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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Ⅲ. ①원하는 대로 변신하는 제2의 나, 애버타

때로는 고릴라로, 때로는 성전환도

 

컴퓨터 화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제2의 나'를 합성하는 과정. 국적,성별,나이 등 신상명세를 작성하는데 따라 외모가 달라진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미래상을 가장 창조적이고 실감나게 그려낸 소설로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에는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가상의 나라(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가상의 지구)가 등장한다.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에 있는 거의 모든 공간의 서비스와 규범들을 재현하고 있는 일종의 거울상과 같은 세계로서, 현실 세계의 상위 1% 미만의 사람들이 고가의 가상현실 장비들을 통해 들어올 수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애버타라는 가상의 신체를 빌려서 크고 작은 활동을 하게 돼 있었다. 마치 영화 ‘토탈 리콜’에서 가상 체험 서비스의 이용자들이 수천개의 옵션들을 조합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메타버스의 사람들은 직접 디자인하건 이미 만들어진 것을 구입하건 자기가 원하는 모습의 애버타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모습이 추하다면 영화배우 뺨치게 아름다운 애버타를 가질 수 있으며, 원한다면 고릴라나 용, 심지어 눈 코 입이 달려있는 거대한 페니스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다.

테러리스트로 변신

애버타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힌두 신화에서 비슈누 같은 신이 인간이나 동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우리 말로는 화신(化身)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인터넷 채팅이나 머드 게임 같은 가상의 환경에서 현실의 유저를 대신해 대화나 이야기 속에 참여하는 가상의 인물을 애버타라 부른다. 즉 애버타란 현실의 나를 대신해 온라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제2의 나, 즉 분신(分身)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애버타란 말은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몇년 전부터 인터넷 세계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지금은 아주 보편화된 용어로 자리잡았다. 저널리즘은 물론이고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자아의 현존이나 소통 방식을 둘러싼 사회학, 심리학, 문화 연구 측면의 논의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애버타란 말을 광범위하게 보급시킨 것은 닐 스티븐슨의 소설이었지만, 사실은 1980년대 중반 칩 모닝스타와 랜디 파머가 루카스 필름에서 개발한 온라인 커뮤니티 환경 해비타트(Habitat)에서 이미 그 기본 골격이 가시화됐다.

해비타트는 후지츠 해비타트(Fujitzu Habitat)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지금 눈으로 보면 초창기 비디오 게임을 연상시키는 조악한 2차원 그래픽으로 이루어졌지만,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거기에 접속해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는 직업과 외모를 지니고서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과 촌락과 회사를 구성해 거의 현실과 다름없는 제2의 인생을 영위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수백가지 직업 가운데는 테러리스트, 갱, 창부 같은 반사회적, 반인륜적 직업도 존재했다. 또 온갖 종류의 회사들이 설립돼 심지어 그 회사들이 발행하는 주식을 취급하는 증권회사와 주식시장까지 설립돼 있을 정도였다.

그렇긴 해도 1992년 스티븐슨이 꿈꿨던 거의 모든 조건들을 갖춘 3차원의 가상현실 환경이 불과 5년도 되기 전에 알파월드(AlphaWorld)라는 형태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곤, 스티븐슨을 포함해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알파월드는 전세계적으로 20만명 이상의 시민을 확보하고 있는 최초의 3차원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액티브 월즈(Active Worlds)라고 해야 맞겠지만, 알파월드가 워낙 널리 알려져서 그렇게 통칭하기도 한다.

알파월드란 액티브 월즈라는 가상의 행성계 내에 존재하는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녹색 별로, 약 2백여개에 이르는 액티브 월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알파월드는 그보다 먼저 등장한 인터넷 그래픽 채팅 서비스인 월드채트(Worlds Chat)와 더 팰리스(The Palace)의 연장선상에 있긴 하지만, 단순한 채팅 서비스 환경이라기보다는 본격적으로 메타버스와 유사한 가상 세계의 창조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메타버스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할만하다. 알파월드 이후에 앞을 다투어 유사한 신종 서비스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월즈어웨이(WorldsAway), 온라이브 트래블러(Onlive Traveler), 버추얼 플레이스(Virtual Places), 블랙 선 패스포트(Black Sun Passport), 오즈 버추얼(OZ Virtual) 같은 서비스들이 그것이다.

서비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 가상 세계에서의 애버타들의 생활방식은 몇가지 중요한 특성들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가상세계의 물리법칙과 가상세계의 행동방식, 가상세계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차원 이동도 가능

먼저 이 세계에 자기 소유의 애버타를 가지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액티브 월즈 브라우저(Active Worlds Browser) 같은 전용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들 프로그램은 해당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들 프로그램으로 서비스에 접속해서 사용자 등록을 마치면 애버타 에디터(avatars editor)를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애버타를 만들어야 한다.

