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은 비록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전등과 축음기, 축전지 등 무려 1천93종의 특허를 획득한 ‘발명왕’이다. 에디슨의 공헌은 1998년 미국의 시사 월간지 ‘라이프’지가 선정한 ‘지난 1천년의 세계사를 만든 1백대 인물’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인류에게 커다란 공헌을 한 에디슨은 왜 노벨상을 타지 못했을까.
2번이나 놓쳐버린 노벨상
에디슨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필라멘트 역할을 하는 머리핀같이 생긴 탄소 고리의 두끝 사이에 금속판 하나를 갖다 놓고 그 판에 백금으로 만든 도선을 연결했다. 전구에 직류를 통해주고 전류측정기를 금속판과 필라멘트의 도입 전극에 연결하면 강한 전류를 나타냈지만, 금속판과 배출 전극에 연결하면 계기는 아무런 전류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는 좁은 간격 사이에 흐르는 전류가 전자의 흐름임을 증명한 것으로 ‘에디슨 효과’라고 부른다.
영국의 물리학자 리처드슨은 실험을 통해 에디슨 효과가 진공 상태에서 가열된 금속 필라멘트에서 전자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공로로 리처드슨은 192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관례라면 에디슨과 함께 공동 수상했어야 하지만 에디슨은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사실 에디슨은 1912년에도 테슬라(1857-1943)와 함께 강력한 노벨상 공동후보자였다. 테슬라는 교류 전기의 발견으로 전기의 실용성을 획기적으로 촉진시킨 발명가다.
그러나 에디슨과 테슬라는 앙숙의 차원을 넘어서는 철천지원수였다. 에디슨은 송전선, 소켓, 퓨즈 등의 부품을 개발해 전기공급 시장에 뛰어들었다. 에디슨은 송·배전에 1백10V의 직류를 사용했는데, 이 방식은 전압이 너무 낮고 전선 저항에 의한 손실이 커, 발전소에서 3-5km 정도 밖에 송전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웨스팅하우스사도 전력공급 사업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테슬라가 교류 송전에 적합한 전동기를 발명하자 웨스팅하우스사는 즉시 이 특허를 구입해 장거리에 알맞은 교류 송전 방식을 추진했다.
테슬라의 전동기에 의해 에디슨이 주도하는 송전 사업이 위협을 받게 되자 그는 교류 송전 방식은 위험하다고 적극적인 역선전 공세를 펼쳤다. 당시 고압선에서 매년 수십명의 사람과 말이 감전사당하고 있었는데, 에디슨은 전압 때문에 감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가 원래 위험하기 때문에 감전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이때 마침 뉴욕주가 교수형을 대신할 인도적인 사형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에디슨은 교류가 위험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웨스팅하우스사로 하여금 사형집행기를 제작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오히려 전류 전쟁에서 교류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교류를 흘린 전기의자로도 사형수를 단번에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에디슨과 테슬라는 원수 사이가 됐고 에디슨은 이 일로 비정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죽을 때까지 비난을 받았다. 1912년 노벨상위원회에서 전기 보급으로 인류에게 획기적으로 기여한 두사람에게 노벨상을 수상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테슬라는 에디슨과 함께라면 노벨상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912년의 노벨상은 등대에서 사용하는 조명등을 개발한 또다른 발명가 달렌에게 돌아갔다.
이런 과거 때문에 1928년 ‘에디슨 효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에디슨은 수상자 명단에서 또다시 제외되는 불운을 맛본 것이다.
과학자 최고의 명예인 노벨상을 두 발명가의 암투 때문에 놓쳐 버렸지만 에디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류가 직류보다 더 위험한 것일까. 오늘날 실험은 에디슨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가정용 직류와 교류를 비교했을 때, 심장마비를 일으킬 확률은 교류가 직류보다 3배나 더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발명가라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손해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직류와 교류 송전 방식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