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지 ‘네이처’ 8월 22일자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다. 그간 존재 가능성만 알려져 있던 초기 인류 사이의 이종교배를 입증할 수 있는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말 그대로 가능성 수준에 머물러 있던 초기 인류의 이종교배가 DNA 수준에서 처음 확인됐다.
DNA에 남아있는 인간 이종교배의 흔적
스반테 페보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장이 이끄는 연구팀은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2012년에 발견된 뼛조각 화석을 분석했다. ‘데니소바 11’이라고 별명을 붙인 이 뼛조각에 붙어 있던 콜라겐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뼛조각의 주인은 5만 년 전 사망한 13세 여자아이인 것으로 확인됐다.
doi:10.1038/s41586-018-0455-x
연구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뼛조각 속 유전자였다. DNA를 분석한 결과 부모의 유전자가 각각 다른 인종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네안데르탈인, 아버지는 데니소바인이었다. 페보 소장은 “네안데르탈인 DNA와 데니소바인 DNA가 섞여 있지 않고 각 염색체에 나눠져 있었다”며 “이를 토대로 부모가 서로 다른 인종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해 어머니를 네안데르탈인으로 추정했다. 페보 소장은 “화석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네안데르탈인의 것”이라며 “미토콘드리아는 모계(母系) 유전만 가능한 만큼 이 소녀의 어머니는 네안데르탈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안데르탈인은 35만 년 전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 인류로 유럽에서 주로 생활했다. 반면 데니소바인은 주로 아시아에서 생활했던 초기 인류다. 두 인종은 약 40만 년 전 분리됐으며, 3~4만 년 전 비슷한 시기에 각각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다른 인종 사이의 이종교배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학계에서 여러 차례 제기됐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 간 교배에 대한 가설은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당시에는 두 종이 서로 같은 종이라는 증거로 여겨졌다”며 “최근에는 유전자 분석을 토대로 서로 다른 종이지만 교배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샤론 브라우닝 미국 워싱턴대 바이오통계학과 교수팀은 국제학술지 ‘셀’ 3월 15일자에 현생 인류와 데니소바인의 교배 흔적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오세아니아와 동아시아 사람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데니소바인 혈통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doi:10.1016/j.cell.2018.02.031
이번 ‘네이처’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유전자의 비율이다. 연구팀은 유전자 정밀 분석을 통해 뼛조각 화석 속 유전자의 비율을 알아냈다. 기존의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DNA 표본과 비교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한 것이다.
분석 결과 소녀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38.6%,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를 42.3% 보유하고 있었다. 페보 소장은 “보통 직계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절반씩 물려받는데, 소녀의 경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를 각각 40%가량 갖고 있었다”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거의 같은 비율이라는 것은 이 유전자들을 소녀의 부모로부터 각각 물려받았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종교배 이후 자손 번식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 소녀의 어머니는 약 12만 년 전 서유럽에서 이주한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이며, 아버지의 경우 먼 조상 중에 네안데르탈인 선조가 있었다. 즉, 이종교배가 이뤄진 이후 자손이 번식하면서 유전자가 재차 섞인 것이다.
보통 이종교배는 자연적으로 잘 발생하지 않으며, 이종교배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손은 생식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초기 인류가 이종교배한 경우에는 자손이 번성했다. 이 교수는 “인간을 비롯해 개코원숭이 등 여러 종에서 자손 번식이 가능한 이종교배 사례가 학계에 보고 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종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종 분화는 곧 생식적 격리를 뜻하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채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분리된 지 오래되지 않은데다가 데니소바 동굴처럼 서로 만나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에 종 분화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유전적인 교류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종교배 수컷은 불임, 번식 못해
이종교배의 흔적은 역사 속에도 꽤 오래전부터 남아있다. 성경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노새를 탔다고 적혀 있는데, 노새가 바로 이종교배의 자손이다. 노새는 수탕나귀와 암말의 이종교배로 탄생한 자손으로, 당나귀보다 덩치가 크고 순하며 말보다는 덜 예민하고 끈기가 있어 과거 짐을 운반하는 운송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노새는 불임으로 자손을 만들 수 없다. 말과 당나귀의 염색체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말의 염색체는 32쌍이지만, 당나귀는 31쌍이다. 따라서 그 자손인 노새의 염색체는 63개로 홀수가 되고, 감수분열에 의한 생식 세포 생산이 불가능하다.
노새를 쓰지 않는 요즘에는 동물원에서 이종교배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서 나온 ‘라이거(liger)’나 ‘타이온(tion)’이 대표적이다. 라이거는 수사자와 암호랑이, 타이온은 수호랑이와 암사자 사이의 이종교배로 탄생했다.
호랑이와 사자의 경우 공통 조상에서 분리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다가 호랑이와 사자는 염색체가 19쌍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라이거나 타이온은 자손을 낳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라이거와 타이온도 불임이다. 암컷의 경우 호랑이나 사자와의 교배를 통해 드물게 임신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지만, 라이거와 타이온 수컷은 예외 없이 모두 불임이다. 한쪽 성만 불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국 유전학자인 존 홀데인이 1922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두 이종 동물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 가운데 한쪽 성이 없거나 드물거나 불임일 경우 그 성은 서로 다른 성염색체를 가진 이형염색체배우자 성이다. 노새나 라이거 등 포유류는 암컷이 XX, 수컷이 XY의 성염색체를 가지므로, 수컷이 이형염색체배우자 성이다. 따라서 수컷이 불임이 된다.
라이거와 타이온은 둘다 호랑이와 사자 사이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덩치에서 차이가 난다. 라이거는 호랑이나 사자보다 몸집이 큰 데 비해, 타이온은 두 동물보다 몸집이 작은 편이다. 이는 잡종강세와 잡종약세 때문이다. 잡종강세란 1세대 잡종의 형질이 부모 양쪽보다 우세한 현상을, 잡종약세는 그 반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원재 경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잡종강세는 한쪽 부모의 우성형질이 다른 부모의 열성형질 대신 발현되거나, 우성 유전자와 열성 유전자의 이형접합이 순종보다 더 우수한 표현형을 나타낼 때 주로 발현된다”며 “라이거의 경우 덩치가 커지는 잡종강세가, 타이온의 경우 반대로 덩치가 작아지는 잡종약세가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늑대 존속 위협하는 ‘코이울프’
노새나 라이거, 타이온 등 이종교배로 탄생한 동물의 경우, 대부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새로운 이종교배가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바로 ‘코이울프(coywolf)’다.
코이울프는 코요테와 늑대 사이에서 나온 잡종이다. 코요테보다 덩치가 크고 사회성이 강하며, 늑대보다 호전적이다. 롤랜드 케이스 미국 뉴욕주립박물관 연구원(현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환경자원부 교수)이 ‘바이올로지 레터스’ 2009년 9월 23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늑대가 개체 수 감소로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코요테와 교배하기 시작했으며 그 잡종인 코이울프가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순종 늑대 개체 수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
doi:10.1098/rsbl.2009.0575
늑대의 멸종을 막기 위해 코요테로부터 격리하는 연구도 진행됐다.
doi:10.1016/j.biocon.2015.09.003
에릭 지즈 유타주립대 자연자원과 교수는 “코이울프는 생태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며 “코요테와의 교잡은 붉은늑대의 존속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밝혔다.
코이울프가 빠르게 번성한 이유는 개과의 특수성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개과 동물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이종교배가 가능하다. 심지어 이종교배로 태어난 잡종끼리 번식도 가능하다. 북극 등지에서 썰매를 끄는 늑대개 또한 개과인 늑대와 개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으로 이종교배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번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