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발 밑에 조그만 개미들이 기어간다. 정말 하찮은 미물이다. 누가 이들에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찰스 다윈에겐 이들이 엄청난 우환거리였다. 다윈은 일개미나 일벌처럼 자신은 새끼를 낳지 않으면서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불임성 일꾼 계급이 어떻게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는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불임성 일꾼들은 자손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유전이 되지 않으니 자연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임성 일꾼들은 1840년대 초부터 줄곧 다윈을 괴롭혔다. “나는 이 문제에 반쯤 넋이 나갔다.” 다윈은 토로했다. 그는 영국 전역의 양봉업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벌의 행동에 혹시라도 유전적 변이가 관찰되나? 기운 빠지는 답장들만 날아들었다. 일벌들은 모두 다 똑같이 행동하며 변이는 없단다. 설상가상으로 당대의 위대한 곤충학자인 윌리엄 커비와 윌리엄 스펜스는 ‘곤충학 입문’에서 불임성 일꾼 계급이 창조주의 신성한 손길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주장했다. 마침내 다윈은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 제7장에서 불임성 일꾼 계급이 “하나의 특별한 어려움이며, 사실 처음에는 도저히 극복 불가능하고 내 이론 전체를 무너뜨릴 것 같다고 봤다”고 고백했다.
남을 돕는 이타적 행동이 왜 다윈의 진화 이론에 그토록 큰 위협이 될까. 다윈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협력은 흔하다
지난 화에서 우리는 자연 선택이 생태계나 종,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번식 성공도를 늘리게끔 작동한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다윈은 열렬한 개체 선택론자였다. 어떤 늑대 개체군에서 갑자기 먹잇감이 씨가 말랐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재빠르고 날렵한 늑대가 살아남아서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 다윈은 모든 복잡한 구조와 행동은 그 소유자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자연 선택은 개체에 조금이라도 해로운 특성은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은 각 개체의 이득에 의해서만, 그리고 이득을 위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개미와 일벌은 다윈에게 모욕감을 준다. 그들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에게 이득을 주게끔 정교하게 설계됐다. 예컨대, 중남미의 열대림에서 나뭇잎으로 버섯농사를 짓는 잎꾼개미(leaf-cutter ant)의 일개미들은 각자 다른 일에 특화된 여러 계급으로 이뤄진다. 가장 큰 계급과 가장 작은 계급은 몸무게가 무려 200배나 차이 난다. 대형 일개미는 군락을 지키고 과일을 자른다. 중형 일개미는 이파리를 자르고 수송한다. 소형 일개미는 버섯농장을 돌본다.
불임성 일꾼 곤충의 이타성 외에도, 다른 개체에 번식의 이득을 주는 협력적인 행동은 자연계에 대단히 흔하다. 자신의 잇속을 취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남들에게도 이득이 돌아가는지 (상리적 협력), 아니면 자신은 순전히 손해만 보면서 남에게 이득을 주는지(이타적 협력)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집단생활을 하는 미어캣은 천적이 오는지 경계하고자 뒷다리로 발딱 일어서서 보초를 선다. 마치 ‘무한도전’ 공개수배 편에서 분식을 먹으면서도 형사가 오지 않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 유재석처럼 말이다. 미어캣의 이러한 경계 태세는 무리 안에 새끼가 있을 때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 최근에 확인됐다. 즉 어쩌다 보니 남도 도와준 게 아니라, 무리를 위해 자신을 위험으로 내모는 진정한 이타심으로 추정된다.
일부 오목눈이류 새에서도 끈끈한 희생이 존재한다. 장성한 자식들이 독립하지 않고 둥지에 계속 머물면서 부모가 낳은 어린 동생들을 먹이고 보살핀다(19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장녀가 대학을 포기하고 신발공장을 다니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던 장면이 연상된다). 심지어 원시적인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서도 이타성이 발견된다. 딕티오스텔리움(Dictyostelium)은 각자 따로 지내다가 먹이가 모자라면 함께 모여서 다세포 유기체를 이룬다. 이 중 어떤 아메바들은 포자가 돼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 계속 번식하게 된다. 반면에 어떤 아메바들은 기꺼이 자기 목숨을 던져서 포자를 떠받쳐주는 받침대가 된다. 물론 인간 사회의 고결한 헌신과 봉사, 자기희생을 빼놓을 순 없다. 내전으로 황폐해진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 자원해 고아와 나병 환자들을 돌보다 타계한 이태석 신부의 삶은 큰 울림을 준다.
자연 선택은 개체의 번식 성공도를 높이는 형질만을 편애한다. 따라서 때로는 자신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의 번식에 도움을 주는 이타적 행동은 자연계에 아예 없거나 극히 드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아메바에서 일개미, 오목눈이, 미어캣, 인간에 이르기까지 남에 대한 도움과 헌신은 자연계에 차고 넘치도록 존재할까. 이만하면 다윈의 진화 이론을 몽땅 무너뜨리고도 남지 않을까.
