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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형 첨단밸리 휴먼 인프라를 구축하라

지난해 말 정부는 경기, 대구, 경북, 인천, 광주, 충남 등 6개 지방자치단체를 테크노파크 사업자로 선정해 발표했다. 이들에게는 올해 안으로 총 3백억원 가량의 자금이 지원될 예정이다. 또한 정부는 테크노파크 조성을 전국적으로 확대키로 하고 이번에 제외된 곳도 단계적으로 추가 선정해 지원할 방침이다.

정부가 첨단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근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나 국회의원선거, 대통령 선거 때마다 입후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역공약의 하나로 ‘한국형 실리콘밸리’의 건설을 소리높여 외쳤던 것이다. 이번 선정은 이같은 공약이 좀더 구체화된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인천시는 송도 신도시 안에 미디어아카데미와 미디어파크, 소프트웨어파크, 멀티미디어정보센터 등을 갖춘 대단위 미디어밸리를 조성한다. 또 경기도는 안산지역에 벤처빌딩과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하며, 포항시는 포항공대와 함께 2천억-3천억원을 투자해 5백여개 벤처기업과 창업보육센터,기술이전센터 등 경영지원시설을 세울 예정이다. 이들 외에도 현재 벤처기업 전용 산업단지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곳은 대전, 춘천, 원주 등 전국에 걸쳐 대략 30개가 넘는다.

단지 조성에 나선 지자체들은 대개 대학과 연구기관의 기술개발 성과를 산업계에 연계시키고, 또 산·학·연의 연구개발자원을 집적시킨 단지를 구상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사실상 국내의 전 대학과 연구기관은 첨단기지를 뒷받침하는 배후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

이같은 열풍은 첨단산업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고 지역의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며, 벤처창업을 활성화하는 등 분명 바람직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볼 때 우려되는 점도 적지 않다. 부동산투기와 같은 부작용을 논외로 한다 해도, 지방자치단체들이 과연 테크노파크 사업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만큼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시적 유행에 왔다갔다 한 이전의 허다한 전시행정 사례로 볼 때 기우(杞憂)만은 아닌 것이다.
 

서울 강남의 이른바 포이밸리. 상당수 정보통신 관련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지만, 시너지 효과는 거의 없다.


땅만으로는 안돼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이전까지 위력을 발휘하던 기계 중심의 산업사회가 지식 중심의 정보사회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실리콘밸리가 전세계 정책입안자들의 견학 장소가 될 만큼 성장신화를 만들어내며 세계 첨단산업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 원동력은 아이디어와 인프라, 그리고 문화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테크노시티 건설은 70년대의 수출자유공단 건설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작년 11월 펴낸 ‘실리콘밸리의 다이내믹스’라는 연구보고서는 “벤처기업이 활성화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실리콘밸리같은 벤처단지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강력한 벤처 자본과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첨단 인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지만, 이런 토양이 없는 우리나라에 미국식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자칫 자원의 낭비를 초래할 뿐 아니라 벤처기업 발전에도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첨단단지 조성계획은 70년대 이루어진 일본식 개발 모델과 매우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이의 핵심 동인(動因)은 토지개발이었다. 넓은 부지를 싼 값에 제공하고 운송을 위한 도로를 놓고, 전기를 끌어와 공장을 유치하는 이 방식은 일정 부분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땅을 중심으로 한 지원체제가 먹히는 것은 하드웨어 생산 분야에서의 얘기고, 소프트웨어 산업은 경우가 다르다. 흔히 인프라라고 하면 통신망이나 도로 등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만을 생각하지만, 이같은 물리적 인프라는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이를 테면 땅값이나 임대료같은 비용은 실리콘밸리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데 언급되지 않는 사항이다.

정부의 지원 역시 마찬가지.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정부도 지금까지 나름대로 첨단기업에 대한 많은 지원책을 제시해놓았다. 이미 스톡옵션에 대한 세제지원을 시행해 인센티브에 의한 유능한 인력 확보의 길을 터놓았고, 벤처기업의 장외시장 등록요건을 완화해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도 마련했다. 또한 기술력을 보유한 보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까다롭던 벤처기업에 대한 기준요건도 완화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 미국의 정보통신업체들이 자신들의 사옥을 대학처럼 만드는 것은 연구와 개발을 한 과정에서 이루기 위한 것이다.


‘품격 있는 돈’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지, 그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는 요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인프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는 교육, 행정, 금융에서부터 국민의식에 이르는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 모두가 포함된다. 사회 시스템 자체를 첨단기업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기업 활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금, 시장, 인력의 3가지 요소에 초점을 맞춰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자.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 관련 법에 따르면 벤처기업이란 ‘창업투자회사 등이 자본금의 1백분의 20 이상이나 주식 인수 총액이 1백분의 10 이상인 기업’을 말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대략 정보통신 등 첨단 분야에 신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을 벤처기업이라 부르고 있다.

이 두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서울 포이동의 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임원은 현재의 상황을 “뭇 남자들로부터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하지만 정작 아무로부터도 청혼받지 못한 여자”에 비유한다.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정작 누가 돈을 댈 것이며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품격 있는 돈’이 적은 탓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벤처투자자가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가진 상품성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제조업식 사고에 젖은 시스템 안에서는 쉽사리 자기의 지갑을 여는 전주(錢主)를 만나기 쉽지 않은 형편.

국내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대덕과학단지 연구원 출신 창업주들의 모임인 ‘대덕21세기회’의 한 관계자도 “62개의 회원사들이 안고 있는 사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금조달 문제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고 있다”고 소개한다. 아무리 유망한 기술이라도 이를 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1-2년의 연구투자기간이 소요되는데,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하는” 이 기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것.

