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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에 멍에 벗긴 당뇨병 치료제

벤팅과 맥클리어드의 인슐린 발견

각기, 괴혈병, 구루병과 같은 '결핍성 질병'은 각각 비타민 B1, C, D처럼 특수한 필수영양소의 부족 때문에 생기는데, 사회적으로 볼 때 가난 때문에 얻는 질병인 셈이다. 반대로 영양이 지나치게 많아 생기는 '풍요성 질병'이 있는데, 당뇨병이 대표격으로 손꼽힌다. 물론 당뇨병의 발병에는 유전적 요인이 크게 관여하며 영양과잉이나 비만 없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식생활 이 여유로운 사회일수록 당뇨병 환자가 많은 점으로 보아 '풍요병'이라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도 최근 당뇨병 환자가 급증하고 있고, 중요한 사망원인(인구 10만명당 매해 17 명이 사망하며, 전체 사망원인 가운데 7위를 차지하고 있다)으로 자리잡은 탓에 대부분의 종합 병원에 '당뇨병 클리닉'이 설치돼 있다.

당뇨병은 오랫동안 의사들의 관심을 끌어 왔지만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못한 점이 많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발달로 당뇨병의 진행을 대부분 억제할 수 있다. 그 결과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발병 후 머지않아 죽었을 몇천만명의 사람들이 큰 고통없이 거의 천수(天壽)를 누리고 있다. 이 의학의 성과는 '현대의학이 거둔 최대 개가의 하나'라고 평가받는 인슐린이 발견됨으로써 그 단초가 마련됐다.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한 밴팅.


꿀처럼 단 소변

당뇨병에 대한 근대의학의 탐구는 영국왕 찰스 2세의 주치의였던 토머스 윌리스에서 비롯됐다. 그는 당뇨병 환자의 소변은 꿀이나 설탕으로 범벅이 된 듯이 매우 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소변'을 뜻하는 그리스어(diabetes)에 '달콤하다'는 라틴어(mellitus)를 덧붙여 당뇨병(diabetes mellitus)이라는 병명을 만들었다.

윌리스는 환자로부터 당뇨병에 걸리면 다뇨(多尿)와 다음(多飮)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알아 냈다. 또 조기 진단과 치료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반면 일단 병이 진행되면 회복이 어렵다는 사실을 밝혔다. 심한 경우 몸이 많이 쇠약해져 혼수상태를 일으켜 사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병의 원인에 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초기에는 당뇨병의 원인이 배설기관인 콩팥의 이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소변에서 다량의 당분이 검출됐다는 말은 콩팥이 혈액으로부터 소변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당분까지 몸밖으로 배출시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1775년 무렵 매튜 돕슨은 환자의 소변뿐 아니라 혈액에도 당분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로써 당뇨병이 콩팥의 이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당뇨병을 일으키는 장기는 어디일까. 1869년 랑게르한스는 췌장에서 이전까지 발견하지 못한 특수한 세포집단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랑게르한스섬'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 조직이 몸 속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슐린(insulin)이라는 이름은 당분대사에 필요한 물질이 랑게르한스섬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붙여진 '섬'을 뜻하는 라틴어(insula)에 기원한다.

당뇨병과 췌장의 관계가 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889년 독일의 내과 의사 민코브스키와 폰 메링의 실험을 계기로 이뤄졌다. 이들은 개에서 췌장의 소화기능을 알아보는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췌장을 제거한 개의 뇨에 파리가 모여들고, 정상적인 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개에서 췌장을 떼어내면 당뇨병이 생긴다는 점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사람에 대한 탐구 결과는 1901년 발표됐다. 미국의 병리학자 린제이 오피는 당뇨병으로 죽은 환자들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 어떤 병리적인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사람 췌장의 기능이 정상이라면 당뇨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췌장에서 분비되는 어떤 물질(인슐린)을 분리해낼 수 있다면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관심의 초점은 인슐린을 추출하는데 모아지기 시작했다.

1908년 독일의 추엘처는 췌장 추출물을 당뇨병 환자들에게 실험적으로 투여했다. 이 치료를 통해 환자들의 소변에서 당이 줄어드는 효과가 약간 나타났다.

하지만 부작용이 나타나 치료는 곧 금지됐다. 췌장에는 혈당을 줄이는 물질인 인슐린뿐 아니라 반대로 늘이는 물질인 글루카곤도 존재한다. 따라서 췌장에서 추출한 물질에 이 두가지 성분이 섞여 있다면 당뇨 치료가 제대로 이뤄질리 없다.

