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세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최면을 유도할 때 처음 시작하는 말 중의 하나다. 최면은 서서히 자신의 몸과 마음 안으로 주의를 기울여 가는 것, 즉 마음의 문을 열고 보다 깊은 자신의 정신 세계로 향해 가는 것이다.
최면이란 말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인상을 받는다. 최면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막연히 최면을 편안하고 안락하며 고요한 세계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왠지 두렵기도 하고 무서우며 복잡한 세계라는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최면은 일종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다. 그곳은 바다 속과 같이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 마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갈등 혹은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근원이 바로 무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무아지경
우리의 의식은 생리적, 정신적, 또는 약물의 작용에 의해 평상시 깨어 있을 때의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운동기능, 감각기능, 각성기능, 생리기능에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개인의 외부 환경을 인식하는 법과 외부 환경에 대한 상호 작용이 각성시와 달라지고 사람은 내적인 경험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사람의 인식은 항상 주변인식과 초점인식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그런데 주의가 한 곳에 집중되면 주변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즉 산만하게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주변 인식이 적어지고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초점인식은 증가하게 되는데, 이런 의식의 상태를 의학적으로는 최면상태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모든 정신이 공부에 집중돼 누가 옆에서 부르는 것도 모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면상태며 무아지경의 상태다. 또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는 두 남녀는 서로에게 온 정신이 집중된 나머지 추위도 모르고 오히려 따뜻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태 역시 정신의학에서는 최면상태라고 본다. 쉬운 말로 서로에게 최면이 걸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최면 상태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어디에나 있는, 또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매우 정상적이고도 흔한 상태다. 이는 마치 공기의 존재를 평상시에는 잊고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최면이 최고
최면 상태는 그것이 유도되는 방법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자연발생적인 최면'으로, 특별히 최면에 걸려야겠다고 생각한 바도 없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면상태에 돌입해 있는 경우다. 공부, 연극, 영화, 사랑, 일, 또는 놀이에 깊이 몰두해 있는 상태, 혹은 백일몽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정식최면'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최면상태로 유도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면이라 할 때는 정식최면을 의미한다. 최면치료는 의사가 환자를 최면 상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해주므로 정식최면에 속한다.
셋째는 '자기최면'으로서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최면상태를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최면치료를 받으면서 의사에게 최면 방법을 배우면 스스로 최면을 유도할 줄 알게 된다. 자기최면이 가능해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의사에 대한 의존심을 줄이게 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치료시간 외에도 스스로 최면을 취해서 치료효과를 높일 수 있다.
둥둥 떠오르는 느낌
최면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이 이완돼 편안해진다. 이완은 자율신경의 활동이 감소한 상태, 그 중에서도 교감신경의 활동이 감소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감신경은 주로 몸의 근육을 수축시키고 긴장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교감신경의 활동이 감소하므로 몸이 이완되는 것이다. 최면을 유도할 때 보통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완이 되기도 하지만, 특별히 이완을 하도록 암시를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이완이 된다.
최면은 유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을 풀어 주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모든 경우에 가장 빠른 치료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완되면 혈압, 심장박동수, 호흡수, 대사 속도 등이 감소되며 체온은 상승된다. 최면시 뇌파는 수면(잠)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며 일반적인 각성상태와 비슷하다. 다만 이완의 정도를 나타내는 알파파가 증가하는데 이는 커다란 의미는 없다. 최면이 수면이 아닌 것은 뇌파를 보면 명백하다.
최면상태에서는 평상시에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감각들을 경험할 수 있다. 몸이 둥둥 뜨는 느낌, 팔이 저절로 올라감, 근육이 쭉 풀어지는 느낌.... 또한 영상이 보인다, 소리가 들린다, 통증이 사라지는 등의 경험도 할 수 있다. 몸이 둥둥 뜨는 느낌은 가장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감각 변화의 하나다.
