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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로 다시 돌아온 우주영웅 글렌

 

36년 전 글렌의 모습


몇년만에 다시 입어보는 우주복인가. 10월 29일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할 예정인 글렌은 새롭게 지급된 우주복을 만져보면서 출산을 몇일 앞둔 산모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36년 전 그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구궤도를 돌고 돌아왔을 때 4백만명의 인파가 뉴욕 거리를 메우며 그와 그의 부인 애니를 축하해주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우주복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우주여행을 떠날 때 입었던 우주복이 생각났던 모양이었다. 그때의 우주복은 해군기 조종사들이 입던 옷을 수선했던 것인데, 우주복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우주복은 대기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우주비행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조금도 빈틈없이 일정한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글렌의 우주복은 전체를 여압복으로 만들지 못하고, 팔꿈치와 무릎 등 일부 관절부분은 천만 댄 상태였다. 또 옷 전체를 어찌나 견고하게 만들었던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내가 탔던 머큐리 우주선이 사고라도 일으켰다면. ” 글렌은 아찔했던 당시의 우주여행이 떠올랐던 것이다.

글렌이 우주왕복선을 탈 때 입게 될 우주복은 공기가 전혀 없는 우주공간에서 적절한 대기압을 유지해주고, 암흑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각종 장치가 부착돼 있다. 예를 들면 호흡할 수 있는 산소공급장치(100% 산소로 이뤄져 있음), 생리현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오줌수거통, 체온유지장치, 통신장치, 컴퓨터 등이 있다.

글렌에게 신기한 것은 우주복만이 아니다. 그는 첫 우주여행에서 지구를 3바퀴 돌았지만 그 기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는 10월 29일 디스커버리호(STS-95)에 탑승하게 되면 그는 9일 동안 우주에서 생활해야 한다. 따라서 칫솔질을 하고 나서 티스푼에 물을 따라 입안을 헹구는 법(이때 양치물을 삼키거나 물방울이 튀지 않게 물수건에 뱉어야 함), 무중력에서 옷을 입고 벗는 법, 화장실을 사용하는 법, 물수건을 이용해 세수하고 목욕하는 법, 식사하는 법, 침낭에 들어가 허공에 매달려 자는 법 등을 배워야 했다.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무중력 적응 훈련이었다. 우주선은 지구를 돌면서 끊임없이 자유낙하를 하기 때문에 무중력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생활하는 일은 중력이 모든 물체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지상과 사뭇 다르다.

무중력 적응 훈련은 비행기 안에서 이뤄진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다가 자유낙하를 하면 약 20초 동안 무중력이 발생하는데, 이때를 이용해 몸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물건을 주고 받는 훈련 등이 실시된다. 보통 이 훈련을 마치면 젊은 비행사들도 구토를 하는 등 혼비백산하기 일쑤다. 그런데 글렌은 77세의 나이로 이 훈련을 무사히 견뎌냈다.

조종사에서 정치가로의 변신

1년 전 글렌이 우주여행에 나서겠다고 공언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아무리 우주비행사가 되는데 나이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77살의 나이로 훈련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지구궤도를 돈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명예도 과분한데, 세계 최고령 우주비행사(현재까지의 기록은 1996년 61세의 나이로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를 탔던 머스그레이브)라는 명예도 함께 거머쥐려고 하다니. 심지어 198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위해 경선에 출마했다가 졌던 3백만달러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우주여행에 나선다는 말도 돌았다.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인 그를 우주비행사로 선발하도록 누군가 압력을 넣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환영하는 ‘돌아온 우주영웅’이었다.

글렌의 정식 이름은 존 허셀 글렌 2세(John Herschel Glenn, Jr.). 그는 1921년 7월 21일 오하이오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이웃마을인 뉴콘코드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대학원(엔지니어 전공)까지 마쳤다.

