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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지도

조선 초기 만든 세계지도 '동서 으뜸' 평가

 

조선 전기 우리나라 지도학 발달의 일면을 보여주는 혼일강리역대 국도지도. 현재 일본 류코쿠대학에 소장된 원본을 필자가 1982년 원형대로 모사한 것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인 1402년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당시의 어떤 세계지도보다도 광범위하고 상세한 지도로 알려져 있다.


측량법이 총동원돼야 하는 제작작업의 성격상 지도는 당대의 과학기술 수준을 헤아리는 훌륭한 자료다. 우리 조상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기구를 개량하거나 독창적인 기구를 만들어 세계 최고 수준의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는 언어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공간 정보를 전달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매체다. 인류는 생활 공간의 확대와 함께 지리적 지식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나면서 문자 발달 이전에 이미 지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같은 추측은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에스키모인들이 목피(木皮)에 그린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타민족보다 우수한 과학성을 자랑하는 우리 선조들도 삼국시대 이전에 지도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직·간접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지도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영류왕11년(628년)에 고구려의 지도를 견당사를 통해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도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의 지도 제작술은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요동성 내외의 성시(城市) 구조와 시설, 도로, 하천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윤곽이 어느 정도 실제에 가깝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우리나라 지도는 현물로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명나라 대에 출판된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廣輿圖)에 2면에 걸쳐 단독으로 들어 있는 '조선도'를 통해 그 발달 정도를 알아 볼 수 있다. 광여도는 원나라 대에 제작된 주사본(朱思本)의 여지도(輿地圖)를 지도첩으로 만든 것이고, 그 자료는 고려시대의 우리나라 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의 도명과 군현명이 들어 있고 하천과 산지가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지도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현재 일본 교토의 류코쿠 대학에 전해지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이 지도는 조선조 태종 2년(1402)에 권근 이회 등이 제작한 것으로, 당시의 세계지도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 지도는 중국에서 김사행이 가지고 온 '혼일강리도'와 '성교광피도'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이 지도에 빠진 우리나라와 일본을 보충해 만든 것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이 지도의 우리나라 부분은 조선 초기 이회가 만든 팔도지도(八道地圖)로 추정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와 그 유역이 부정확할 뿐이고 기타의 한반도 윤곽은 현재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즉 우리나라의 해안선과 한강 낙동강 섬진강 대동강의 유로와 태백산맥 소백산맥 낭림산맥 등은 현재의 지도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원시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 공존

사회 전영역에 걸쳐 활발한 창의적 사업이 진행된 세종 대는 지도 제작에서도 획기적인 사업이 시작됐다. 세종 대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현재의 국경선이 확정된 시기여서 국토의 확장과 방어, 자원의 분포와 행정구역의 확정을 위해 자세한 지도 작성이 매우 중요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특히 국경이 인접한 함길도(지금의 함경도)를 비롯해 평안 황해도 지방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 4월 9일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함길도 지방의 지도를 중앙에서 그림으로 그려 보내면서 본영에 간직하는 한편, 복사본을 만들어 병장들의 처소에 나누어 주라는 기록이 있다.

또 같은 해 5월24일에는 호조에 명해 앞서 그린 우리나라 지도에 틀린 곳이 많으니 각 도의 수령은 관사 배치와 산천의 줄기, 도로의 이수(里數)와 이웃 고을 등을 기록해 감사에게 보내도록 하고, 감사는 각 주와 군의 그림을 차례로 이어붙여 호조에 보내도록 하라고 했다.

세종실록 18년 2월 29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승문원 지사 정척(鄭陟)에게 명하여 상지 (相地)와 화공을 거느리고 함길도 평안도 황해도 등의 도에 가서 산천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다."

여기서 상지란 땅의 모양과 그 내력을 잘 아는, 이른바 풍수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로 미루어 당시에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잘 아는 지관과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 땅의 모양을 그림 지도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대의 지도제작 사업은 따라서 전국의 지방 수령을 동원해 지도를 편집·수정하는 한편 중앙에서 직접 사람을 파견해 지도를 작성하는 양면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대는 상지와 화공에 의한 원시적인 지도제작 기술과 함께 과학적인 방법도 시도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19년에 천체관측을 할 수 있는 간의가 완성됐다. 간의는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측각기(測角器)의 일종으로, 위도의 측량에 사용할 수 있는 기구다. 뿐만 아니라 정교한 물시계의 일종인 자격루(自擊漏)를 세종 16년(1434)에 경복궁 남쪽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해 공식적으로 사용했으며, 정교한 해시계인 앙부일구(앙부일귀라고도 함)를 세종 19년(1437)에 완성했다.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간의는 우리나라 국토의 남북간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하였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자격루와 앙부일구는 경도(經度) 측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도의 측정에 대한 세종 대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위도측정을 실시했다는 기록은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조역상고는 조선시대의 역상의 대요를 정리한 것으로 정조 20년(1796)에 간행된 책이다. 이 책의 북극고도(北極高度)조에는 "역관(曆官) 윤사웅 최천구 이무림을 각각 강화부의 마니산, 갑산부의 백두산, 제주목의 한라산에 파견해서 그곳의 북극고, 즉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시킨 이야기가 관상감 일기에 실려 있으나 그 측정치는 전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도와 경도는 먼 거리의 측정에는 유효하지만 가까운 거리의 측정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지상 거리의 측정에 의지하고 있다. 지상 거리의 측정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하기 위한 기구인 기리고차(記里鼓車)를 세종 23년(144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수레는 지상에서의 주행거리를 재는 장치를 부착한 기구인데 중국에서는 3세기 경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수레는 10리를 갈 때마다 자동적으로 북을 치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로서 현재 자동차에 부착된 거리계의 원시적인 형태로 보인다.

