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선정되나?
노벨재단은 기금을 운용하고, 시상행사를 주관할 뿐 수상자의 선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물리학상과 화학상 심사), 카롤린스카 연구소(생리의학상 심사)의 토의를 거쳐, 왕립 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종 결정한다.
먼저 재단이 후보 추천을 의뢰한 각국의 학자들, 그리고 스웨덴 아카데미의 회원들이 후보를 추천한다. 후보명단이 모이면 아카데미가 선출한 5명의 심사위원이 업적을 심사한다. 1차 심사가 끝나면, 각 분과노벨상 위원회를 열어 다시 심사하고, 왕립 아카데미 총회에서 투표로 최종 결정한다.
아카데미의 총회원은 4백2명(스웨덴인 2백67명, 외국인 1백35명)으로 구성돼 있고, 정년은 65세다. 생리의학상 후보를 심사하는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사실 의과대학이지만 전통에 따라 연구소로 불린다. 1810년 스웨덴 정부가 군의관 양성을 위해 세운 연구소가 모태가 됐다.
상금은 얼마?
노벨상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엄청난 양의 상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노벨상금은 천문학적이다. 설립 초기 상금은 스웨덴 대학교수의 25년치 연봉에 해당됐고, 미국 대학교수로 치면 15년치에 해당됐다. 단독 수상의 경우 1998년 기준으로 약1백만달러 정도니 현재의 우리 돈으로는 약 13억원에 해당된다.
상금의 액수는 매년 조금씩 변하는데, 이는 노벨재단의 재정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노벨재단의 최초 기금은 약 3천1백만 크로노르(약 54억원)이었던 것이 1994년 현재 약 17억7천만크로노르(약 3천억원)으로 증가했다. 상금은 1901년 설립 당시 1만5천크로노르(약 2천5백만원)였던 것이 1981년에는 약 1백만크로노르(약 1억7천만원), 1990년 4백만크로노르(약 6억8천만원), 1995년에는 약 7백20만크로노르(약 12억원)로 해마다 증가해왔다. 올해 수상자는 약 7백60만크로노르(약 13억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
노벨재단은 기금 운용에 대해서도 노벨상감인데, 1백여년의 역사 동안 달라지는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기금을 잘 운용해 상금이 매년 증가해왔다. 소비자 물가지수에 비교할 때도 상금의 가치가 매년 증가해 수상자들이 누리는 경제적인 혜택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부자, 부부, 형제 수상자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직 한명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한 가족에서 두세명씩 노벨상을 받은 대단한 집안도 많았다. 먼저 부자 수상의 경우, 윌리엄 헨리 브래그(아버지)와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아들)가 X선 결정학으로 1915년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것은 특이한 기록이다. 그외 부자 수상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세대(약 30년)를 건너 수상한 것이 대부분이다. 조셉 톰슨(1906년 물리학상)과 아들인 조지 P. 톰슨(1937년 물리학상), 닐스 보어(1922년 물리학상)와 아들인 아게 보어(1975년 물리학상), 마네 지그반(1924년 물리학상)과 아들인 카이 지그반(1981년 물리학상), 폰 오일러-켈핀(1929년 화학상)과 아들인 폰 오일러(1970년 생리의학상)가 부자 수상의 대열을 잇고 있다.
부부가 함께 수상한 예로는 1903년 물리학상을 받은 퀴리 부부(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1935년 화학상을 받은 졸리오 부부(프레데릭 졸리오와 이레네 졸리오 퀴리), 1947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코리 부부(칼 코리와 게르티 코리)가 있다. 특히 퀴리 집안은 노벨상을 아예 가족잔치라고 할 만큼 어머니와 딸, 사위와 딸, 부부 등 어느 기록에도 포함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모녀 수상은 마리 퀴리와 딸 이레네 졸리오 퀴리가 유일하다. 이 밖에 형제 수상의 예로 1969년 경제학상을 받은 얀 틴베르겐과 197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동생 니콜라스 틴베르겐이 있지만 형제 모두 과학분야에서 수상한 경우는 아직 없다.
그 어려운 상을 두번씩이나?
한번도 받기 어려운 노벨상을 두번 받은 사람들이 있다. 노벨2관왕은 지금까지 4명 나왔다. 잘 알려진대로 마리 퀴리는 1903년 물리학상과 1911년 화학상을 받았다. 물질의 구조를 해명하는데 공헌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1954년 화학상으로, 그리고 1962년에는 반핵운동에 앞장선 공로로 평화상을 받아 2관왕이 됐다. 이들은 분야를 달리해 두번 받은 경우이고, 한분야의 상을 두번 받은 경우도 2명 있다. 존 바딘은 1956년 트랜지스터 연구로 물리학상을, 1972년 초전도 현상의 연구로 물리학상을 연거푸 받았다. 프레데릭 생거는 인슐린 구조 결정의 공로로 1958년 화학상을, 핵산의 염기배열 결정으로 1980년 화학상을 받아 4번째 노벨 2관왕이 됐다.
여성 수상자는 몇 명?
흔히 여성은 자연과학분야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차별이 만들어낸 선입견일 뿐 노벨상의 역사에는 남녀차별의 어려움을 뚫고 위대한 성취를 이룩해낸 여성과학자들이 있다. 1998년 현재 총11회 10명의 여성과학자가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 이레네 졸리오 퀴리(1935년 화학상), 게르티 코리(1947년 생리의학상), 마리아 괴펠트-마이어(1963년 물리학상), 도로시 호지킨(1964년 화학상), 로절린 앨로(1977년 생리의학상), 바바라 맥클린톡(1983년 생리의학상), 레비 몬탈치니(1986년 생리의학상), 게트루드 엘리언(1988년 생리의학상), 누슬라인 폴하르트(1995년 생리의학상). 지금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수많은 여성과학자들이 어려움을 격고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의 수상은 더욱 값진 것이다.