"둥둥 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라는 말을 들은 후에 뜨는 감각이 생길 수도 있고, 뜨는 것에 대한 아무런 말을 듣지 않았는데 저절로 생길 수도 있다. 사실은 뜨는 감각만 있을 뿐 결코 실제로 지면에서 몸 전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왼손이 풍선처럼 가벼워지면서 둥둥 떠오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왼손의 팔목에 커다란 애드벌룬이 묶여 있어서 그 애드벌룬이 하늘로 둥둥 떠오르면서 왼팔을 하늘로 들고 올라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라는 말을 들은 후에는 일부러 들어올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실제로 왼팔이 저절로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환시와 환청
최면시의 영상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이 생생하게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생리학적으로는 환시(실제로 없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로서 우리들이 꿈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최면상태에서는 실제로 있지 않은 소리를 경험하는 환청이 일어나기도 한다.
환시와 환청은 꿈과 최면 상태에서뿐만 아니라 약물에 의해서 일어날 수도 있고 정신병(정신분열증 등)으로 인해 일어날 수도 있다. 최면상태에서는 환시와 환청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본다든가, 날아다니는 새소리를 듣는다든가, 영화나 연극을 본다든가 하는 일들을 마치 현실에서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다. 마약을 복용하고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는 경험을 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일도 모두 환시에 의한 것이다.
또 하나 최면에서의 커다란 감각 변화는 마취다. 이것을 최면마취라고 하는데, 원래 가지고 있던 통증이 줄어들 수도 있고 새로 가해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최면 상태에서 환자의 손등에 주사 바늘을 찔러 보면 대부분의 환자는 자기의 손등에 언제 바늘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최면마취의 효과는 두통, 요통 등 만성 통증에 효과를 발휘해 최면치료의 주요한 방법이 되고 있다.
시간이 짧아져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에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여행하면서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다. 한시간 정도의 최면치료가 끝나고 난 다음 시계를 본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라고 말하는 일이 자주 있다.
최면 상태에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최면 상태에 있었던 시간을 실제의 시간보다 약 40% 정도 짧게 느낀다고 한다. 최면상태에서는 들어오는 정보의 수가 적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정보가 적어 시간을 짧게 느낀다고 한다. 뇌에서 측정하는 시간 길이는 처리하는 정보의 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면상태에서는 자아가 분리된다. 한가한 오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연필로 끄적끄적 낙서를 하다 보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아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상태가 바로 자연최면에 의한 해리(의식이 둘로 분리돼 서로간에 소통이 안 되는 상태)이다.
한 곳에 깊이 몰두하는 상태, 즉 최면상태가 되면 자연히 의식은 둘로 갈라져서 서로간에 소통 또는 연락이 끊어지게 돼, 의식의 한 부분이 하는 일을 의식의 다른 부분은 모르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잠재의식의 세계
"왼손이 풍선처럼 가벼워지면서 저절로 올라갈 것입니다." "잠시 후 실제로 눈을 뜬 다음 제가 이 팔을 잡아 내리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 의사가 올라가 있는 팔을 내려주고 나면, 환자는 그 팔을 의식적으로 들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팔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무의식이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환자는 의식적으로는 의사가 팔을 내린 다음에 팔이 저절로 올라가리라는 말을 해준 것을 잊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의사의 지시를 기억하고 그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 팔을 올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무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학교에서 쳐야할 시험만 골똘히 생각하며 등교를 하다보면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저절로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틀고 교차로를 건너 학교에 도착해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오늘 아침에 자신이 어디를 어떻게 거쳐왔는지를 완전히 잊고 무의식적으로 등교한 것이다.
