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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Ⅲ. ②부드럽고 충직한 로봇 비서 보트

디지털 생태계에 번식하는 소프트웨어 생명체

아직까지 보트의 모습은 컴퓨터 화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사용자가 지시하면 '눈에 띄지 않게'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인텔리전트 에이전트'경우 처럼 사람의 모습을 갖춘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한 바 없는 무수한 신종 생명체들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네트워크 웜(worm)같은 해로운 생명체도 있는 반면 웹 스파이더(web spider), 메일보트(mailbot), 채터보트(chatterbot), 캔슬보트(cancelbot), 게임보트(gamebot) 같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꽤 유익한 생명체도 있다.

이들 생명체의 공통점은 모두 똑같은 디지털 DNA로부터 단숨에 수억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출현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 중 인터넷의 확산에 힘입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후자의 생명체들을 한데 묶어 보트(bots)라고 부른다. 비록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보트는 왕성한 번식과 분화의 과정을 거쳐 벌써 사이버 스페이스의 가장 대표적인 생명체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지능 갖춘 새로운 종

보트란 로봇(robot)의 준말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로봇과 달리 강철 대신 프로그래밍 코드로 이루어진 로봇, 즉 ‘소프트웨어 로봇’을 일컫는다. 인터넷의 광활한 정보 공간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오거나, 주인에게 배달된 E-메일을 필터링하거나, 주인이 좋아할만한 음악이나 영화를 추천해주는 자율적이고 지능적인 프로그램들을 보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거미) 보트는 웹(거미줄)을 링크해 링크를 따라 기어다니며 새로운 웹 사이트 정보들을 수집하고 인덱스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정보들은 검색 엔진이 특정한 주제의 웹 페이지를 검색할 때 사용하는 매스터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기어다닌다고 했지만 실제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옮겨다니는 것은 아니고, 마치 사람이 웹 검색을 하듯이 24시간 새로 생긴 웹 페이지들을 찾아 자료를 다운로드하고 인덱스를 만든다.

메일보트는 사용자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 미리 설정된 일련의 메일 처리 작업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소프트웨어다. 이를테면 주인에게 배달되는 수많은 메일들을 분류해서 쓸데 없는 광고 메일은 삭제하고, 주제별로 편지함에 집어넣고, 긴급을 요하는 메일들은 즉시 주인에게 통보하는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또는 전화의 자동응답기처럼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동안 메시지가 수신되면 미리 입력한 답장을 자동적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편지를 관리해주는 개인 비서라 말할 수 있다.

한편 난삽한 광고물이나 게시물을 없애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만든 것이 캔슬보트다. 어떤 뉴스그룹들은 특정인이나 특정 주제의 기사, 혹은 비방성 기사나 광고 기사들을 금지시킬 수 있는데, 운영자가 24시간 일일이 감시할 수 없으므로 캔슬 보트를 이용해 자동적으로 이런 작업을 수행하도록 시킨다.

‘지능’을 갖추고 인간을 감쪽같이 속이며 대화를 걸어오는 종류도 있다. 일례로 1990년에 개발된 줄리아라는 머드 보트는 튜링 테스트에서 무려 15분 동안이나 컴퓨터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인간과 대화를 나눴다. 채터보트의 대표적 사례다.

여기서 튜링 테스트란 1940년대 앨런 튜링이 기계의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한 테스트로, 동일한 사람으로 하여금 컴퓨터와 인간 양쪽과 텍스트로 대화를 나누게 하고, 대화를 통해 어느 쪽이 사람이고 어느 쪽이 컴퓨터인지를 구별하도록 하는 테스트이다. 이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수록 지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보트는 게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머드 같은 온라인 컴퓨터 게임 환경에서 플레이어의 상대역을 맡은 경우다. 대개 인간 플레이어들은 항상 머드 게임에 접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통제불능의 자유의지와 개성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나리오 상에 꼭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들로서 로봇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머드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공동으로 어떤 괴물들과 싸우는 시나리오라면 거기서 괴물 역할을 보트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보트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보트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성 광고를 보내는 스팸보트, 인터넷 채팅 공간에서 채트룸을 교란시키는 어노이보트, E-메일을 통해 들어오는 질문이나 요청을 받아 미리 정해진 형태의 답장을 되돌려 보내는 앤서보트 등 다양하고 기발한 기능을 보트가 수행하고 있다.
 