1943년 해군에 입대한 그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전투조종사로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압록강 전투에서는 3대의 미그기를 격추시켜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57년 그는 F8U 크루세이더(십자군이란 뜻)를 몰고 LA와 뉴욕을 3시간 23분에 주파했는데, 이는 최초의 초음속 대륙횡단비행이었다. 9천시간에 이르는 비행기록과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글렌은 1959년 4월 미국 최초의 우주조종사 후보로 선발됐다.

1962년 2월 20일 그는 마침내 세퍼드와 그리솜에 이어 미국인으로는 3번째로 우주여행에 나섰다. 그가 탑승한 우정 7호(머큐리 우주선)는 4시간 55분 동안 지구를 3바퀴 돌았다. 그런데 우주여행을 앞서 했던 두 사람은 지구를 완벽하게 한바퀴 돌지 못했기 때문에 글렌은 사실상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라고 할 수 있다. 또 글렌은 1961년 옛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함에 따라 미국인이 받았던 충격을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글렌의 신체조건은 이후 아폴로 우주선을 개발할 때 우주비행사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64년 1월 NASA에서 퇴임한 글렌은 끊임없이 정치에 도전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존 F. 케네디와 글렌은 ‘존’이라는 이름이 같은데서 친분이 싹텄다. 글렌이 지구로 귀환했을 때 존 F. 케네디는 케이프 캐너베럴 우주기지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존 F. 케네디가 세상을 뜨자 글렌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1968년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 나섰다가 피격을 당했을 때도 글렌은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당시 로버트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아버지 곁에서 울고 있던 5명의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날 밤 로버트는 죽었다. “전화를 받고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이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였다”고 글렌은 나중에 회고했다.

케네디가(家)와의 인연, 우주영웅으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 입문은 1974년에야 달성됐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해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는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 정부 폐기물, 생화학무기와 핵무기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1993년 그는 2차대전 때 미국 정부가 고의로 방사성 물질을 항공기로 투하했다고 고발했고, 1994년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인도, 이란 등 8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미국이 간접적으로 기자재를 수출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만약 제3세계가 핵실험을 강행하려고 한다면 글렌법을 먼저 잘 읽어봐야 한다. 글렌이 만든 이 법은 핵실험을 하는 나라에 대해 미국이 세계은행을 통해 경제적 제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글렌은 한국정부와의 관계도 긴밀하다. 그는 1993년 1월 제1차 한미 과학기술협력포럼에 미국측 위원으로 참가했고, 같은 해 7월 권영해 국방장관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미 군사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만났던 주요 인사였다. 또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제막했던 한국전쟁참전기념탑은 글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그리고 올해 6월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글렌은 24년 동안(4번 당선됨) 상원의원으로 지냈고 정부문제위원장까지 맡았지만, 같은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과 달리 여자문제만은 전혀 없었다. 부부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뉴콘코드는 글렌의 고향이자 아내의 고향이기도 하다. 글렌이 두살 연상의 애니 마가레트 캐스터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큰 눈, 회색 머리결,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여성스러운 웃음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후 몇년을 사귀다가 글렌이 해군에 입대하던 해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55년 동안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의 아내는 말을 심하게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1978년 언어치료를 받을 때까지 글렌은 35년 동안 아내의 말 수발을 들어야 했다. 아내가 혼자 레스토랑에 가면 웨이터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을 대신 주문하는 일은 그의 일상사였다.