많은 학자들이 인슐린을 '순수하게' 분리해내는데 매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 작업은 1920년대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패기에 가득찬 젊은 학자 프레더릭 밴팅(Frederick Grant Banting, 1891-1941)과 허버트 베스트(Charles Herbert Best, 1899-1978)가 이룬 성과였다.
 

밴팅을 음양으로 지원해준 맥클리어드.


불순물이 부작용 일으켜

성공의 시나리오는 벤팅이 먼저 작성해냈다. 밴팅은 우연히 췌장 기능에 관한 한 논문을 읽으면서 "추출하는 과정에서 인슐린이 췌장액에 의해 분해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만일 분해물질이 있다면 제아무리 정확히 랑게르한스섬에서 인슐린을 추출해도 말짱 헛일이 아닌가.

그런데 당시에는 췌장에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트립신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트립신과 인슐린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벤팅은 "만일 췌장관을 묶어 트립신의 분비를 막는다면 인슐린을 추출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자신의 가설에 확신을 가진 밴팅은 1921년 봄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의 생리학 교수 맥클리어드(John James Rickard Macleod, 1876-1935)를 찾았다. 스스로도 당뇨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는 맥클리어드는 밴팅이 세운 가설의 의미를 한눈에 알아챘다. 그는 밴팅의 연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밴팅에게 실험실, 실험장비, 실험동물을 제공했다. 또 당시 의과대학을 졸업한 대학원생 찰스 베스트를 밴팅의 실험조교로 임명했다.

밴팅과 베스트는 1921년 5월 16일부터 연구를 개시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연구 여건은 신통치 않았다. 겨우 실험실의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었는데다 변변한 연구비는 커녕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역경을 순전히 젊은 의지와 사명감으로 이겨낸 두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력적인 실험을 계속한 결과 불과 두달 남짓 만에 췌장에서 인슐린이라고 생각되는 물질을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7월 27일, 이 물질을 실험적으로 당뇨병을 일으킨 개에게 주사했다. 놀랍게도 혈당치가 떨어지면서 개가 원기를 회복했다. 인슐린의 추출에 이어 동물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제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을 투여해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실험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 밴팅과 베스트가 췌장에서 추출한 성분, 즉 인슐린을 환자에게 투여하자 오히려 환자의 혈당치가 올라가는 현상을 비롯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10여년 전 독일의 추엘처가 겪은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맥클리어드 교수는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James Collip)에게 그 추출물을 좀더 정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느낌 때문이었다. 느낌은 정확했다. 몇주가 되지 않아서 콜립은 거의 순수한 인슐린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콜립 이 분리한 이 인슐린이야말로 사상 처음으로 당뇨병 치료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22년 1월 11일 중증의 당뇨병으로 토론토 대학교 병원에 입원 중인 14세 소년 레오너드 톰슨에게 치료겸 임상실험이 실시됐다. 그 결과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큼 소년의 병세가 호전됐다.

자신을 가진 연구팀은 불과 몇달 동안 수백명의 환자에게 인슐린을 투여해 생명을 구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로써 오랫 동안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당뇨병은 치료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연구팀은 곧 맥클리어드의 검토를 거쳐 토론토 지역 생리학회 학술집담회에서 자신들의 연구와 치료 결과를 발표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4명 모두 훌륭한 공헌

인슐린을 추출·정제하고 임상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적어도 4명이 기울인 노력의 소산이다.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주도한 밴팅, 밴팅의 가설을 이해하고 그가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행정적·학문적 지원을 한 맥클리어드, 밴팅을 도와 실제로 실험을 수행한 베스트, 그리고 임상적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인슐린을 정제한 콜립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누구 한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위대한 업적이 성취되기까지 훨씬 긴 기간이 필요했을 터이다.

인슐린의 임상 효과가 분명히 밝혀진 이듬해인 1923년 노벨상위원회는 밴팅과 맥클리어드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여했다. 노벨상은 타당한 업적을 세운지 적어도 몇해, 길게는 몇십년이 지나 시상하는 것이 상례다. 인슐린의 경우처럼 두해도 지나지 않아 시상하는 예는 좀처럼 찾아 보기 어렵다. 그만큼 이들의 업적은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리고 이런 결정이 적절한 것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가 수상자로 밴팅과 맥클리어드를 선정함으로써 논란이 일어났다. 연구 기간 내내 밴팅과 더불어 일함으로써 업적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베스트와,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유용한 인슐린을 분리해낸 콜립이 제외된 대신 발견에 실제적으로 기여한 바가 크지 않은 맥클리어드를 선정한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수상자들과 역사는 노벨상위원회보다 훨씬 현명했다. 밴팅과 맥클리어드는 수상의 영예와 상금을 베스트와 콜립과 나누었으며, 역사는 그들 모두의 공헌을 제대로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황상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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