IBM사의 인텔리전트 에이전트 프로그램을 상징하는 아이콘


잘 훈련된 영국 집사'역할

보트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는 ‘보트, 새로운 종의 기원’(1997)의 저자 앤드류 레너드에 따르면, 보트란 “인간에 의해 어느 정도의 의인적 성격을 부여받은, 자율적이며 제한된 의미에서 인공 지능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의인적’이란 말은 보트가 단순한 컴퓨터 프로그램 이상의 것, 이를테면 감정이나 인격, 동기 따위를 지닌 존재라고 짐짓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또 ‘자율적’이란 말은 보트가 인간의 직접적인 감독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한된 의미’란 보트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공 지능이라고 인정하는 데는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보트의 직계 조상은 1960년대 MIT의 조셉 와이젠바움에 의해 고안된, 인간과 대화를 통해 정신치료를 수행하는 엘리자(Eliza)라는 프로그램이다. ‘엘리자 효과’(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컴퓨터가 마치 인격이나 지능을 지닌 것처럼 믿는 경향)라는 말이 생길 만큼 이 프로그램은 한때 인공지능의 개가처럼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인공지능과는 큰 관계가 없고, 환자의 질문이나 진술들을 미리 준비된 어휘로 대체해 대화를 주고받는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어쨌건 엘리자는 보트의 조상, 특히 인간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채터보트의 조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눈치빠른 독자들이라면 예의 보트에 관한 묘사들이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인텔리전트 에이전트’(intelligent agents) 기술의 선전문구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인텔리전트’란 말이 사람들을 현혹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자율적인 에이전트(autonomous agents) 혹은 그냥 에이전트라고 한다.

최근 에이전트 기술이 각광받는 것은 인터넷이나 데이터 웨어하우스(data warehouse) 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대용량 데이터베이스에서 인간을 대신해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할 수 있는 자동화된 소프트웨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에이전트 기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에서 묘사한 ‘잘 훈련된 영국 집사같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전트란 곧 인터페이스이며, 가까운 미래에 컴퓨터와 인간,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일대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견되기도 한다.

보트와 에이전트는 분명 상당 부분 그 외연이 겹치는 개념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선 에이전트는 보트처럼 반드시 인격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보트는 에이전트처럼 반드시 기능적인 일에만 복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보트는 에이전트보다 인간이나 생명체에 더 충실하며, 인간과 잡담을 나눈다거나 하는 좀더 쓰잘데 없는 일에 봉사할 여유를 지닌 것이다.

에이전트의 개발자는 주로 컴퓨터 관련 기업들이다. 다시 말해 에이전트란 다분히 상업적인 개념이다. 반면에 보트의 제작자들은 컴퓨터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위저드(wizards, 머드에서 중요한 프로그래밍 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상층계급)와 해커, 그 밖의 네트에 중독된 무수한 프로그래머들을 망라한다. 즉 보트란 꼭 상업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진화를 예측한다면 주로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고자 하는 에이전트가 인텔리전트한 측면에서는 좀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체로서의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세포 동물이나 곤충과 같은 하등생물의 왕성한 에너지에까지 폭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트가 더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상 사회에 닥친 위기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은 대개 현상적이거나 미묘한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며 그 간격이 생각처럼 크지 않다. 보트와 에이전트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보트는 에이전트처럼 궁극적으로 인간의 완벽한 통솔 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대다수의 보트들이 에이전트처럼 묵묵히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는 선량하고 성실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점은 보트의 제작자와 옹호자들을 딜레마에 봉착하게 하는 보트의 가장 당혹스러운 측면이 아닐 수 없다. 레너드의 책에 묘사된 보트의 초기 사례 가운데 Point MOOt의 경험은 이 점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주는 예이다.