신참자들은 각 서비스에서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애버타(몰개성적이고 멍청하다고 해서 dummytar라고 부른다)를 쓸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개성을 담은 모습으로 직접 그리거나 편집해서 만든다. 자신의 애버타를 가지고서 그 세계에 입장하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와 기물들로 이루어진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상의 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울러 도시를 걷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뭔가의 일을 하고 있는 다른 많은 원주민 애버타들과 만나게 된다.

모든 애버타들에는 배지(badge)라고 부르는 이름표가 붙어 있어 그의 접속명(ID)을 알 수 있고, 그 이름을 불러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 물론 모든 대화는 영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대개 텍스트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애버타를 통해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모션 휠(emotion wheel)이나 제스처 팔레트(gesture pallet)라고 불리는 브라우저 상에서 지원되는 툴을 이용한다. 이것은 미리 다양한 표정이나 제스처를 정의해 놓은 것으로 메뉴 상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해 애버타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바꿀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애버타의 공간 이동이나 시점 변환 등과 같이 가상 세계에만 적용되는 특이한 물리 현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애버타들은 보통 짧은 거리라면 가상의 땅 위를 걸어서 이동하지만, 원한다면 하늘을 날거나, 스타트렉의 공간이동장치와 흡사한 텔레포트(teleport)를 이용해 다른 세계로 차원이동을 할 수도 있다.

대개 애버타를 움직이는 사용자는 크게 두가지의 시점 중 하나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일인칭 시점으로 그야말로 애버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의 애버타의 몸은 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3인칭 시점으로 애버타의 몸 밖으로 나와 자신의 애버타의 움직임까지 포함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또 이동 중에 다른 애버타와 맞닥뜨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데, 서비스에 따라서는 몸끼리 부딪치는 경우도 있고 또 그냥 유령처럼 교차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성질들은 그야말로 사이버 스페이스의 물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사이버 스페이스가 이른바 미트스페이스(meatspace, 육질로 된 세계, 즉 현실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사이버 스페이스와 미트스페이스 사이에 마치 시간여행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것과 같은 웜홀을 개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지금 컴퓨터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실시간으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설치된 모니터 위로 디스플레이할 수 있다. 이 장치를 이용하면 자신의 애버타 위에 실제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모니터 앞에 선 자신의 애버타에게 그의 진짜 주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나와 미트스페이스의 내가 만난다! 물론 이것은 시간여행을 하는 나와 과거나 미래 속의 내가 만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시간여행의 오랜 금기를 깨는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되겠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애버타끼리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 프랑스 파리 시가지를 배경으로 설정했다.


‘현실 적응력 쇠퇴’ 우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면적의 제한이 없다. 그러니까 애버타들의 세계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이주민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땅을 공급해줄 수 있다. 애버타들은 자기 자신의 토지와 건물을 분양받을 수 있다.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과 의기투합해서 교외의 넓은 미개척지를 분할받아 아예 새로운 가상의 마을을 건설할 수도 있다.

애버타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책이라 할 수 있는 ‘애버타, 인터넷 가상 세계의 탐험과 건설’의 저자 브루스 데머가 주도해 만든 셔우드 포레스트 타운(Sherwood Forest Town)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가상세계 디자인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공동 회의 및 연구를 위한 실험적인 프로젝트인데, 미리 마을의 설계도면을 작성해서 진행되는 일종의 계획도시로 지금도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애버타는 이제 단순한 채팅이나 게임을 위한 인터페이스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 공동체를 위한 인터페이스로 발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애버타의 존재론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른바 복수 자아(Multiple Identity)나 젠더 벤딩(gender bending, 가상세계에서 성을 바꿔 입고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아이덴터티의 개념을 뒤흔드는 일련의 현상들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록 가상이긴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곳은 뉴턴의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무수한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선택이 잘못됐다면 ‘게임오버’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갖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어차피 현실의 존재는 전혀 변하지 않으므로, 결국 현실에 대한 적응력만 쇠퇴시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아나 성을 의식적으로 뒤바꾸는 행위가, 사회에 의해 강제돼온 주체의 껍질을 깨는 해방적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주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주체구성이론의 견지에서 보면, 전자의 견해가 짐짓 전제하고 있는 단일하고 확고부동한 자아의 개념이 의혹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이는 앞으로 애버타에 관한 논쟁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될 쟁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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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유남 사이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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