽을 다녀와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MIT 출신인 파인만은 1942년 프린스턴 대학 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쟁 연구가 끝난 뒤 바로 코넬 대학의 교수가 됐다.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낸 슈윙거 역시 21세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오펜하이머 밑에서 연구했 으며, 1945년부터는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히려 영국 태생인 다이슨이 케임브리 지 대학을 졸업한 후 1947년에 이론물리학을 연구하러 미국으로 건너왔다. 다이슨은 1949년까지 양자전기역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2년을 각각 코넬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보낸 후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51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파인만의 뒤를 이어 코넬 대학의 교수가 됐고 일 생동안 미국에서 연구했다.

젊은 학자들만 모이자

1940년대 말 양자전기역학의 공식화는 이 토종 미국 물리학자들이 '미국인' 방식으로 양자전기 역학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계기는 미국 과학아카데미가 후원해 1947년에 셀터 섬에서 열린 소규모 학술회의였다. 셀터 회의는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자리로 돌아 간 젊은 물리학자들이 한 곳에 모여 중요한 연구 과제를 함께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이를 통해 전쟁 업무로 중단된 이론물리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됐다. 뉴욕주 남동부의 작은 휴양지, 셀터섬에서 열린 회의는 매우 실용적으로 운영됐다. 주로 동부의 대학에서 연구 중인 25명 안팎의 젊은 이론 물리학자들만 초청했는데, 이는 유럽의 대가를 불러올 경우 돈 도 많이 들고 젊은 학자들이 귄위에 주눅들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을 걱정한 주최측의 배려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별, 파인만과 슈윙거는 물론 초청받았다. 오펜하이머가 좌장을 맡았지 만 공식적인 발표는 문제 제기에 그쳤고, 토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들은 밥 먹고 산책할 때는 물론이고 밤늦게까지 호벨 로비에서 토론을 계속했다. 셀터 회의에서 제기된 문제는 뒤이은 1948년의 포코노 회의, 1949년의 올드스톤 회의를 통해 해결돼 결국 양자전기역학의 공식화와 재 규격화(renormalization) 이론을 낳았으니,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미국식 이론물리학

셀터 회의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램(Willis Lamb)과 레더포드(Retherford)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행한 수소 스펙트럼 미세 구조 실험이었다. 이 실험 결과는 디랙의 상대론적 방정식에 의해 설명 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회의에서 확인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양자전기역학의 당면 과제 가 됐다. 회의가 끝난 후 슈윙거는 하버드로, 파인만은 코넬로 돌아가 각자 이 문제 풀이에 몰두 했다. 코넬에서 연구하던 다이슨은 역시 셀터 회의에 다녀온 베테를 통해 슈윙거의 아이디어를 들었고, 파인만과도 사적으로 이 문제를 계속 토론했다.

슈윙거와 파인만은 포코노 회의와 올드스톤 회의에서 각자의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다이슨은 베테의 강력한 추천으로 포코노 회의부터 참석할 수 있었다. 포코노에서는 슈윙거가 가장 주목 받았고, 올드스톤에서는 파인만과 다이슨의 이론이 학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한편 일본의 도모나가는 '뉴스위크'에서 셀터 회의 소식을 접하고 1943년 일본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을 1948년 오펜하이머에게 보냈다. 오펜하이머는 이 논문을 포코노 회의 참석자 모두에게 돌렸다. 이 편지를 보고 다이슨은 도모나가, 파인만, 슈윙거의 연구를 모두 알게 됐고, 결국 1949년에 세 이론이 동등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 결과 등장한 재규격화 이론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램의 실험 결과를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이는 유럽의 이론물리학자들에 비해 실용적이고 실험을 중시하는 미국의 학자들이 만족할만한 결과였고, 이론물리학의 주된 흐름이 미국화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9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은경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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