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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로 환생한 석주명의 꿈

식민지 백성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석주명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숙소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예정된 곤충채집은 엄두도 못내고 교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지도교수인 오카지마(岡島銀次)가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밖에 나가 곤충을 채집해 오는 학생에게 상을 주겠다.” 이 빗속에 곤충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지도교수의 말씀인지라 그들은 채집도구를 갖추고 하나둘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나서 모두들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금 뒤 조그만 체구의 조선인 학생이 배낭에서 삼각지 백여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교수 앞에 내놓았다. 각각의 삼각지 속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씩이 소중히 싸여 있었다.

낙제가 만든 우등생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의 장래를 일찍이 기약했던 가고시마 농림학교 유학시절의 일화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1년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에 전학한 석주명은 처음에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집안이 넉넉해서 휴일에는 개성 근처의 명승지로 놀러 다니고 학교가 끝나면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특히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죽어라고 기타만 치고 유흥에 들뜬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2학년 말 겨울방학 무렵에 그에게 날아온 성적표는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방학 때 신나게 놀 계획을 세우던 석주명이 받은 성적은 반에서 꼴찌였고 빨갛게 낙제표시가 된 과목도 여럿이었다. 그는 성적표를 앞에 두고 방탕한 자신을 반성하며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다음날부터 석주명은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친구들이 고향으로 모두 떠난 텅빈 하숙집에서 그는 방학을 고스란히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방학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된 그의 어머니는 석주명의 하숙집으로 올라왔다. 하숙방 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공부에 정신이 팔려있는 그를 보고 어머니는 그날부터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석주명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코 실천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한번 잡은 것은 끝장을 봐야 성이 찼다. 그가 송도고보 시절 기타에 미친 것도 이런 성품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타를 붙들고 밤낮을 씨름했다. 한때 음악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타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연주를 들으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자신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를 연주였다. 그날로 기타를 때려부숴 버리고 다시는 기타를 만지지 않았다.

곤충채집 방학숙제의 시조

밤낮을 가리지 않은 공부 덕분에 석주명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 합격한 유일한 한국학생이 됐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동물을 좋아했던 그는 예의 성실함으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의 주목을 받으며 곤충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1년 졸업 후 귀국해 송도고보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나비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나비는 곤충학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연구대상이었다.

석주명은 우선 주변에서부터 다양한 나비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개성을 벗어나 나비를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허름한 복장에 좌우로 흔들거리는 독특한 걸음걸이로 쓸모도 없는 나비를 찾아 헤매는 그를 땅꾼으로 여기고 뱀이 많은 곳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비를 잡아 무엇에 쓰려느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도 그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괴짜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방학마다 포충망을 들고뛰는 연구보조원이 돼야 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의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리고 석주명은 사람들 사이에 ‘송도(개성)의 기인’, ‘나비박사’로 알려지게 됐다.

세계적 학자로서의 첫발

석주명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일화가 바로 송도고보의 박물관에서 이루어진 ‘미국인 모리스와의 우연한 만남’이다. 지질학자로서 몽고 지역을 탐사하던 ‘앤드류스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모리스(F.K. Morris)는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한 뒤 일행과 떨어져 경성(서울)으로 오던 중 개성(일본어로 카이조)을 경성(케이조)으로 잘못 알아듣고 개성에서 기차를 내리게 됐다. 놓친 기차가 막차여서 할 수 없이 개성에서 하루를 머물게 된 그는 가 볼만한 곳을 찾다가 이미 명소가 돼 있던 송도고보의 박물관 표본실을 방문하게 됐다. 거기에 진열된 수많은 표본들에 감탄한 모리스는 미국의 박물관과 표본을 교환할 것을 권유했으며,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간 뒤 직접 나서서 미국의 여러 박물관 및 대학과 송도고보와의 교류를 주선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석주명의 나비연구는 다시금 화제가 됐으며 ‘세계적인 과학자’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됐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리스가 송도고보를 방문했을 당시는 석주명이 부임하기 이전이었다. 또 모리스의 감탄을 자아낸 표본들은 화려한 나비표본이 아니라 전임 생물교사였던 원홍구가 채집한 조류 박제를 비롯, 송도고보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여러 동물의 표본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이후의 송도고보와 외국의 여러 기관 사이의 표본교환은 석주명의 나비표본이 주요 품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석주명이 모리스와 만난 경위야 어찌됐건 석주명의 학문적 성공이 서양인 학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이룩한 성공의 핵심은 유명세가 아니라 그의 학문적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연구방법을 선택하고 이를 남다른 성실성으로 실천했던 진정한 학자였던 것이다.

나비분류학 새시대 열어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바로 새 학명을 명명했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외국학자들에 비교가 안되는 많은 개체를 채집해서 기존에 등록된 종(種)이나 아종(亞種)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중에도 50kg도 안되는 날씬한 모델이 있는가 하면 2백kg에 육박하는 씨름선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몸무게의 차이가 크다고 해서 다른 종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수의 개체를 채집해 각각의 변이를 조사하면 처음에 현격한 차이 때문에 다른 종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한 개체수가 적을 때는 변이의 극단에 있는 표본을 새로운 종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조그마한 차이만 발견되면 새로운 종으로 등록해서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도 새로운 종을 남발하는데 한몫을 했다.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한 석주명은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서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채집된 방대한 나비 표본에서 날개의 형태, 무늬나 띠의 색채, 모양, 위치 등 다양한 형질의 변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관찰했다. 배추흰나비를 한반도 각지에서 봄에서 가을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쳐 17만여 개체나 채집해 형질을 살핀 연구는 그 중에서 대표적이다. 그는 모든 개체의 앞날개의 길이를 mm단위로 측정해 분석하고, 최소 17mm에서 최대 34mm까지 크기 차이가 두배나 나는 것도 실제로는 평범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 연구로 인해 그동안 몸집의 크기, 날개의 형태, 무늬의 양상에 따라 다른 종, 아종, 이형이라고 보고된 20여개의 학명이 하나의 배추흰나비로 정리됐다.