노벨수학상은 왜 없는가?
노벨은 이론과학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수학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노벨이 ‘발명이나 발견’에 대해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긴데서도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 물리학 분야에서 초기에는 거의가 실험물리학에 수상자가 몰려있었고 이론물리학은 1919년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으로 상을 받기까지 늘 ‘찬밥 신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노벨이 미탁-레플러라는 수학자와 한 여자를 놓고 경쟁하다가 사이가 틀어져, 수학상을 만들면 1회 수상자로 미탁-레플러가 받을 것이 우려돼 그랬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증거도 없고 설득력이 희박하지만,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퍼뜨려 수학상 이야기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노벨의 연적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업적 인정에 몇년 걸리나?
첸닝 양과 리슝타오는 약한 상호작용에서의 패리티 비(非)보존에 관한 연구로 1957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들의 연구는 바로 그 전해에 발표된 논문이 인정받은 경우다. 이들은 논문을 발표한지 약 10개월만에 노벨상을 받았으니 초고속 수상에 해당한다. 그외 1987년 고온 초전도체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베드노르츠와 뮐러, 1935년 인공방사성 원소로 화학상을 수상한 졸리오 부부, 1923년 인슐린의 발견으로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밴팅과 맥클리어드 등도 논문발표 후 1년 안에 수상한 경우에 해당한다.
반면 에른스트 루스카는 전자광학과 전자현미경에 관한 공로로 1986년에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그의 연구업적은 이미 1931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업적이 인정되는데 무려 55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1988년에 사망했으니 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예 못받을 뻔했다. 또 198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바라 맥클린톡도 유동하는 유전자를 발견한 업적이 인정되는데 무려 49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루스카를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일까. 수상 당시 루스카는 80세, 맥클린톡은 81세의 노령이었다.
최연소, 최고령 수상자는?
1915년 X선 결정학에 대한 공로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는 불과 25세로 최연소 노벨상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학자들에 따르면 아마도 브래그의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 외 하이젠베르크(1932년 물리학상)와 폴 디랙(1933년 물리학상), 칼 앤더슨(1936년 물리학상), 리슝타오(1957) 등이 31세 수상으로 최연소 수상의 뒤를 잇고 있다.
한편 1966년 암원성 바이러스의 발견으로 생리의학상을 받은 페이돈 라우스는 수상 당시에 87세로 최고령 수상자가 됐다. 이에 이어 197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칼 폰 프리쉬는 꿀벌들의 행동양식을 연구한 공로로 또다시 87세에 노벨상을 수상해 최고령 수상의 타이기록을 세웠다.
물리학상에서 젊은 수상자가 많고 생리의학상에서 노령수상자가 많다는 점이 두 학문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미국의 독무대?
지금까지 최다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과학분야의 수상자는 지금까지 총 4백48명이었다. 이 중에서 미국은 1백83명을 배출했고, 영국이 64명, 독일 61명, 프랑스 23명, 스웨덴 7명, 스위스 6명 순이다. 최다 수상자 배출 대학은 역시 미국의 하버드 대학으로 지금까지 25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 뒤를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20명), 미국의 스텐퍼드대학(13명), 캘리포니아 공과대학(12명) 등이 잇고 있다. 연구소로는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가 13명을 배출해 독보적이고, 그 뒤를 미국의 벨연구소(6명), 록펠러의학연구소(6명) 등이 잇고 있다.
과학분야에서 아시아인 수상자는 찬드라세카(인도, 1930년 물리학상), 유가와 히데키(일본, 1949년 물리학상), 양첸닝(중국, 1957년 물리학상), 리슝타오(중국, 1957년 물리학상), 도모나가 신이치로(일본, 1965년 물리학상), 에사키 레오(일본, 1973년 물리학상), 팅차오충(중국, 1976년 물리학상), 압두스 살람(파키스탄, 1979년 물리학상), 후쿠이 겐이치(일본, 1981년 화학상), 리유안(중국, 1986년 화학상), 도네가와 스스무(일본, 1987년 생리의학상) 등 11명이다.
수상자의 출생국과 수상 당시의 활동국가가 다른 경우가 많아 각기 아전인수격으로 자국 명단에 포함시키려고 하므로 노벨상의 국가별 통계는 혼란이 많다. 아시아인의 수상 통계도 일본인 수상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활동한 학자들이다.
한국인 수상자는?
아쉽게도 한국인 수상자는 노벨상 전분야를 통틀어 아직 한명도 없다. 생리의학분야의 김성호, 이서구 박사 등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언제 노벨상의 영광을 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출생지로만 따지면 한국도 한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이미 배출했다. 분자화학 분야에의 공헌으로 1987년 화학상을 받은 찰스 페더슨이 이 사람이다. 그는 1904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항해기사로 극동에 출항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 북한지역의 운산광산에서 기계기사로 근무한 노르웨이인이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콩과 누에를 무역하던 일본인의 딸이었다.
그는 8세가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어는 하지 못했다. 당시 운산광산은 미국인이 운영하고 있어서 그는 어려서부터 미국식 문화에 익숙해 영어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8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하이오주의 대이튼 대학과 MIT 대학원을 거처 듀폰사의 연구소에서 학문활동을 했다. 그의 아버지가 노르웨이인이기 때문에 보통 그를 노르웨이인으로 분류하지만, 노벨상 수상 당시의 국적은 미국으로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