정치인으로서의 탁월한 명성, 행복한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위험한 우주로 다시 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36년 전 정신없이 지나쳤던 지구의 모습을 다시 음미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우주에 자신의 몸을 헌납하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24년 동안 상원의원을 지냈던 존 글렌


최고령 우주비행사의 임무

글렌이 탑승할 디스커버리호의 승무원은 모두 7명. 선장인 커트 브라운(42세)은 5번째 우주여행에 나서는 베테랑 우주조종사이고, 홍일점인 무카이 치아키(46세, 일본)는 1994년에 이어 두번째로 우주여행에 나서는 생리학박사이자 심장혈관 전문의다. 무카이는 글렌과 더불어 생명과학실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 디스커버리호의 여행 목적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유럽우주기구(ESA)와 일본항공우주사업단(NASDA)이 추진할 생명과학실험과 무중력과학실험이고, 둘째는 통신과 지구기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태양풍을 스파르탄 위성을 이용해 조사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렌의 노화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저승과 같은 곳이다. 이곳에 파견된 우주비행사들은 뼈에서 칼슘이 빠지고 근육이 쇠퇴하는 등 인간이 늙어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글렌이 우주여행에 나선 목적은 그 원인을 밝힘으로써 노화연구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우주에서 겪게 될 현기증, 골다공증, 면역능력 감퇴, 수면 장애 등은 인간의 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게 될 것이다. NASA의 의학자들은 “노화 연구에 글렌이 최적의 실험대상인 것은 글렌에게는 40여년 동안 철저하게 관리해 온 신체에 대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글렌이 우주에 머무는 9일 동안 실험동물처럼 수동적인 임무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샬우주비행센터에서 계획한 특별한 무중력 실험을 수행한다. 인간의 피를 뽑지 않고 인공혈액으로 수혈하는 일, 아무런 부작용없이 인조뼈를 이식하는 일, 암세포를 새로운 세포로 대체하는 일 등은 의학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글렌은 유전공학을 이용해 수혈할 헤모글로빈 제품을 개발하고, 다른 조직에 이식했을 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단백질을 생산하고, 인조뼈를 이식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 등을 모니터하는 일을 담당한다.

질병과 이를 치료할 신약을 개발하는 일도 글렌에게는 중요한 과제다. 당뇨병에 효과가 큰 인슐린 구조를 연구하는 일, 샤가스병과 호흡기 바이러스(Respiratory Syncytial Virus)의 연구가 그것이다. 전세계적으로 2천만명의 환자를 둔 샤가스병은 근육을 무력하게 만드는 병이다.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방문했던 찰스 다윈도 이 병에 걸려 평생을 고생했다고 한다. 기도와 폐에 감염되는 호흡기 바이러스는 매년 4백만명의 유아를 괴롭힌다. 이중 10만명은 병원에 입원하고, 4천명이 목숨을 잃는다. 글렌은 두 병을 치료할 단백질을 생산하는데 참여한다.

식물도 재미있는 연구과제다. 식물의 맛과 향을 내는 휘발성 물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무중력에서 식물성장실험을 통해 연구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현재 미국은 매년 1백40억달러의 콩을 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그래서 질병에 강한 콩을 기르는 것은 큰 관심사다. 글렌이 수행할 연구는 질병에 강한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콩과식물의 묘목으로 어떻게 옮겨지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만약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유전자 이식을 통해 질병에 강한 콩과식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렌이 해야할 마지막 일은 절연력과 에너지 보관력이 뛰어난 에어로젤(Aerogel)을 실험하고, 인체에 흡수가 잘되는 아주 작은 마이크로캡슐을 만드는 것이다. 에어로젤은 가장 가벼운 고체로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절연력 때문에 응용분야가 매우 넓다. 에어로젤 한 장은 30장의 일반유리와 같은 차단효과를 지니고 있다. 다만 약점은 투명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균일한 구멍을 뚫어 투명한 에어로젤을 만들려고 한다. 한편 마이크로캡슐은 암을 치료할 때 특정부위에 찾아가 화학적 처리를 함으로써 부작용을 줄이려는 치료요법에 필요한 물질이다.

인간의 노화 연구, 새로운 혈액과 질병 치료제의 개발, 식물 연구, 산업물질을 개발하는 일은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글렌의 우주여행을 우주조종사와 상원의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지만, 글렌 자신은 “과학자로서 마지막 우주여행에 도전한다”고 말하고 있다.
 

199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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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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