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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유도하는 유전자 캐스페이즈

난치병 원인 규명에 도움

 

세포가 죽는 과정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부딪힌다. 특히 늙고 죽는 과정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 왔다. 그런데 최근 생명체가 죽는 과정이 인간세포의 DNA에 존재하는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돼 있고, 죽음의 조절경로가 생명체에 존재한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생명체의 죽음경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생명현상의 기본단위를 이루는 것은 세포다. 세포에서 생명현상을 조절하는 제어실은 핵이라는 소기관. 모든 정보가 유전자 형태로 입력된 곳이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직면한 세포는 아포토시스(apoptosis)라는 경로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세포막과 핵막이 붕괴되고 세포의 크기가 줄어든다. 또 핵이 응축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다. 이 사실은 세포에서 많은 유전자가 복잡하게 얽히고 조절되는 과정에 의해 죽음이 유도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아포토시스는 ‘유전자에 의해 조절되는 세포의 죽음’이다.

단백질 분해가 주된 역할

현재까지 밝혀진 아포토시스에는 크게 2부류의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다. 하나는 세포의 죽음을 억제하거나 증가시키는 비시엘-2(Bcl-2) 유전자군이다. 또다른 한 부류는 캐스페이즈(caspase) 유전자군으로, 세포의 죽음을 직접 실행하는 죽음유도유전자(killer gene)다. 현재까지 포유동물에서 알려진 캐스페이즈 종류는 11가지. 비시엘-2 유전자는 캐스페이즈를 활성화시키는데 관여한다고 알려졌다.

캐스페이즈 유전자는 초기에 각기 다른 이름을 가졌다. 예를 들어 캐스페이즈-3은 야마Yama), 시피피32(CPP32), 또는 아포페인(Apopain)으로 불렸다. 이 중 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 캐스페이즈의 역할은 여러 실험 증거에 의해 밝혀졌다. 우선 포유류의 캐스페이즈는 하류동물인 회충이나 요충 같은 선형동물 세포의 죽음에 관여하는 단백질(Ced-3)과 구조가 비슷하다. 또 캐스페이즈를 포유동물의 세포에 인위적으로 주입하면 세포는 죽음을 맞는다. 반대로 캐스페이즈 유전자가 없는 경우 세포수는 정상보다 늘어난다. 예를 들어 생쥐의 캐스페이즈-3 유전자를 제거한 경우 뇌세포의 죽음이 억제돼 정상보다 많은 양의 뇌신경이 존재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캐스페이즈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백질 분해효소다. 즉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단백질을 분해시킴으로써 세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우선 캐스페이즈는 특정 단백질의 기능을 활성화시켜 세포를 사망시킨다. 예를 들어 캐스페이즈-3는 생체의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단백질인산화효소(PKC- δ)를 절단한다. 이때 효소의 기능이 활성화돼 죽음 신호는 더욱 많이 전달된다.

최근에는 팩(PAK)이라는 또다른 단백질인산화효소도 캐스페이즈에 의해 절단되면서 활성화된다고 보고됐다. 팩은 세포가 죽을 때 세포 모양을 변화시킨다고 알려졌다.

이에 비해 캐스페이즈가 절단함으로써 생명력이 떨어지는 단백질이 있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세포의 핵막과 핵내 물질의 구조를 유지하는 라민은 세포가 죽을 때 절단된다. 이때 핵의 붕괴가 빨라지고, DNA를 파괴하는 물질이 세포핵에 접근하게 된다.

캐스페이즈는 어떤 이유 때문에 작동을 시작하는 것일까. 세포막에는 세포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수용체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특별히 죽음을 관장하는 수용체가 있다. 이곳에 스트레스, DNA 손상, 신경자극을 비롯한 다양한 ‘죽음신호’가 전달되면 세포 내부에서는 여러 단백질이 결합해 ‘죽음신호전달 복합체’를 형성한다. 이 복합체에 캐스페이즈가 하나의 구성원으로 참여해 활성화된다고 추측된다. 활성화된 캐스페이즈는 또다른 캐스페이즈를 활성화시켜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치매에는 오히려 도움

캐스페이즈가 ‘죽음의 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람에게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캐스페이즈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에이즈나 치매, 헌팅턴병과 같은 난치병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몸이 급속히 쇠약해지고 사지가 벌벌 떨리는 헌팅턴병 환자의 경우 특이한 단백질(헌팅턴)이 뇌에 많이 형성돼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캐스페이즈는 이 단백질을 절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만일 캐스페이즈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헌팅턴이란 단백질이 많이 형성돼 병을 일으킬 것이다.

또 치매의 발병과 깊은 관련이 있는 프리세닐린-2 유전자의 예를 살펴보자. 만일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백발백중 치매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돌연변이 유전자가 만든 단백질은 캐스페이즈에 매우 민감하게 절단된다. 따라서 캐스페이즈가 제역할을 못하면 치매 유전자의 작용에 속수무책인 셈이다. 에이즈처럼 면역세포의 기능에 결핍이 생긴 경우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캐스페이즈가 제기능을 발휘 못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세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로를 이해하는 일은 사람 난치병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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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정용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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