의식의 한부분은 시험만을 생각하면서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지만 또다른 한부분은 이와 전혀 관련 없이 길을 찾고 교통신호를 알아차리는 일을 수행한 것이다. 최면의 무의식성이란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도 저절로 행동이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정신과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무의식은 모두가 모른다는 뜻의 무의식, 즉 의식의 밑에 잠겨 있는 우리의 마음인 잠재의식이다. "최면이 무의식에 가깝다", "최면 상태에서는 무의식의 내용들이 나온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잠재의식이라는 뜻이지 혼수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거의 모든 정신질환은 무의식성에 기인한다. 즉 환자가 일부러 그런 증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그 증상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병의 근원에 접근하는 방법 역시 무의식적이어야 하고, 치료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식 세계의 논리로는 무의식 세계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이상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무의식의 논리와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잃어버린 돈도 찾아
최면 상태에서는 기억이 잘 떠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최면을 통해 까맣게 잊었던 기억을 찾아낼 수도 있다. 한번은 20대 중반의 회사원이 나를 찾아왔다. 수표를 잃어버렸는데 분실신고를 하고 보름 동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잃어버린 날은 기억나지만,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최면을 걸고 그날의 일들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이 천천히 눈앞에 떠올려 보라고 했다. 그날의 모든 일들은 뇌 안의 어딘가에 반드시 녹화돼 있을 것이므로, 녹화된 부분을 찾아서 VTR에 넣고 슬로 비디오를 보듯이 천천히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날의 기억들이 화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날 다닌 한 은행의 차장 책상 위에 그 수표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은행을 떠날 때 탔던 택시 안에는 그 수표가 없는 것이 보였다.
이것으로 그 수표는 그 차장 책상과 출입문 사이에서 없어진 것이 분명해졌다. 다음날 그가 그 은행의 차장 책상에 가보았을 때 그 수표는 책상과 책상 사이의 틈에 깊숙이 끼워져 있었다.
암시효과 극대화
우리는 곧잘 최면과 암시를 거의 동시에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최면치료는 암시에 의한 치료라고 단순하게 알고 있는 시람도 있다. 최면의 모든 것이 암시는 아니지만 암시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최면치료에서 쓰는 암시라는 말은 영어 Suggestion의 번역어로서 적절치 못한 번역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말이기에 그냥 사용하기로 한다. 암시란 암암리에 혹은 은연중에 어떻게 하라고 의견을 제시해 주거나 어떻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이런 암시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행동하는 것은 최면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친구에게 "걱정마. 일이 잘될 거야" 하면서 위로하는 것도 그 친구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는 아마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면치료는 무의식을 자극해 기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암시에 의한 효과가 일상적인 상황에서보다 훨씬 극대화된다. 한 최면실험에서 의사는 환자들에게 "앞으로 48시간 동안 '실험'이란 말만 들으면 몸을 긁게 될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말을 들은 것은 곧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 결과 최면이 깊게 걸린 사람들은 실험이 끝났다는 말을 들은 후에도 48시간 동안은 계속 긁어댔다. 최면이 끝났지만 최면에 깊게 걸렸던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몸을 긁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계속 작용한 것이다. 이를 보면 최면상태의 암시는 무의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암시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면상태에서 암시가 잘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최면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집중하거나 주의를 기울여서 "좋은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서 해야지" 하는 마음의 자세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야만 깊은 최면상태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최면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자체는 이미 의사의 말을 잘 듣고 그 말을 그대로 좇아서 하겠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사람도 최면상태에서는 자신에게 해주는 말을 잘 좇아서 하게 마련이다.
거부하는 사람은 최면 안돼
19세기에는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에게나 최면을 걸 수 있고, 그 능력은 최면을 거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최면에 대한 연구가 보다 과학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최면에 걸리는 정도가 개인에 따라서 다르며, 최면을 유도하는 사람의 능력보다는 최면에 걸리는 사람의 감수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이 얼마나 최면에 잘 걸리느냐 는 것을 최면감수성이라고 한다.
최면감수성은 두 가지의 요소로 구성돼 있다. 최면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환경적인 요인이 그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최면상태를 경험하고 싶어도 타고난 최면능력(최면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최면상태를 경험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최면능력을 선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최면이 유도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상의 결과로 측정한 최면감수성과 스스로 느끼는 최면의 깊이는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최면감수성 검사에서는 매우 깊은 최면상태에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본인 스스로는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최면에 대한 기대가 잘못된 경우인데, 자기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심이 많은 정신분열병 환자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들은 최면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러이러한 현상이라고 가르쳐줘도 믿지 않는다.
반대로 최면감수성 결과로는 전혀 최면에 걸렸다고 할 수 없는데, 본인 스스로는 최면에 깊이 걸렸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최면감수성 검사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측정할 뿐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부분을 측정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