Point MOOt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건설된 현실 세계와 흡사한 가상의 도시다. 즉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집을 짓고 물건을 사면서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곳이다. 문제는 위저드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심각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도시 질서를 어지럽히는 난봉꾼인 바니 보트라는 생명체의 수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더욱이 컴퓨터 사용자들이 바니 보트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새로운 명령어를 찾아낸 탓에 가상 도시의 기능은 아예 정지돼버렸다.

보트는 두얼굴을 지닌 존재다. 보트는 질서를 지향하지만 또 한편으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메일이나 유즈넷 기사들을 정돈하기 위해 고안된 보트들이 본의 아니게 중요한 메일이나 소수 발언들을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만약 보트를 조작하는 보트런너(botrunner)들이 사악하다면, 보트는 사악한 목적에 이용될 것이다. 적의를 지닌 해커들은 단순히 스팸(쓰레기 메일이나 광고성 홍보물)을 보내는 보트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이나 네트워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듣도 보도 못한 악성 보트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레너드는 이렇게 단언한다. “대부분의 보트들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보트들은 원래의 의도에 반하여 오용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보트의 제작자나 보트런너들이 선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물론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누구도 악성 보트를 만들지 않고 보트를 본래 목적 이외의 곳에 악용하지 않는다면, 확실히 대부분의 문제들이 유보될 것이다. 그러나 Point MOOt의 예에서처럼 명시적으로 악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래된 파국에 대해서는 역시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트의 세포 속에 안전장치를 심어두는 것은 어떤가? 이를테면 바니 보트의 참화를 방지하기 위해 보트의 자율성이나 번식력을 제한하는 따위의 일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앞의 방안에 비해서는 더 설득력이 있다. 바니 문제의 본질은, 보트가 근원적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바니 보트에게서 존재를 입증했던 그 통제불능의 유전자까지 소멸시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실상 보트는 ‘거세된’ 생명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보트들에게는 바니 보트와 같은 생식 능력이 허용돼 있지 않거니와, 보트의 자율성이란 것도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수많은 구속과 한계로 묶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트에게 남아 있는 그 최소한의 자율성마저 박탈한다면 과연 그것을 보트라 말할 수 있을까? 즉 완전한 박탈은 보트의 개념이나 존재 그 자체를 폐기하는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혼돈과 무정부주의

레너드가 회고하듯이 Point MOOt 같은 경계가 분명한 환경에서 바니 보트의 문제는 전혀 해결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위저드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져 있는 환경이므로 위저드, 또는 아취위저드(arch-wizard: 위저드 중의 위저드)가 바니의 번식력을 제한하거나 바니 사냥꾼들에게 훨씬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환경을 변경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례처럼 위저드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일반적인 인터넷 환경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병렬적이고 탈중심화된 시스템으로서의 네트는 어떤 형식으로든 전일적이고 일사불란한 해결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보면 네트의 그런 속성이야말로 이제까지 네트의 진화를 지탱해온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네트란 일사불란한 지휘자의 감독 없이도 무수한 혼돈과 무정부 상태를 끌어 안은 채 훌륭하게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혼돈과 무정부주의 그 자체가 네트에게는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닌지… .

그렇게 보면 바니 보트의 참화는 바니 보트 그 자체의 통제불능의 속성 이전에 위저드에 의해 지배되는 Point MOOt의 일방적 탑다운(top-down) 구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아마도 거시적으로는 Point MOOt 같은 개개의 혼돈 상황조차도 자기조직하는 네트 내에서 보면 네트의 생명 활동의 일부분으로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발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트의 양면적 속성에 대한 판단은 네트의 일부분인 독자들 스스로 내리는 게 마땅할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적어도 보트를 거세하는 쪽에 손을 들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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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유남 사이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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