‘사소한’ 어려움에 대한 다윈의 해답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불임성 일꾼을 가리키며 “특별한 어려움”이라고 언급한 대목은, 빈번히 인용되면서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몇몇 진화생물학자들은 이것이, 불임성 일꾼 같은 이타성의 진화가 진화생물학의 핵심 논제임을 다윈도 일찍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종의 기원’을 찬찬히 읽어보면 다윈은 불임성 일꾼이 어떻게 처음 진화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일꾼 곤충들이 불임이 되었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에서 신체 구조가 급격히 변형된 과정을 설명하기보다 딱히 더 어렵지는 않다…. 나는 자연 선택이 이 행동을 만들었다는 설명에 어떤 큰 어려움도 찾을 수 없다(‘종의 기원’ , 236쪽).
후세의 사가들에 따르면, 불임성 일꾼 곤충이 다윈을 괴롭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윈은 불임성의 진화 그 자체는 별로 큰 어려움이 아니며 자신이 이미 정답을 찾았다고 믿었다. 다윈에게서 “가장 큰 어려움”은 형태적으로 다양한 여러 일꾼 계급들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는 문제였다. 잎꾼개미에서 나타나는 대형, 중형, 소형 일개미들을 되새겨 보시라. 허무하게도, 오늘날 이 문제는 어린아이 팔 비틀듯 간단하게 설명된다(다소 전문적이므로 여기선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임성 일꾼의 진화라는 ‘사소한’ 어려움에 대해 다윈이 찾은 해답을 들어보자. 다윈은 “선택이 개체뿐만 아니라 가족에도 가해질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일개미가 번식을 포기한 채 군락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는 손실을 본다 해도, 가까운 피붙이들이 덕분에 안전하게 번식한다는 크나큰 이득으로 덮을 수 있다. 먹이를 물어 오는 일개미, 새끼를 돌보는 일개미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식구들 간에 업무 분담이 전혀 돼 있지 않아 매사에 우왕좌왕하는 개미 군락보다 번식, 군락 방어, 먹이 사냥, 새끼 돌보기 등에 각각 특화된 개미들로 업무가 잘 분담된 개미 군락이 더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불임성 일꾼은 집단의 차원에서 이득을 주므로 자연 선택됐다고 다윈은 결론 내렸다.
다윈은 농가에서 품종을 개량해 맛이 기가 막힌 소나 채소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주목했다. 축산업자들은 빨간 육질 사이에 서리가 내린 듯 지방질이 촘촘히 박힌 소 품종을 만들려고 자나깨나 분투한다. 마블링이 잘 된 1++ 등급 쇠고기는 향도 좋고 식감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다. 최고 등급의 쇠고기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 소를 도축해야 한다. 따라서 송아지들 가운데 축산업자가 원하는 형질을 지닌 송아지만 살려서 키우는 일반적인 품종 개량법으로는 마블링이 뛰어난 소의 품종을 만들어낼 수 없다. 걱정 마시라. 축산업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찾아냈다. 피붙이끼리는 서로 닮는 경향이 있으므로, 마블링이 잘된 소는 도축하고 그 소의 가족들을 번식시키면 된다. 마블링이 잘된 소는 자기는 불리하지만 혈연 집단에게 이득을 주므로(인간의 손에 계속 길러진다) 인위 선택된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기본적으로 개체 수준에서 일어나지만 때때로 개체보다 더 높은 집단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협력이 자연계에 흔하다 한들 그다지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숭고한 이타심과 헌신조차 자신의 이론으로 매끄럽게 설명할 길이 열렸음을 다윈은 놓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0여 년 뒤에 나온 ‘인간의 유래와 성에 관련된 선택’에서, 다윈은 약자에게 공감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기꺼이 돕는 인간의 사회적 성향은 집단 선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인간 집단 간의 경쟁에서는 “언제나 서로 돕고 지켜주고 위험을 알려주는 사람, 즉 용감하고, 동정적이고, 진실한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요약하자. 다윈은 이타성의 진화가 진화생물학의 핵심 논제임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일개미가 다윈을 반쯤 넋이 나가게 한 까닭은, 불임성 일꾼이 어떻게 처음 진화했는가가 아니라 형태적으로 다양한 일꾼 계급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다윈은 이타성의 진화라는 ‘사소한 어려움’을 집단 선택에 기대어 설명했다. 다행히도, 다윈은 뼛속까지 집단 선택론자는 절대 아니었다. 선택은 개체 혹은 집단이라는 여러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종종 갈등이 불거짐을 다윈은 알고 있었다. 다음 호의 주제다.