쉽게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이게 또 만만치 않다. 기술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공식적으로 필요한 서류만 70가지 이상이나 된다. 여기에는 대표이사 부인의 호적등본까지 포함된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연구개발 인력까지 동원돼 허비하는 시간이 보통 1주일 이상이다. 온라인이나 팩스 제출은 사절. 또 새로 자금을 빌리려면 똑같은 서류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 불신으로 얼룩진 사회 시스템 때문에 혹독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벤처기업 가운데도 어려움을 무릅쓰고 짧은 기간에 적은 투자와 소수의 인력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올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반도체 검사장비 생산업체로 자본금이 67억5천만원에 불과한 미래산업의 액면가 1백원짜리 주식은 그 50배 이상인 5천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또 요즘은 시장 상황으로 사정이 나빠지긴 했지만, 39억원의 자본금을 가진 한글과컴퓨터사는 96년 9월 장외시장 등록 당시 2만원이던 주식이 그해 11월에는 11만원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적인 국내의 벤처기업도 미국의 벤처기업과 비교해 보면 사업 동기에서부터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미국 벤처기업이 주로 사업화 초기의 첨단 기술분야에 집중돼 있는 반면, 국내 벤처기업은 국내에서는 신기술이지만 선진국 시장에서는 한창 성장하고 있는 분야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

외국의 기업에 비해 우리의 기업이 성장 정도나 규모에서 크게 뒤지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개발된 기술을 실현할 시장의 성숙 여부에 있다. 미국의 경우 무수한 첨단산업과 관련산업이 있어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또 일단 개발된 기술이 사업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뛰어난 기술을 상품화하더라도 이것을 소화할 수 있는 내부 시장 기반이 미약하다. 때문에 신기술을 상품화하기 전에 시장성을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하고, 기술성과 시장성이 동시에 충족돼야 제품화에 들어갈 수 있다. 이중의 어려움이다.

사옥이 아니라 캠퍼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세계를 상대로 한 상품을 만드는 것 외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다. “국내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아이템이 국제 시장에 나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한글과컴퓨터사 이찬진 사장)라는 반문이 없진 않지만, 변화무쌍한 기술의 시대에 국내 시장을 잡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노리는 방식은 구태의연하다.

그렇다면 세계화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를 알아보기 앞서 먼저 실리콘밸리에서 한 회사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살펴보자. 기술을 가진 사람은 먼저 창업한 사람이나 창업투자회사 등을 통해 자신을 지원할 투자자를 찾는다. 투자 타당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투자자는 돈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자는 완성도를 높이는데 전력한다. 그리고 일단 기술이 상품화되고 본격적인 기업으로 움직이기 직전 단계부터 홍보, 마케팅, 세무, 회계, 법률 등 각 기업활동과 관련된 제반 영역을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처리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각 과정의 진행 단계마다 요소요소에 ‘지식’을 가진 전문가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즉 아이디어와 돈을 하나로 묶는 과정이나, 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 과정 모두가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반 분야의 아웃소싱이 일반화된 미국의 풍토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사업 구상 단계부터 ‘사기’ 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로 보자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년여동안 (주)미디어밸리에서 연구조사팀 팀장으로 활동하던 김용호박사는 “실리콘밸리는 그 자체가 휴먼인프라”라고 정의하면서 “무엇보다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입지에 잘 갖추어진 사무실을 둔다 해도 결국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미디어밸리 재직 당시 국내 2백여 기업을 조사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다.

벤처기업 설립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술 인력만을 놓고 봐도 이 지적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소프트웨어가 생산성 향상의 핵심임을 비로소 깨달은 기업들은 이 불황 속에서도 소프트웨어 설계 능력을 지닌 프로그래머를 필요 인원의 20% 이상 확보하려 하고 있지만, 원하는 능력을 지닌 인원을 충원하는데는 여전히 곤란을 겪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봐도 현재 프로그래머는 대략 40만명 부족한 상태이며, 이는 앞으로 10년 안에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외국의 정보통신기업들이 행하는 기업 합병 인수(M&A)도 결국은 인력 확보를 위한 수단이란 것이다.

김박사가 말하는 프로그래머란 단순히 컴퓨터 언어를 잘 다루고, 모니터 앞에 앉아 눈이 빠지도록 코딩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시장의 동향을 이해하고, 글로벌 네트워크에 연결된 사고방식에 따라 개발에 나서는 프로페셔널이다. 이들은 혁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해주는 곳으로의 이동도 주저하지 않는다. 몸담던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기면 ‘배신자’로 취급하는 풍토에서는 쉽게 자리 잡기 힘든 시스템이다.

한편 이같은 인력을 보유한 기업의 운영방식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외국의 정상급 정보통신업체들은 파격적으로 프로그래머의 근무시간 절반을 프로젝트와 관련된 교육에 투입하곤 한다. 배우는 것도 일인 셈이다. 이는 프로그래머의 효용이 근무시간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며, 급속한 기술변화에 적응해야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미국의 정보통신 최상위 업체들이 자신들의 사옥을 대학처럼 만들고, 또 캠퍼스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정부가 앞장서 추진하고 있는 현재의 첨단밸리 건설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이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아사 직전에 빠진 나라 경제를 재건한다는 목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첨단 기지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휴먼 인프라(기술 전문가, 경영전문가, 투자자 등의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사회 전반에 깔린 기존의 낡은 틀을 지식기반 정보사회에 걸맞는 시스템으로 교체한다면, 경제적 이득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무한기술투자의 이인규 사장은 “기존 인프라가 대량생산·대량유통을 중시한 공단형태였음을 감안할 때 지식산업사회를 겨냥한 첨단기술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는 취지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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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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