석주명은 뱀눈무늬의 변이연구에서도 무늬가 하나도 없는 것에서부터 많게는 12개가 있는 것까지, 그리고 무늬의 위치가 다른 68가지 타입의 나비가 모두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로부터 그동안 크기나 무늬의 양상에 따라 아종으로 발표됐던 10여개의 학명이 학계에서 사라졌다. 20여년의 연구생활 동안 모두 75만여 개체에 달하는 방대한 표본을 조사했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연구에 의해 한국산 나비에 관한 동종이명(同種異名) 8백44개가 제거됨으로써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집념의 추적자

나비에 대한 석주명의 열의는 집념 그 자체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나비가 발견되면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쫓아가 잡고 말았다. 한번은 지리산에 채집여행을 갔다가 팔랑나비과의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한눈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나비임을 알아챈 그는 나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길이가 4cm 정도밖에 안되는 그 작은 나비는 석주명에게 약이라도 올리듯이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기를 반복하며 도망갔다. 나비만을 보면서 쫓아가는 바람에 수도 없이 넘어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는 끈기 있게 나비를 쫓았다. 3시간이 넘는 추격전으로 기진맥진해 더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될 무렵 석주명의 끈기에 지친 나비가 드디어 포충망 안으로 들어왔다.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서 잡은 나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종임을 확인하는 순간 상처의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이 종은 ‘지리산팔랑나비’라는 우리 이름을 갖게 됐고 지리산이 서식의 북방한계선으로 고쳐지게 됐다.

한국산 나비에 대해서는 석주명이 독보적인 권위를 확보하게 되자 영국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회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작성해 출판할 것을 의뢰했다.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이 이때 정리된 책으로 한국산 나비 연구의 결정판이요, 각국의 학자에게 필수참고도서가 됐다. 4백쪽이 넘는 분량에 영어로 된 이 책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고운 나비, 고운 이름

3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인정받으면서 석주명의 연구열은 더해 갔고 그는 연구시간을 벌기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년 정도 서울에서 연구하던 그는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다. 그는 이 기회에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를 완성하기로 하고 모두가 꺼리는 벽지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다.

제주도에 머무는 2년여 동안 그는 나비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에 힘을 쏟았다. 나비학자로서 언어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외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의 방언연구는 나비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제주 방언이 다른 지역 방언과 어떤 친연관계를 보이는가 하는 연구는 나비의 지역적 분포와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과 방법론상으로 똑 같았고, 나비의 분포는 방언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훗날 아름다운 우리말 나비이름을 짓는데 큰 힘이 됐다.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에 대한 연구는 제주도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었고, 1949년부터 ‘제주도 총서’ 여섯 권으로 정리돼 나왔다. 오늘날 제주도의 생활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서 사투리를 완벽하게 채집하기란 불가능하다. 석주명의 방언연구는 제주도가 아직 육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제주도 사투리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고어, 동남아지역의 언어와의 관련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지금 쓰이고 있는 나비 이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재치있고 풍부한 감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봄처녀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외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등 우리말의 정감을 한껏 살린 고운 이름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꽃 모르는 나비학자

석주명은 나비연구에서는 세계적인 학자였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삶의 모든 부분을 나비연구에 바친 그였으니 원만한지 못한 가정생활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중매로 맺어진 부인과는 처음부터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석주명은 고집이 세고 학문밖에 모르는 외골수였으며, 그의 부인은 활달한 성격의 자기 주장이 강한 신여성이었다. 당시 안정적인 봉급을 받고 시간 여유가 많은 교사는 배우자의 직업으로는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수업 외의 모든 시간을 나비연구에 쏟았고, 많지 않은 월급에서 상당량을 경비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으며,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 일이 있을 때만 벨을 눌렀다.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때문에 신혼 초기부터 숱한 부부싸움을 벌였고 결국 1년 동안의 재판을 거쳐 4년만에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미 국내외에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였기에 그의 이혼은 구설에 오르내렸고 신문은 ‘꽃 모르는 나비 학자’라며 연일 그의 사생활과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걸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 학문의 세계”라는 그의 신념에서 본다면 결혼이든 무엇이든 학문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희생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나비로 환생한 죽음

1950년 전쟁의 총성이 서울을 휘몰아 칠 때도 석주명은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는 1938년부터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한국산 접류 분포 지도’가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수십만 개의 나비 표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과학박물관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1950년 9월말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과학박물관이 전소되고 그의 분신이었던 나비표본과 원고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10월 6일 폐허가 돼버린 과학박물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석주명은 시내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불의의 총격을 당하고 말았다. 80을 목표로 학문에만 정진했던 그의 생애가 겨우 마흔 둘에 접히고 만 것이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죽음의 총성과 함께 남긴 최후의 한마디였다.

석주명이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일본인 학자 시로즈는 그를 기려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을 Hestina japonica seoki로 지었고, 시바타니는 네발나비과에 Seokia라는 새로운 속(屬)을 설정해 홍줄나비의 학명을 Seokia pratti로 명명해 주었다. 석주명이 죽어서도 ‘석’(seoki, seokia)자가 붙은 나비와 함께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199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문만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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