세종 23년 8월에는 새로 만든 보수척(步數尺)을 사용해 각도의 역로(驛路)의 리수를 재고, 30리마다 표(標)를 세우고 나무를 심어 표시하게 했다. 세종 32년 12월에는 각 도에 시달해 주·군간의 거리를 조사·기록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지도를 만들게 했다. 즉 실측지도 작성에 기본이 된 것은 거리 단위인 자(尺)의 통일과 역로(驛路)의 거리와 군현간의 도로 정비 및 거리의 측정이었던 것이다.

정척과 양성지, 첫 실측 전도 완성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연결해주는 대학자 최한기가 만든 지구전후도. 목판으로 간행된 이 현대식 세계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가장 오랜 세계지도 판본으로서 조선 후기 한국인의 세계관 변화에 큰 공헌을 했다.


세조 13년(1467) 3월에 세조는 스스로 인지의송(印地儀頌)을 지어 학자들에게 그 원리을 설명하고 있다. '인지의' 또는 '규형인지의'는 방위와 간접적으로 원근을 측정하는 기기로서 소박한 평판(平板)과 삼각측량 기구다.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크기와 자세한 구조는 모르나 설명에 의하면 24방위를 표시한 평판의 중심부에 지주를 세우고 그 지주 위에 공동(孔銅)을 저울대 모양으로 걸어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고도와 방위각을 측정했다고 한다. 인지의의 발명은 좁은 지역에서의 사물의 상대적인 위치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고 고도 측정에도 유효해 정확한 지도작성에 많은 공헌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도제작에서 인지의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아쉽게도 찾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고지도 제작과 관련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정척(鄭陟, 1390-1475)과 양성지(梁誠之, 1414-1482)가 그들이다. 정척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종 18년(1436)에 함길도 평안도 황해도 지방의 지도제작에 착수하였으며, 5년 후인 문종 원년(1451)에 이르러 양계지도(兩界地圖), 즉 북부지방의 지도를 완성했다. 한편 양성지는 단종 원년(1453)에 조선전도 팔도도 각 주현도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 하삼도(下三道)지방, 즉 현재의 충청·경상·전라도 지방을 화공과 상지를 대동해 조사하여 지도를 완성했다.

정척과 양성지의 지도제작 사업은 드디어 세조 9년(1463) 11월에 두 사람의 이름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세조에게 올림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이 지도는 정척의 양계지도와 양성지의 하삼도 지도를 합쳐서 우리나라 전도로 완성한 것이다.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는 오랫동안의 국가적인 노력이 결집된 최초의 실측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그 후 정상기의 동국대지도, 팔도지도가 나올 때까지 약 3백년간 우리나라의 표준지도 역할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지도는 정상기의 지도가 나온 후에도 계속 병행해 사용됐으며 특히 일본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는 그 원본이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이 유형에 속하는 지도로는 우리나라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조선팔도지도와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 개인소장의 조선팔도여지도(朝鮮八道輿地圖) 등이 전해진다.

위도를 측량한 구체적인 실측기록은 숙종 39년(1713) 청나라의 하국동(何國棟)에 의해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하국동은 청의 강희제에 의해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던 황여전람도 측량팀의 한사람이었으며 서울의 위도를 측량해 37°39'15"를 얻었다. 국조역상고(國朝暦象考)에 의하면 중국의 연경(현재의 북경)과의 비교 관측에 의해서 서울의 경도를 연경을 기준으로 '東10°30''으로 측정했다고 한다.

정조 15년(1791)에는 비변사에 소장된 지도를 이용해서 팔도 관찰사영의 위도와 북경기준 경도를 양정(量定)하라고 명하여 팔도 관찰사영의 경위도를 측정한 바 있다. 천문학상의 경도와 위도의 간접적인 측정치를 얻기는 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지도에 이용하지는 못했다. 천문학상의 경위도 조직, 즉 지도 투영법의 개념은 아직 적용되지 못했고, 대신 지표면을 평면으로 보는 일정한 간격의 방안좌표(方眼座標)를 지도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방안좌표 지도는 중국에서는 이미 남송(南宋)시대의 석각(石刻) 우적도(禹跡圖, 1136)에서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호가 작성한 청구도(靑邱圖, 1834)의 도제(圖題)를 쓴 최한기는 정조 15년(1791)에 왕명에 의해 우리나라를 경선 1백54, 위선 2백80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방안좌표를 만들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선과 위선은 천문학상의 지구 경도와 위도(3백60°기준)를 표시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를 동서의 길이를 1백54로 나누고 남북을 2백80으로 나눈 방안(方眼)의 선을 뜻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를 10리 간격으로 좌표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도의 축척에 따라서 좌표의 간격은 임의로 정하고 있다. 이러한 좌표의 적용은 현대적인 지도에도 지도의 축척에 따라서 지도의 경위선 간격을 10° 또는 40° 등 임의로 정하는 것과 같은 예다.

방안좌표를 이용한 지도를 선표도(線表圖)라고 불렸다. 이 선표도에 해당하는 지도는 1750년대에 작성된 정상기의 동국지도,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등이다.

정상기(1678-1752)는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도학자이며 그 후손 등에 의해서 계속 수정작업을 해온 지도 명문가의 시조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팔도지도로 불리는 도별도와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즉 우리나라 전도로 구분된다. 팔도지도는 각 도별도의 축척이 동일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이어 맞추면 우리나라 전도인 동국대지도가 된다. 이 지도는 축척이 약 42만분의 1인 대축척 지도로, 이전의 지도들이 대체로 1백만분의 1 내외의 소축척 지도여서 그 내용이 간략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군 현을 표시하는 정도의 간략한 지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세한 도로망, 봉수, 역, 세밀한 산계와 수계 등이 표시된 공간정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지도가 요구됐다. 이 지도는 이같은 요구에 부응하는 한편,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가 가지고 있던 북부지방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와 내륙지방의 오류를 대부분 수정하고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지도에 '백리척'이라 부르는 제척(梯尺)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표의 여러 지점간의 거리와 방위가 정확하고 지도의 모든 부분의 축척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 또한 정상기가 만든 일부 지도에는 좌표가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각도별 지도를 이어서 오차없이 연결시켜 1매의 지도가 되려면 방안좌표의 사용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지도의 백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소축적으로 줄여 만든 약 92만분의 1 우리나라 전도.


김정호는 조선후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지도제작자이며 동시에 대동지지를 편찬한 지리학자다. 김정호는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1861), 대동여지전도(1860년경), 수선전도(1840년경)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김정호의 생존연대와 개인적인 내력은 구전으로 전해질 뿐이어서 청구도에 쓰여 있는 그의 친구 최한기의 기록과 대동지지의 내용을 통해 1804년에서 1866년경으로 생몰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청구도는 전형적인 방안좌표를 사용한 지도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은 1백리 간격으로 나누어 29층, 동서는 70리 간격으로 나누어 22판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청구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한장으로 그리지 않고 1백리와 70리의 방안에 해당하는 지역을 책의 1쪽으로 하여 상하 2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 우리나라의 5만분의 1 지형도를 7백여매로 나누어 그리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만 5만분의 1 지형도는 낱장으로 되어 있으나 청구도는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이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를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책 대신에 우리나라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22층으로 나누어 각 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版)의 크기는 동서 80리, 남북 1백20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축척은 청구도와 같이 약 16만분의 1. 대동여지도를 잇대어 우리나라 전도를 만들면 길이 약 7m, 폭이 약 3m의 대형지도가 된다. 지도 위에 축척이 따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제 1층 첫머리에 그려진 방안에 '매방십리(每方十里)'라고 표시돼 있으며, 읍과 읍 사이의 직선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해 놓고 있어 실질적인 축척이 표시돼 있는 셈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약 42만분의 1에 해당하는 지도이고, 대동여지도는 약 16만분의 1 지도임으로 지도의 크기는 직선거리로 약 2.6배이고, 면적으로는 약 6.9배에 달한다. 이러한 축척의 차이는 그에 비례하여 내용이 그만큼 자세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그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내용이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또 다른 특징은 목판 인쇄본이라는 점이다. 정척과 양성지, 정상기의 지도는 모두 필사본이어서 그 수효가 한정돼 일반이 널리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인쇄본이어서 내용이 똑같은 지도를 여러 벌 찍어낼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는 물론 당대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시한 지도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산계와 수계의 독창적인 표현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풍수지리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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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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